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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3일 (화)부활 제4주간 화요일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신부님강론
연중 10 주일(가해)

184 양권식 [ysimeon] 2008-06-07

연중 10 주일(가해)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죄인 중의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세리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이 사람은 나중에 마태오 복음서를 쓰게 됩니다. 예수님은 세리인 마태오의 집에서 식사를 하십니다. 그 식탁에는 세리와 죄인들도 함께 있었고, 그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과 어울린다고 불평합니다. 그 불평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은 병든 이와 죄인을 위해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호세아 예언서(6,6)를 인용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욕먹고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 중의 한 부류가 이런 세리들이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었던 예수님 시대의 유다는 로마에 세금을 수탈당했습니다. 지배국인 로마에서 세금을 할당하는데, 물론 대부분은 로마인들이 직접 걷었지만 일부는 유대인을 통해서 걷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세리와 같은 자리를 차지하려면 점령자인 로마인과 사이가 좋아야 했고, 또한 경우에 따라서 어떠한 타협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했습니다. 세리들은 이권을 누리기 위해서 많은 돈을 들여 세리직을 샀으므로 거기에서 또 상상도 할 수 없는 폭리를 취했습니다. 당연히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럴수록 동족의 고혈을 착취하며 더 돈에 집착했던 사람들이 세리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돈 다루는 사람들을 부정하게 여겼고, 그런 사람들과 가까이하는 이들조차 부정 탄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죄인으로 통하는 사람은 그 외에도 많았습니다. 율법, 특히 안식일 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과 성전에 십일조를 납부하지 않는 사람도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세리를 포함하여 도둑과 강도는 말할 것도 없고, 목자와 선원도 죄인이었습니다. 목자는 양떼를 몰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힘들여 가꾸어 놓은 농산물에 피해를 주기 때문이고, 선원은 안식일에도 항해하는 배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고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체적 장애를 가진 이와 병든 이들도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말합니다. 같은 사람들끼리 어울린다는 뜻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도 같은 죄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하고 따지고 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불평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호세아 예언서를 인용하면서 하느님에게 소중한 것은 제사가 아니라, 이웃을 위한 자비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겉으로 드러내는 제사가 아니라 당신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보살핌과 자선인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죄인으로 단죄 받는 삶을 살아온 마태오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다가가시어 “나를 따라라” 하고 초대하십니다. 그가 회개했기 때문에 그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저 그에게“나를 따라라”(마태 9,9)는 부르심을 주십니다. 이제껏 그 누구도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주지 않고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소외되었던 마태오, 세관이 삶의 모든 것이라는 체념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야 했던 마태오, 자신은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받지 못하는 비참한 인간이라고 아무런 희망 없이 살아야 했던 마태오, 이러한 그에게 다가온 하느님의 초대였기에 그 기쁨은 매우 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말을 붙여주시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동행할 것을 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여타의 사람들과 다른 태도가 느껴집니다. 그를 보며, 사람들은 세리라는 직업에 중심을 두었던 것이고, 예수님은 마태오라는 한 인간에 보다 더 큰 초점을 두었습니다. 사람들은 겉모습과 고정관념을 통해 그를 세리로, 죄인으로 규정지었지만, 예수님은 ‘인간’ 마태오에 중점을 두고 애정을 가지고 그를 대하시어 그를 해방시키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의 과거를 보며 멸시하고 천대하고 업신여겼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변화된 미래를 예견하시며 과거의 죄를 치유해주시며 잊어주시고 없애주시고 믿어주십니다. 상처투성이인 그의 삶을 사랑하시고 자비를 베풀어 과거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마태오에게 있어서 예수님과의 이 짧은 만남은 인생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선뜻 일어나 그분을 따라갑니다. 성경에서 ‘일어나다’라는 단어가 ‘부활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제껏 마태오의 상태는 죽은 상태, 곧 생명이 없고 어두움만이 있던 상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가 일어나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이제 어두움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에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생각과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예수님의 마음과 사람들의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없애기 위해 선택하신 방법이 법을 더욱 치밀하게 만들고, 벌을 더욱 엄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용서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죄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용서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신앙인은 변화의 가능성, 회개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며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세리 마태오가 주님의 말씀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사가 마태오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이웃을 용서할 때 사람들의 변화와 죄인의 회개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죄인으로 단죄 받던 사람들이 많았던 만큼, 오늘 날도 우리 주변엔 수없이 많은 죄인들과 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포함한 많은 죄인들과 죄를 마주대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선택할 수밖에 없고 선택해야 하는 길은 오직 용서를 배워 익히는 길뿐이라고 말한 다면 지나친 이야기가 될까요?
미국 인디애나 주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5살 된 한 소년이 뇌종양으로 심하게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방사선 치료와 화학요법으로 치료를 받던 소년은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나간 민둥민둥한 머리를 한 채 절망 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소년의 학교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의논을 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투병생활을 하는 친구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소년의 친구들은 의견을 모으고 오래 논의한 끝에 마침내 한 가지 결의를 했습니다. 다음 날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소년의 친구들은 모두 머리를 빡빡 머리를 한 채 나타났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를 단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중에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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