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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 성인 - 성 김대건 안드레아

17 서동신 [dsseo] 2016-12-05

주보 성인

 

성 김대건 신부의 순교영성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21-1846)는 참으로 놀라운 순교영성으로 사즉생(死卽生), 즉 죽으면 사는 길을 온몸으로 사신 큰 모범을 보이셨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가 9,23)라는 성경 말씀대로, 그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으로 순교함으로써 순교영성의 꽃과 향기를 온누리에 피우셨다.

소년 김대건은 16살 되던 해인 1836년 부활절에 은이공소를 방문한 모방 신부로부터 신학생 후보로 선발되었다. 그의 순교의 여정은 처음부터 예상되었다.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고국을 떠난지 15개월 만의 일이다. 중국 마카오 유학 중에 함께 갔던 동기 최방제 신학생이 열악한 환경에서 열병으로 죽었는데 인정 많던 김대건은 찢어질 뜻 가슴이 아파 목놓아 통곡하여 울다가 실신하기도 하였다.

이후 철학과정을 마치고 신학과정을 마친 1844년, 24살에 김대건은 중국 길림성 큰 도시 장춘에서 서북쪽으로 약 75리 정도에 위치한 소팔가자(小八家子)에서 최양업 토마스와 같이 부제서품을 받았다. 다음 해에 김대건 부제는 25살이 되던 해인 1845년 8월 17일에 중국 상해 연안에 있는 17세기 명나라 숙종 때 중국 화동지역 최초로 건립된 성당인 금가항(金家巷) 천주당에서 페레올(1808-1853)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았다. 

1846년 6월 5일, 26살에 김대건 신부는 지금의 연평도에서 동력선으로 한 시간 걸리는 지금의 해주 서쪽의 순위도(巡威島) 창바위에서 체포되어 해주감영으로 압송되었고 곧바로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결국, 김대건 신부는 40여 차례에 걸쳐 고통스런 문초를 받았는데 8월 말에는 페레올 주교에게 마지막 서한을 보냈다.

"우리 종교는 천주를 공경하라고 가르치고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이끌어 갑니다.… 저희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증명할 힘을 저희들에게 주실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천국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이어서 사흘 뒤, 8월 29일에 김대건 신부는 조선 교우들에게 마지막 하직인사를 하는 편지를 보냈다. 

"제발 여러분은 덕을 닦아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이 험한 시기에 쓸데없이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비록 여러 사람일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애덕을 잊지 마시고 서로 참고 서로 도우십시오.… (추신) 내 죽음은 물론 여러분에게 타격이 될 것이고 여러분의 영혼은 슬픔 속에 빠질 것입니다.… 너무 슬퍼 마시고… 애덕으로 결합하여 있읍시다. 그러면 죽은 다음에 우리는 영원히 결합하여 있을 것이고 영원히 천주 대전에서 누릴 것입니다."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페레올 주교는 순교한 김대건 신부에 대해 "열렬한 신앙심, 솔직하고 진실한 신심, 놀랄 만큼 유창한 말씨는 한 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얻어주는 것이었다."고 애도하였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김대건 신부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마태 10, 22)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충실하셨다. 자신의 모든 것, 즉 이기심에 근거한 집착과 소유욕을 철저히 버리신 참다운 자기비허(自己卑虛, 필립비 2,7)를 실천한 순교영성의 모범이셨다. 아멘 (원주교구 고한본당/ 서동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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