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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0년 2월 24일 (월)연중 제7주간 월요일주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우리끼리살짝
성소의 식별 ㅡ 성소를 거스르고 있다고 생각하시지 않도록 설명해 드리도록 합니다.

1166 김건호 [kgh0727] 2006-02-19

성소의 식별


여러 해에 걸쳐 저는

자신이 사제나 축성생활의 성소를 가지고 있는지를 식별하고자 하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가져왔습니다.

때론 그들을 깜짝 놀라 대경실색하게 만든 답변이었지만, 저는 그들에게 그들이 잘못된 길을 따라가고 있으며,

그들이 “식별(discerning)”하고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다른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해주어야 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께서 제가 성소를 거스르고 있다고 생각하시지 않도록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식별에 관련한 큰 문제는,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

하느님과의 중대한 대화이어야 하는 무엇, 자신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숨결 체험, 우리의 가장 깊고도 숭고한 열망의 설렘은 차가운 검토,

그리고 위험과 취향들과 보상에 대한 풀죽은 계산으로 변모하곤 합니다.

점점 증대되는 신뢰와 의탁 대신에 식별이란?

흔히 세상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러한 시도들을 그만 두십시오.

모든 비약을 찾으려는 노력을 그만 두십시오.

그리고 그 위에 사랑을 우리의 결정의 한 요소로 올려 놓으십시오.

식별 자체의 본질(nature)은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성소 사안(事案)에서 식별이란 하나의 요소일 뿐이며 --

 아마도 우리의 주의(注意)의 대부분을 가장 많이 끌고 우리가 가장 근접하려고 안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 우리가 거의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이라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전체적인 맥락 성소에 관한 근본적인 진리란 그 원천이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실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위한 특별한 꿈을 갖고 계십니다.

당신의 섭리와 헤아리심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에 대하여 우리가 충분한 명시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 계획을 인지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등식의 또 다른 변(此邊)에 있습니다.

이러한 인지(perception)와 수용(acceptance)은 지성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영적이고 감정적인 차원 등 우리 본성(nature)의 모든 레벨에서 발생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성소식별이 -- 그에 대하여 기도할 것이기는 하지만 --

자신의 성소의 존재에 대한 회의적인 지성을 만족시키려 노력하는 과정이라 이해하고 있습니다.

순전히 그리고 단순하게. 그러나 이는 중요한 한 가지를 빠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예를 들어,

부르심을 받아들이려는 우리 자신의 자발적 의향(willingness)과 같은 요소를 고려하지 않을 뿐더러,

그러한 자발적 의향이 부르심을 인지하는 우리의 능력에 주는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또한 부르심을 인지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우리 안에 있을지도 모를 장애물들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성소를 찾는 우리의 노력에 있어 잘못된 결과들인 것입니다.

그것은 자주 부르심의 여부를 판정함에 있어 숨겨져 있는 요인이 됩니다.

성공적인 식별의 열쇠

만일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것을 하기만 한다면, 식별은 진정으로 성공일 것입니다.

너무도 명백합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따르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성소가 무엇인지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득 없는 것인지를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아마도 놀랍다고 생각할만한 것은 자신의 성소를 따르고자 하는 자발적 의향이

부르심을 받아들이려는 우리의 자발적 의향의 주된 요인이고,

아울러 부르심을 받아들이려는 우리의 자발적 의향은 성소를 발견해내는 능력의 주된 요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발견이란 성소가 있다는 지성적인 레벨에서의 받아들임입니다.

받아들임이란 그것이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할 무엇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동 -- 실행되는 것은 사랑입니다 -- 은 과정 전체의 왕관입니다.

우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느 정도의 편견과 착오들을 가지고 식별에 접근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안에 대한 무관심은 우리 본성(nature)의 일부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소를 따름에 이어 수반되는 희생들은 그[성소] 존재를 받아들이려는 우리의 자발적 의향에 곁들여 집니다.

자주, 신원이 의문시되는 사람을 앞에 둔 접경지역의 경계병처럼, 우리는 성소에 질문을 쏟아 부음으로써

-- 성소에 대하여 순전히 책만 뒤적이면서 -- 오히려 성소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소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있어 진정한 도전이란

-- 만일 그가 성소를 가지고 있다면 -- 그러한 성소를 따르고자 하는지 여부입니다.

진짜 문제는 이러한 자발적 의향,

즉 [성소에 대한] 무조건적인 열려있음(unconditional openness)을 획득했는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식별 자체보다 우리에게 있어 관건이 됩니다.

열려있음과 그에 대한 도전들 종종 우리는 생각으로나마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을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지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열려있음이라 이해를 합니다.

그보다 유용한 열려있음의 유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제게 무엇을 원하시든 그것을 하겠습니다.”라고 하느님께 말씀드릴 수 있는 능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기도의 열매이고 기도 안에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청원의 기도이기보다는 봉헌의 기도 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열려있음은 중대한 장애물들에 직면하는데 그것의 대부분은 우리 안에서 작용합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그것들 중 몇몇을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다.

(참고. 루까 8; 4-15) 사탄이 와서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말씀을 빼앗아 갑니다.

우리는 그를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우리는 그 유혹하는 자를 우리 성소 식별의 적극적인 참여자로서 결코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청객으로 개입합니다.

베드로를 기억하십니까?

그가 성령을 따르는 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임을 볼(“식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그 사람에게 “사탄”이라고 부르셔야 했습니다.

우리 자신을 성소에 열어두려는 노력 안에서 우리는 우리 마음을 열어 놓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어렵게는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드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말의 아비인 적은 우리의 판단에 먹구름을 드리워 놓고 우리 마음을 굳게 만들려고 온갖 술수를 다 부리고 있습니다.

때때로 형제 자매들이 궁핍함에 있고 진리를 굶주려 하고 목말라 하고 있는데도 그 옆에서 수수방관하는 스산한 무관심은 이러한 악령의 작용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려움이나 시련을 거쳐 나갈 때 그것 자체가 하느님의 뜻을 가리키는 지시자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의 정화를 위하여 허락하신 악령의 작용일 수 있음을 우리는 자주 잊습니다.

감정. “그것은 잠시동안은 열광적이지만 그 후 시련이 닥치면 떨어져 나갑니다.”

우리의 감정의 기복(起伏)은 자주 우리의 열려있음에 영향을 미칩니다.

어느 날 우리는 열려있다가도 다른 날에는 그렇지 못합니다.

어느 날엔가 우리는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리려 하지만 다른 날에 우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해 버립니다.

어느 한 순간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시키실지 알고자 원하지만 그 다음 순간 우리는 그분께서 청하시는 바에 슬퍼하면서 그로부터 멀어져 걸어 나갑니다.

리의 그리스도교 생활은 감정의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되며 확신과 사랑의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끌어당김. 우리 마음속에서 많은 것들이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자체로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자리잡고는 있지만 진리나 하느님 뜻의 최종적 결정자는 아닌 본능과 격정(passions)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세상의 “근심과 부와 즐거움”은 이러한 본능과 격정들을 통하여 우리를 끌어당기는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 자신의 신원의 가장 핵심부, 육신과 영혼에는 이러한 두 가지 요소들에 맞서 싸워나가야 할 실제적인 투쟁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지 않았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우리가 그 뜻을 따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도록 우리를 일깨웁니다.

씨앗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수분이 없기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그러한 씨앗이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것들이 개입되어 씨앗이 자라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많고도 많은 가능성 있던 성소들의 흔한 운명일 것입니다.

우리는 감히 그러한 운명에 대해 직선적으로 ‘노(no)’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길 미루면서 그에 점령당하며 우리를 부르심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는 활동과 계획들에 우리의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그[성소] 대신 다른 것들을 그 자리에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좋은 토양.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진정으로 자신의 성소에 열려있는 사람에 대한 경이로운 묘사를 하십니다.

그는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를 통하여]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 대한 묘사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보고 읽는 성인들의 삶이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바이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나 마더 데레사의 마음 안에서 발견하신 좋은 토양으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더 풍성해졌습니까,

그리고 어떠한 놀라운 열매를 그분들께서는 인내

-- 유혹을 이겨내신 인내, 그리고 말씀이 그분들의 삶 안에 깊숙이 들어와 그분들께 비범한 요구를 하도록 하심, 또한 씨앗을 질식시킬지도 모를 어떠한 애착이나 야망을 마음으로부터 씻어내도록 하심 --

속에서 꾸준히 맺어 오셨습니까?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당신의 초대를 열어 놓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위한 당신의 꿈을 묘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는 당신의 은총으로써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라고 말씀하십니다.

식별의 요소들 “식별”이 성공적인 성소 찾기를 위한 가장 중요한 단면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이 필요한 것이라고 일단 주장하면서 그것을 잘 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보도록 합시다.

태도. 반복의 위험에 처하여 : 만일 당신이 성소에 따르는 무엇에 지레 겁먹어 뻣뻣해진다면,

당신은 자신을 열어놓기가 그리고 그것[성소]이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음을 받아들이기가 더욱 어려움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지만 기운을 차리십시오.

기도 외에도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상대적으로 단순하고도 실제적인 몇 가지 수단들이 있습니다.

그중 한 가지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삶(공동체, 운동, 신학교 등)을 가고 있는 사람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들을 방문하여 그분들이 당신과 같은 사람들인지,

그분들이 어떠한 시련들을 겪어 내었는지(그리고 겪고 있는지),

그리고 여전히 그분들께서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는지를 알아 보십시오
.

다른 하나는 그러한 삶을 스스로 시도해 보는 것입니다.

방문하십시오.

그에 대한 좋은 느낌을 얻기에 충분한 오랜 동안의 방문.

만일 그곳이 하느님께서 당신을 원하시는 곳이라면 당신은 당신과 같이 보잘 것 없고 약한 사람도 살아낼 수 있는 삶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조성하신 도움들을 발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는 위대한 성소 촉진제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모든 영적인 나르시시즘을 떨쳐 버리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재능에 대하여 생각하길 멈추십시오.

당신이 다른 이들과 그리스도를 어떻게 하면 도와드릴 수 있을지에 대하여 생각하십시오.

개인적인 안위를 찾지 마십시오. 읽으십시오.

그러나 영감을 주는 것들을 읽으십시오.

성서. 사도행전. 성인들의 생애들. 그분들의 영웅적인 면모는 우리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우리 마음 안에 불을 놓으실 수 있습니다.

밝혀 주심을 위한 기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데 있어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달리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란 그리 많지 않습니다 -- 사실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밝혀주심은 신앙의 실천을 통해 다가오며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새로운 빛 안에서 볼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신앙이 없다면 당신의 탄생은 어떠한 조건들이 함께 넘쳐남으로써 설명될 수 있는 우연한 사건일 뿐이 됩니다.

신앙이 있다면 당신의 탄생과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 됩니다...)

자기자신에 대한 앎(self-knowledge). 우리는 어느 정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줄 수 있는 객관성의 혜택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필요로 합니다 :



영적 지도.


우리는 우리가 신뢰하는 다른 누군가에게 우리의 생각과 체험들을 이야기하고

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징표요? 우리는 그것을 필요로 하긴 합니다.

그러나 특별히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을 자각할 필요성이 매우 큽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란 : 평상적인 것을 받아들임. 특별한 징표와 체험들을 찾아 나서려는 충동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칫 잃기 쉽지만 보다 고무적인 몇 가지 평상적인 징표들이 있습니다.

즉, 당신이 성소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당신의 개인적 영적 여정과 체험(생명이라는 선물 자체로부터 당신이 살아나가야 할 삶의 상황들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축복들, 당신이 헤쳐 나가도록 허락하신 시련들 등), 당신 삶 안에서 이루신 하느님의 섭리,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조금씩 주의를 환기시켜 오신 길을 보여주는 이정표들입니다.

회의주의를 떨쳐 버려라. 이상주의는 더 이상 적법한 것이 되지 못하고 있는 세태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섹스와 자기탐닉으로 격하되어 버린 이 시대에 있어서는 전혀 놀라울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성소를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당신은 결혼하게 될 젊은 남자와 여자만큼만이라도 꿈꾸고 희망해야만 합니다.

당신은 보다 더 꿈을 꾸어야만 합니다.

성소를 식별하기 위해서 당신은 우리 사회가 우리 안에 심어놓아 옭매고 있는 불신과 단지 실용적일 뿐인 것들의 끈들을 느슨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유형적(有形的)으로 만져서만은 알 수 없는, 사람들과 생명의 또 다른 차원

-- 모든 영혼들 안에 있는 아직 충족되지 못한 선(善)과 진리에 대한 갈망과 영적인 차원 --

이 존재함을 믿어야 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배(舟)나 집, 자동차나 승진보다도 당신의 동료들을 필요로 하신다는 사실을 열성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회는 나프타(NAFTA)나 유로(EURO), 또는 국제통화기금(IMF)보다도 그분을 더욱 필요로 합니다.

그러한 성공과 행복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라기보다 다음 세상에서의 삶에서 헤아려집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지나가고 있으나 영원함은 계속됩니다.

당신은 당신의 친구들이 미친 짓이라고 거의 예외 없이 생각할만한 일마저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식별에 있어서의 균형 지금까지 고찰한 바에 따르면, (행동을 위한 전주곡이라 했을 때만 가치를 갖는)

식별의 단계는 서로 상충되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는 두 가지 다른 국면을 포함합니다.

하나는 그것을 지성화(知性化)하여 대부분 나의 머리 속에서 풀어낼 수 있는 문제로 변화시키는 것 -- 아마도 기도의 도움으로써 그것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 입니다.

그러나 강조점은 그것을 풀어내고 있는 나 자신에 두어야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나의 마음의 움직임에 보다 많은 인도를 받는 내적인 인식, 직관입니다.

그것은 믿음에 강조점을 두며, 생활하는 모범과 직접적인 체험에 의해 불꽃이 당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두 가지 모두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 둘을 어떻게 혼용할 것인지는 개인에 달려있습니다만,

분석가로서의 나는 신앙인으로서의 나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하고 신앙인으로서의 나는 하느님께서 주신 이성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은 우리의 마음이 가있을 곳임을,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이성보다도 -- 적어도 장기간의 견지에서는 --

우리의 행동을 결정할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궁극적으로 내 안에 하느님께 자리를 마련해 드리면서 하느님을 나의 보물로 삼아 모셔 들이는 문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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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쏘니 배넌 신부님은 “물가의 베드로 : 성서와 실제 삶 안에서의 성소(Peter on the Shore : Vocation in Scripture and Real Life)”의 저자이자

Legion of Christ의 사제입니다.

Legion of Christ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알고자 하시는 분은 그분께 연락을 드릴 수 있습니다 :

475 Oak Avenue, Cheshire, CT 06410, (203) 271-0805.

 

 

http://ms6emcu.hiho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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