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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0일 (토)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신부님강론
연중 9 주일 (가해)

183 양권식 [ysimeon] 2008-05-31

연중 9 주일 (가해)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연중 9 주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묵상하는 사순시기와 부활시기를 살고 다시 일상 안에서의 신앙생활을 다짐하는 연중시기를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연중 9주일의 복음말씀은 지난 연중 8 주일에 들었던 산상설교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산상설교는 당시 청중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뿐 아니라 새로운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산상설교를 통해 전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아름답고 감미로울 뿐만 아니라, 누구나 고개가 끄떡여지는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름답고 감미로운 당신의 말씀에 감탄만 하고, 그저 "주님, 주님!"하는 말로 찬미만 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여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참다운 신앙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야 말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신앙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모태인 유대교는 하느님에 대한 모세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깨달음의 핵심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었고, 그 함께 계심이 확인되는 장소는 신앙인의 실천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기도 중에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내 모든 선한 모습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며, 야훼라는 이름을 너에게 선포하리라. 나는 돌보고 싶은 자는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고 싶은 자는 가엾이 여긴다.” 모세가 보고자 한 야훼 하느님은 당신을‘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그러한 야훼의 모습이 확인되는 장소는 이웃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인간의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가 흐르면서 제관들은 바칠 것을, 율사들은 지킬 것을 강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은 바치고 지키는 일에 시선을 빼앗긴 나머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은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었을 때 이스라엘에는 예언자들이 나타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무엇 하러 이 많은 제물을 나에게 바치느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 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 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제물을 바칠 것이 아니라, 억눌린 사람과 생활 대책이 없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실천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예언자들의 지적과 고발은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유효한 듯합니다. 주일을 지키는 일이 자선을 행하는 것 보다 중요한 종교적 가르침이 되었고, 교회에 봉헌금을 내는 일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일보다 우선시하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을 건립하는 일이 지역사회를 위한 헌신보다 급선무로 보이고, 교회의 전통을 지키는 일이 신자들의 아픔을 바라보는 일 보다 헌신적인 일이 되어가는 듯한 현실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말씀을 묵상하며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바칠 것과 지킬 것에 너무 피곤해진 우리의 신앙태도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요즘도 기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기도를 하긴 하는데 변화되지 않는 것과, 기도도 선교도 열심히 하지 않는데 교회가 유지되는 것, 기도와 선교를 별로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괜찮은 신자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며, 강론을 들으며, 기도를 하면서, 전례 중에, 일상생활에서 그리고 형제자매들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감동을 받을 수 있고, 주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과연 신앙생활이 벅찬 감동으로만 이뤄질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장엄한 전례나 감동적인 강론이 우리의 신앙을 담보해 주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빈번한 미사참여와 고백성사가 구원을 담보해 주지 않는 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무지와 냉담도 위험하지만,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 또한 우리들이 신앙생활 안에서 경계해야 할 아주 큰 위험입니다. 예수의 대 테레사 성녀께서도 지적하셨듯이,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며 경계해야 할 유혹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해로운 환각" 혹은 "착각"입니다. 마치 자기 자신은 말씀과 일치한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은 아주 쉽게 우리를 찾아옵니다. 성인들의 전통적인 표현에 따르면 말씀의 감미로움에 빠져 감탄만 하고 있는 틈을 타 이러한 착각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는 겸손으로 포장된 교만이나 거룩함으로 장식된 거짓성덕 등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착각과 교만을 식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신학자의 차가운 이론에 의해 증명되고 설명된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못 할게 없는 우리들의 부모님이 믿던 부실한 하느님입니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죽은 후에 우리의 죄를 낱낱이 찾아 내 우리를 심판하실 하느님이 아니라 힘없는 이들의 불만 섞인 원망을 들어주시는 천덕꾸러기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만진 창이가 된 세상에서 만진 창이가 된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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