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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일] 기도 (루카 18,9-14)

185 김종업 [rlawhddjq] 2019-10-26

 

 

2019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일] 기도 (루카 18,9-14)

 

집회서의 저자는,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주님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고 한다. (집회35,15ㄴ-17.20-22ㄴ)
15 주님께서는 심판자이시고 차별 대우를 하지 않으신다.
16 그분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시리라.
17 그분께서는 고아의 간청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과부가 쏟아 놓는 하소연을 들어 주신다.
20 뜻에 맞게 예배를 드리는 이는 받아들여지고  그의 기도는 구름에까지 올라가리라.
21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살펴 주실 때까지 그만두지 않으니
22 그분께서 의로운 자들의 송사를 듣고 판결해 주신다. 주님께서는 머뭇거리지 않으신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자신은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고 한다. (2티모 4,6-8.16-18)
사랑하는 그대여, 6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7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8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16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이것이 불리하게 셈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17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
18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예수님께서는 교만한 바리사이의 기도와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비유로 드시며,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신다. (루카 18,9-14)
그때에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연중 제30주일 제2독서(2티모4,6~8.16~18)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7~8)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티모테오 2서 4장 6절에서 바오로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예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제 티모테오 2서 4장 7절은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인데, 티모테오 2서 4장 8절과 함께 암송까지 되는 유명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세 가지 단언으로 되어 있다.

첫번째는 '내가 훌륭히 싸웠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싸우고'로 번역된 '에고니스마이'(egonismai)'싸우다', '투쟁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고니죠마이'(agonizomai)현재 완료형이다. 

이것은 코린토 전서 9장 5절이나 콜로사이 1장 29절 등에서 나타나듯이 바오로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며, 바오로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투쟁의 삶을 살았음을 나타내준다.

 

새 성경은 그냥 '훌륭히'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은 '톤 칼론 아고나'(ton kalon agona; a good fight)로서 '선한 싸움을' 이란 말이다.

여기서 '싸움'이라는 것은 이어서 등장하는 '달릴 길'이란 어구를 참조할 때 바오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싸움은 전쟁이라기 보다는 운동 경기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이 올림픽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과 같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고 이제 그것이 종결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사도 바오로는 과거를 회상하면서'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렸다' 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달릴 길'로 언급된 '드로몬'(dromon)은 일반적으로 '경주 코스'를 뜻하는데, 이는 본문이 운동 경기 가운데서도 마라톤 경기와 관련된 비유임을 암시한다. 

사도 바오로는 마치 마라톤 선수가 그 긴 거리를 완주하는 것과 같이 믿음의 마라톤 경주를 마쳤다고 회고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다 달렸다'로 번역된 '테텔레카'(teteleka)본래 '끝내다','완수하다'는 뜻을 지닌 '텔레오'(teleo)현재 완료형이라는 사실사도 바오로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위탁한 그 영광스러운 복음 전파를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왔고 이제 드디어 그 일을 완수했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즉 본문의 핵심은 사도 바오로가 그다지도 긴 믿음의 코스를 완주했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세째로 사도 바오로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믿음'으로 번역된 '피스틴'(pistin)'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신실성' 의미한다.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이후 한번도 굴하지 않고 줄곧 그분께 대한 믿음을 지켜왔던 것이다.  

이것은 '지켰습니다' 번역된 '테테레카'(tetereka)'지키다','보존하다'라는  뜻을 지닌 '테레오'(tereo)현재 완료형이란 사실이 보여 준다.

 

이 단어는 경기하는 자가 자신이 참가한 종목에서 경기 규칙을 지키는 것, 군인이 군대와 그 상관에 대한 충성의 서약을 지키는 것, 나아가 청지기(집사)가 자신의 주인이 위탁한 재산을 지키는 것과 결부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정리하면 이제 죽음에 즈음한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과거의 생을 돌아 보건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만큼은 당당히 고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8)

 

'이제는'으로 번역된 '로이폰'(loipon)은 문자적으로는 '이제 남은 것은'이란 의미이다.

사도 바오로는 6절에서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해 언급하고 7절에서 자신의 과거 상황에 대해 언급한 반면, 이제 8절에서는 자신의 시야를 미래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믿음에 관한 한 떳떳한 인생을 살아온 사도 바오로의 미래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사도 바오로는 그것을 '의로움의 화관'으로 지칭한다. 여기서 '화관'으로 번역된 '스테파노스'(stephanos)는 일반적으로  올림픽 경기가 끝난 후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상인 월계관 의미한다.

 

 

여기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에게 주어질 '의로움의 화관'이라는 것은 결국 하느님께서 친히 마련해 두신 것으로서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에서 수여되는 영원한 생명과 충성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1티모6,12; 야고1,12; 1베드5,4; 묵시2,10).

 

한편 본절에서 '마련되어 있습니다' 해당하는 '아포케이타이'(apokeitai)는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쓰였다. 이것은 '의로움의 화관'이 수여되는 시점이 미래이지만 현재에 이미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사도 바오로는 여기서 자신에게 의로움의 화관을 수여할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밝힌다. 그것은 바로 의로운 심판관으로부터이다.

여기서 '의로운 심판관' 해당하는 '호 디카이오스 크리테스'(ho dikaios krites)는  문자적으로 '정직한 재판장'(the righteous judge)이라는 의미에 가깝지만, 문맥상 일체의 오류를 허용하지 않고 모든 인류 곧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시는 분(2티모4,1),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의미한다.

 

그 의로운 심판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그 날'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시는 재림의 날에' 사도 바오로를 비롯한 주님의 재림을 애타게 기다려온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로움의 화관 수여하실 것이다.

 

여기서 '애타게 기다린'으로 번역된 '에가페코신'(egapekosin)은 본래 '사랑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가파오'(agapao)현재 완료 분사 복수형이다.

이것은 과거로부터 상급을 받을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간절하게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의로움의 화관이 주어질 것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연중제30주일 복음 (루카18,9-14)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복음 18장 1~8절'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절망하지 말고 인내하며 항상 기도해야 할 것에 대해 교훈을 주었다면, 루카 복음 18장 9~14절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대조하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기도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다.

 

'스스로 의롭다고'에 해당하는 '에프 헤아우토이스 호티 에이신 디카이오이' (eph' heautois hoti eisin dikaioi; in themselves that they were righteous)에서 '에프 헤아우토이스'는 직역하면 '그들 자신들'로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당시 유대 사회의 종교 지도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려고 위선적인 의(義)를 행하는 자들이었다(마태6,1).

 

고전 희랍어 문헌에 보면, '의로운 자'란 그 행위가 자신이 소속된 사회의 구조와 조화를 이루고, 신들과 이웃들에 대한 정당한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자를 말했다.

그러한 의무 이행은 그 사람을 불의한 자들과 구별해 주는 기준의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해야 정당한 의무도, 그리고 이웃에게 행해야 할 진정한 사랑과 공의도 완벽하게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의로운 자라고 불렀다(루카20,20).

 

아마도 그들은 율법에 해박하였고, 비록 위선일 수밖에 없었지만, 적어도 그들 스스로 보기에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열성적인 율법 이행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근본 정신을 저버림으로써, 하느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지도 못하면서, 껍데기 외형적 행동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자신들의 고정 관념의 테두리 안에서 안주하며, 스스로를 의롭다고 높여 세우는 위선자였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이었는데, '업신여기는'으로 번역된 '엑수테눈타스'(eksouthenountas; despised; looked down on)'경시하다', '얕보다'는 뜻을 지닌 동사 '엑수테네오'(eksoutheneo)의 현재 분사로,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에 해당하는 '호이 로이포이 톤 안트로폰'(hoi loipoi ton anthropon; other men)그들에게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데, 그들은 자신들 집단 외에는 모두 의롭지 못한 부정한 자들로 여기는 극히 독선적이고 편협한 의식의 소유자들이었다.

 

루카 복음 18장 10절에서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모든 도시의 건물들 위에 높은 지대인 모리야 산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고, 또한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전에 대한 외경심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루에 보통 세 번씩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시간가졌는데, 현재의 시각으로 말하자면, 오전9시, 정오, 오후3시이며, 유대의 시간법으로는 각각 제3시, 제6시, 제9시였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기도하던 장소는 성소가 아니라 성전의 뜰로서 '여인의 뜰'이라고 불리워지는 곳이었다.

 

하지만 세리는 루카 복음 18장 13절'멀찍이 서서'라는 표현을 볼 때, '여인의 뜰'이 아니라 그 바깥에 있는 '이방인의 뜰'에서 기도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두 사람중 하나는 '바리사이'에 해당하는 '파리사이오스'(pharisaios; a pharisee)이고, 다른 하나는 바리사이와 확연히 구분되는 '세리'에 해당하는 '텔로네스'(telones; a publican; a tax collector)이다.

 

바리사이율법의 외형적 준수를 중요시하던 당파자신들 스스로에 대하여 의롭다고 여겼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과 형식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반면에 세리는 로마 정책에 따라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수탈하언 자로서, 사람들에게는 죄인으로 여겨졌지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의 잘못을 자책하고 있는 그의 친구가 되어주셨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바리사이는 의(義)를 대표하는 자처럼, 세리는 마치 부정과 불의의 대표처럼 여겨졌다.

 

한편, 루카 복음 18장 11절에 나오는 '서서' 기도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기도자세였다.

여기 '서서'에 해당하는 '스타테이스'(statheis; stood)'서다', '두다', '위치하다'는 뜻을 가진 '히스테미'(hystemi)의 과거 수동태 분사이다.

 

루카 복음 18장 13절세리가 서서 기도했다는 표현이 능동형으로 쓰인 것과 달리, 바리사이의 경우에 수동태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표현이다.

이것은 바리사이가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신을 드러내고자 의식적으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위치에서 기도하고 있었던 태도를 암시한다.

 

그리고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기도한 것으로 나오는데, 원문에는 '꼿꼿이'가  '프로스 헤아우톤'(pros heauton)이다.

 

여기서 '프로스'(pros)'~에게로 향하여'(towards)라는 뜻의 전치사이며, '헤아우톤'(heauton)'그 자신'(himself)이라는 뜻의 재귀 대명사이므로, '그 자신에게로'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자신을 치켜세우면서 기도했다는 의미도 있고, 문맥상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도록 무리들과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자신의 자랑거리만을 늘어 놓으며 하느님께 거만하게 기도했던 것으로도 보며, 혹자는 바리사이가 하느님께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기도한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이제 바리사이는 세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서 기도하는 것으로 나온다.

 

'강도 짓'에 해당하는 '하르파게스'(harpages; robbers)는 형용사로, 이리처럼 '탐욕스러운', '게걸스럽게 먹는'이라는 뜻이며, 명사로는 '강도', '사기꾼'이라는 뜻이 된다. 그 당시 세리는 로마에 고용되어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일을 했으며, 그래서 세리는 지배자들인 로마보다 더 악하고 불의하다고 여겨졌고, 동족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더군다나 단순히 로마에서 원하는 세금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리를 위해 세금 외의 돈을 뜯어가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을 바리사이도 너무나 잘 알기에 세리의 죄를 간접적으로 들추어 내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리는 '강도짓' 뿐만 아니라 '불의'를 저질렀다고 지적받는다.

 

'불의'에 해당하는 '아디코이'(adikoi; unjust; evildoers)정의를 해치거나 범하는 자들에 대한 표현으로서, 여기서는 다른 사람을 속임수로 대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그리고 '간음'에 해당하는 '모이코이'(moichoi; adulterrers)'강도짓''불의'와 다 연결될 수 있는 범죄이기에 여기서 나열한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강도짓을 일삼았고(마태23,14),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한 '불의한 자들'이었고(마태23,28), 여자를 보고 음란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지적하신다(요한8,7~9; 마태5,28).

 

루카 복음 18장 11절에서 바리사이는 세리의 죄를 지적하면서 자신들은 이들과 구별되는 자로서 의롭다는 것을 드러낸다.

바리사이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회개해야 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부족한 것이 없기에 구할 것도 없었다.

 

바리사이는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루카 복음 18장 12절에서 말한다. 

구약에서는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단식(레위16,29~30; 민수29,7)하도록 되어 있지만,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규정에 없는 경건의 습관으로 일주일에 두 번 단식했다고 자랑한다. 

 

바리사이들은 시나이 산에 계약을 맺으러 올라간 날로 여겨시는 목요일내려온 날이라고 여겨지는 월요일에 단식했던 것이다.

사실 모든 재산과 소득의 십일조를 준수하는 바리사이들은 신명기 14장 22~23절의 규정을 능가하는 봉헌을 했던 것이다.

 

여기서 '단식'하다에 해당하는 '네스튜오'(nesteuo; I fast)'십일조를 바치다'해당하는 '아포테카토'(apodekato; I give tithes ;I give a theuth of)가  바리사이들의 자랑거리인데, 그들은 하느님 앞에 겸손하기보다는 자신만이 의롭다는 교만과 자신이 정작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기도를 바치고 있다.

 

한편, 루카 복음 18장 13절에서 세리는 죄인과 같이 취급당하여 거룩한 성소 가까이 가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또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바리사이 옆에 서서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었다.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의 일반적인 자세인데, 세리는 눈을 들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기를 원치도 않았다.

세리는 자신의 더러움과 비천함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에,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을 생각조차 못했으며, 겸손함과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의 자세를 가지고 기도했다.


그의 기도의 내용은 너무나 단순했으며, 회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루카 복음 18장 13절'불쌍히 여겨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힐라스테티'(hylastheti)'힐라스코마이'(hylaskomai)의 수동태 명령형이다.

 

이 단어는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게 만들다', '자신과 화해시키다'는 뜻인데, 가슴을 치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참회와 겸손의 극치이다. 

이것은 '하느님, 자비를 베푸소서', '호의를 가지소서'라는 말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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