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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5월 7일 (화)부활 제6주간 화요일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신부님, 수녀님께
★★천인 공로할 정희준(채)암브로시오 이런 일도 다!★★

81 정희채 [jhjun8755] 2004-08-17

정희준(암브로시오 )그는 각종 성당 홍보물에서 주기도문 등 성당일들의 일을 하고 있음.
◆우리에게 가족이 왜 필요하며, 무엇을 하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개, 돼지가 아닌 다음에야 너무도 당연한 사실은, 가족을 먹이기 위해 일하고, 가족을 키우고 입히며 쓰도록 하고 보호해 주기 위함이 아닌가?◆
  그러나 나의 남편이라는 ‘정희준(본명:정희채-암브로시오)
감추기 위해 일을 했고 한꺼번에 갖다 버리기 위해 혼자 아내 몰래 돈을 모았으며, 아이들을 돌보는 아내에게 쥐어짜게 아끼고도 돈이 남아돌게끔 한 달이 없었다.
만나 동거부터 돈을 빌려간다고 가지고 가더니--다시 돌려받은 돈 없었고, 아이를 낳고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내게 가져다 주는 돈을 철저히 봉쇄했다.
 
가져다 주는 돈이 10만원 안팎의 생활을 하게 하면서--보험을 5개에서 8개이상을 넣었다, 깨었다 하면서 철저히 돈을 유린한 세월. 거기다 자신은 유흥비, 끝없는 술값, 온갖 여행에다, 명예를 사는 일이면 어떠한 돈도 갖다 버리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나와 아이들은 보일러도 안 들어오는 계단 꼭대기의 단칸방에 처박아 두고 사람 아닌 사람의 목숨을 지탱하기도 힘든 세월이었는데...
 
먹을 쌀 한 톨 없는 세상을 경험해 보았는가! 신을 신이 없어 신발을 끌고 다녀본 적 있는가!, 아니 입을 옷 조차 이 땅에 멋을 부린다는 너무큰 사치였다. 인간이 가족을 위해 일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린 굶기 위해서 살아 있었고, 이 남자의 미친 소행을 지켜보기 위해 목숨을 유지하고 산 삶이었다고 해야 옳았다.   자신의 계획대로 다 털어 가 버린 후 돌아오는 건 폭언에, 폭행에 가진 돈 더 없느냐며 자신의 통장에 찍힌 돈은 자신의 돈이라고 우기며 손대면 절도죄라고 하면서 사기치고 간 후엔 돈을 철저히 봉쇄해 버린지 너무 오랜 시간..
  동거 11년 옮겨 다닌 곳만 해도 18곳 (그 반이상이 짐 없이 몸만가서 도피하다시피 산 곳임)

처음부터 정희준(채)의 철저히 계획된 사기 극에도 이 남자를 끝까지 믿으며 내일은 아니 2년후면, 5년, 10년후면 잘 살겠거니! 희망을 가지고 산 고통의 세월을 어김없이 파괴시키고는 이제는 너무도 철저히 딴 생활을 하고 있으니..
  가족이 임시 먹을 쌀 한 포대는 적어도 마련해 두고 돈을 가져 가 버렸다면 가족의 안위를 그나마 걱정하는 가장 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남자의 소행은 자신의 자식이 커가고 있는 가정이 굶어 죽던, 학업을 계속 시키던--가져가 버릴 땐 그런 것 안중에도 없는 미치광이었다. -만약 반대의 말이라도 던진다면 바로 폭력과 집기부수기로 대처했다.
 
 나와 아이들은 사는 동안 단 몇 일 뒤의 먹을 것을 예측할 수조차 없이 너무도 불안하고 궁핍한 생활로 일관하게 만들었다.
  11년의 동거로 참고 살아 온 결과는--이런 아내의 명예까지 도용해 신용불량자로 만들어 놓고 당장 내일 아침을 기약할 수 없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넣고는 백원한장 방다닥에 떨어뜨려 놓지  않으며  인간이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그 궁핍을 바라보며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아래--남편과 동거까지의 경위>
  1993년 8월경 정희준(채)암브로시오 만남-- ‘박 병규’라는 분이 중간에 개입--부부의 연을 맺게 적극적 도움. -- 지금‘박 병규’라는 분은(둘의 맺음을 위해)자신의 집이며 아내까지 소개시켜 주면서 남편의 주변인물에 대해 진정한 믿음을 주기 위해 본인 이득 없이 최선을 다해 주었었다.
  무엇보다 그 부인은 참한 이미지에 피아노 강사로서의 책임감과 진실성이 베어 나오는 사람으로 비춰더 진실된 주변인물들임을 인식하기에 도움을 주었다.
 이때 잠깐 남편이 근무하는 사무실에 10월, 11월 경리 일좀 맡아 달라고 해서 일하게 되었음.
그렇지만 월급 못 받았음. --이때 ‘박병규’분이 나타나서 자신의 일까지 팽개칠 정도로 적극적 도움. --이 분의 도움으로 동거까지 가게 되었음.
  동거 : 1994년 1월부터 시작 
  이때 정희준(채)는 인쇄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아주 작은 사무실 구석에 가서 같이 일을 했었음.▶
  그 사무실은 보증금 없는 월세 20만원에 책상 하나를 놓고 쓰고 있었다.그런데 이때 정희채는 사업을 한답시고 항상 돈에 허덕였고 그래서 돈은 가져다 줄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내 돈으로 생활을 꾸려 나가고 있었음. 또 그에게 돈을 빌려 주어야 하는 처지였었음. 이 때 이 남자는 전기세를 못 내어서 자주 전기가 끊기는 생활이 많을 정도로 자금 사정이 아주 안 좋았음.
  그렇지만 살고 있던 집이 자신의 집이라고 얘기했고 또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처럼 곧 경기가 풀릴 거라 믿고 그에게 돈을 빌려 주기를 계속함.-그런데 돌아오는 돈은 없고, 계속 들어가는 횟수가 점점 많아지다 보니 불안하기 시작함.
그런데 이때 정희준(채)는 여자 자체를 만날 형편이 아니었음. 밥 한끼를 사 먹지 못할 정도로 너무 굶어서 얼굴은 해골 그 자체였었고, 이미 완전 빈털터리 였음. --나에게 접근 그 자체가 너무도 의심스럽고 한심한-- 남자가 동거 한다고 손을 벌려 돈을 달라고 하다니 말도 안되는 짓을 했고, 동거 시작 했을 때 이미 20일 있다가 준다면서 돈을 빌려가서 나를 오도가도 못하게 만드는계획적인 행동을 했고, 그 이외에 내가 자취하던 집의 짐까지 내 허락없이 자신의 방으로 옮겨 놓게 되었으며, 자취금을 자신의 외종조카(박병규)에게 3부 이자로 놓으라고 해서 박병규에게 건네 주게 되었지 ---왜--이자받아 생활비로 써야 했으므로

나는 임신해서 아이 낳을 때까지 내 돈 다 털리고 정희준(채)에게 생활비 하나 못 타보고 정희준(채)는 산(産)일 3일전에 구치소로 사기죄로 들어가고 나는 내 돈 하나 없이 아이를 낳으러 병원 갔음.
이미 돈 다 털리고 수중에 돈 한푼 없던 상태였고, 살림집은 경매로 넘어 간 채고 남의집 마당에 짐을 쌓아두고 나는 한겨울 이집 저집 내겨울 옷 하나 못 걸치고 눈물밥을 얻어 먹으며 다녀야 했고,
산후 조리는 상상도 못했으며, 정희준(채)의 구치소 들어간 사건 때문에 법원으로, 사법서사로, 구치소로 추위에 떨면서 다니기란 산모의 몸으로 너무 지치고 힘든 일이었어. 더군다나 돈 하나 없이-- 버스 안에서 조차 서 있을 수 없었고, 아이를 안고 배고픈 그 시간에도 나는 그저 차가운 길바닥에라도 아무 곳이나 편히 누워 쉬고 싶었어
 
산모에겐 그시간 너무도 모진 시간 이었어.
그 딱한 사정을 듣고 ‘혜화동 성당’교우님들이 찾아 오셔서 불쌍하다고 밥도 사주셨고, 돈도 몇 만원씩 주고 가셨어. 그 돈 다 모으니 약 55만원 가까이 되었어.
그 돈 조차 나는 교통비에 쓴 것 말고는 어디에도 쓰지 않았어. --정희채가 구치소에서 나오면 같이 생활에 쓰려고
그런데 정희준(채)는 60일만에 구치소에서 나왔는데 --나오자 마자 그 돈 다 뺏어가서 날리고 들어왔어.
방을 얻어 갈 곳이 없어서 먼저 조카집에 살림세간없이 몸만 들어가서 방을 빌려 썼어. 약 2개월 --
그리고 박 근태 친구집에서도 약 3개월 방을 빌려서 있었는데 -위의 돈은 이미 정희채에게 다 털리고 아이 우유값도 없었어 더군다나 남의 집에 처박아 놓고 새벽 3시 정도에 언제나 술 취해 들어왔어--- 이 버릇 11년동안 언제나 똑 같았어 공휴일 국경일 일요일도 없이 한결같이 술집에 처박혀서 저린 몸으로 술주정을 하고 들어 올망정  그 돈 아까워서 집에 가져다 주지 못했어. 돈 벌어 올 생각 안하고 나보고 사업하게 돈 빌려 오라고 했어(언니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자신의 웨딩홀 친구 부인을 2~3억씩 빌려와서 그런 것도 한다고)

구치소행 이후 6개월만에 성북동 꼭대기에 있는 400에 12만원짜리 월세 방으로 갔었는데(현제들이 각각백만원씩 보태서 400이됨)

그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언제나 술집에 처박혀 있다가 새벽에 들어왔고 어디서 두들겨 맞고 들어오면 간난아이 우유조차 물리지 못하게 부업한 돈을 가져가서 두들겨 맞고 와서 진단비 쓰는데 다 쓰버려
둘째아이 임신한때에는 너무 굶었어.
둘째아이 출산할 때 방이 없어서 몇 년을 비워둔 혜화여고 맞은 편 무슨 종손의 낡은 집이 있었어. 그 곳으로 살로 들어 갔지 (문도 다 안닫히고 불도 안들어 오고 부엌도 없는 곳) --그런데 경선이 엄마라는 분이 너무 딱해 보였던 지 방을 2개월 빌려 주어서 그 곳에서 둘째 아이 낳았어

그런데 둘째아이 낳고도 산모를 처박아 두고 새벽 3시에 들어오는 것 변하지 않았어. 나는 출산하고 몸의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현기증과 벽이 울퉁불퉁하게 움직이게 보였고, 가끔은 천장에서 거꾸로 이상한 짐승들이 기어 다니는 것들이 보일 정도로 심각한 상태의 몸이었어 --그런데 정희채는 술에 취해 그 늦은 시간에 들어 왔는데 출산 약 4일째 되던날 그날 차려 놓고 간 밥을 한끼도 먹지 못했어.

그날의 몸 상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 였어. 그래서 새벽 3시에 들어오던 정희채에게 ‘왜 이제 들어오냐고 했어, 밥도 못먹고 있는데, 그런데 정희채의 태도는 밥상을 갖고 들어오더니 천장이며 벽이며 마구마구 밥그릇 국그릇 김치그릇 할것없이 다 집어 던졌고 안깨어진 그릇이 있었다면 다시 주워서 힘껏 집어던져 방안 어디하나 발디딜 틈이 없었지--이유인 즉 차려놓은 밥도 안먹은 주제에 무슨 얘기를 한다는 거야,
 전화기를 들었어 신고할까 하고 그랬더니 그 전화기 조차 뺏어서 박살을 냈어. 나는 새벽 5시를 기해서 그 방을 나올 수 밖에 없었어.

그후 위의 박병규에게 돈이나 받아서 끝내야 한다고 그 집으로 걸어서 걸어서 갔어 그 집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이때 박병규집에서 정희채에게 데려 가라고 연락을 못해서 ‘안토니오’--혜화성당--분에게 연락해서 겨우 정희채에게 연락이 닫게 되었던 날이었지.

이후 4년만에 정희체는 돈을 벌기 시작했는데 집에 가져오는 돈 철저히 차단하고 보험을 5개에게 7~8개씩 넣었어. 그리고 5살된 큰 아이 혜화 유치원에 넣었어. 집엔 먹을 것이 없고, 전기세 물세도 못내어 주인 할머니랑 얼굴붉히며 집안에 못있고 낮엔 도피생활로 놀이터에 가 있다가 저녁에야 들어오는 너무도 구차한 생활을 하게 해놓고.

그곳에서 다시 갈 곳 없어서 형님 집에 몸만 가 있다가 부천--다 짓지도 않은 오피스텔로 들어가게 되었지, 최근 (2004년 8월)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곳에 돈이 4500만원을 넣어 놓았다고 했어.
그런데 나에게 단 한번도 돈 있다는 표시 안했고, 그 돈을 뺏을 때도 철지히 돈 있다는 표시 숨기고 월세 보증금 없이 돈암동 꼭대기 방에 월세금 20만원만 내는 곳으로 옮겨 갔는데, 그 때도 유흥으로 흥청망청 쓰고 새벽 3시에 집에 들어왔어, 그 돈을 다 써버리너라 너무도 신이 났겠지 --그 새벽 안들어 오는 날 전화하면 여자가 받았어. 나는 아예 포기했어 철저히 유린한 돈 -그 집에서 20만원의 월세도 못내어서 그때 소송까지 걸려 있게 되었는데, 그짓 포기하지 않았고, 또 집에 가져다 주는 돈 없으면서
첫째아이 명동에 있는 계성 초등학교 사립 명문을 보냈어.
단 한번도 월급 같은 돈을 집에 가져다 준 적도 없었으면서 모든 일은 자신의 명예를 위함이었고 계성 학부모들을 만나 자신의 입지만을 높이기 위함이었어. 초등 1학년 아이가 그 곳까지 가기에는 너무 멀고 힘든 곳이었는데..
아니 집에는 먹을 것이 없었는데, 그동안 정희채는 가진 돈 다 탕진하고 이제 더 이상 그 집에서
소송이 걸렸으므로 살수 가 없었어. 그 때 나에게 ‘마이너스통장에“ 내 명의로 사인하라고했어
그러면 집한채를 내 앞으로 명의이전해 줄거라고 하면서--
 그렇지만 그에게 속은 9년의 세월이었기에 그것만은 절대 안된다고 했지 그에게 억지로 끌려가서 우리은행 ‘조만형’지점장이 보장한다는 말을 듣고 사인을 해 주게 되었는데 그 돈마저 정희채가 가지고 가서 다 날려 버리고 지금
한번 돈 쓰보지도 내 돈조차 챙겨 보지 도 못한 상태에서 신용 불량자로 만들어 놓고

그것도 모자라 보험금 7년동안 넣었던 것 다 가져가서는 집에 쌀 한포 사놓지 않았어.
다 털어 간 후론 욕설에 폭행 폭언 심지어 다른 남자에게 가서 돈 달라고 오라했고.,
서울역에 가면 3만원씩 몸값주는데 그곳에 가서 돈을 벌어 오라고 했어.
그렇게 싹쓸이 해 간 후 집에 단돈 백원짜리 하나 보태지 않았으며, 지금 3년 되었지 자신은 유흥에 산악회에 경조사에 각종 모임에 다 참석 다른여자 들이랑 주색 잡기 일주일에서 열흘씩 안들어 오면서 오만 여행 다 다니면서 집의 사람들의 먹을 것을 걱정은 고사하고 벌레 취급했고,

다 털어 가고 빚까지 씌우고 간 후의 그의 태도는 모든 돈은 자신의 돈이고 손 대면 절도죄고 고소한다고 했고 돈은 여기 저기 다 감춰 두고 지갑에는 단돈 2~3 천 원만 달랑 가지고 다녔고, 아이들 몇 천원 조차 주지 않았어.(현제 중요한 것들은 이미 여자 집에 다 옮겨다 놓았고, 영수증에는 고급호텔이다 고급음식점에다 돈 가지고 안한 짓이 없는데 집에 먹을 것 하나 싸 들고 들어오지 않았어.

그리고 이제와서 돈이 들어온 통장좀 보여 달라고 하니 절도죄로 고소한다고 했고, 그것 자신통장인데 너한테 왜 보여 주어야 하냐면서 밟아 터주어 죽인다고 했고,
너하고 상관없으니까 돈이랑 아예 상관도 말란다.
그러면서 돈이 들어오는 쪽 여자에게로 건네 간다. 몇 백만원씩
그런데

이렇게 다 털어가고 빚 투성이에 집에서 길어는 개만도 못한 생활을 하게 해놓고--정말 쓰야 할 곳에 돈을 한번 제대로 써 본 적이 없어 그런데 하는 말이 --너가 올 때 얼마만큼 돈을 가지고 왔느냐고 도로 묻고 있어 사람이 죽어 가는 상황에 처해 있었어도 단돈 만원 하나 빌려 오지 않았으면서,
산후조리한번 안한 몸인데 한겨울 방다닥에 불하나 안 넣어 주어서 이미 몸은 부작용으로 극한 상황에
이 남자의 행한 소행에 화병이 폐로 와서 숨조차 쉬기 힘드는 병이 악화되어 있는데

정희준(채)의 통장내역좀 보자고 하니 112로 신고해서 내가 자신을 구타했다고 하고 그 통장 안보여 주기 위해 ‘정신병원’에 처 넣는다고 오늘(2004/8/16)은 동사무소 또 다른기관 알아보러 이리저리 쫓아 다니고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또 얼마나 맞았던지 올 2004/2월을 계기로 112로 신고 하기 전에
정희준(채)의 행동은 모든 자신이 저질은 일 뒤에는 일언 반구도 하면 안되었고 어기면 모든 폭력이 통했었었다. -- 참는 것도 같이 사는 것도 한계점이 이르러 112로 신고 했더니.
그런데 이젠 자신이 도로 나를 폭행했다고(통장 보여달라고 한다고) 112로 신고해서 잡아 넣어라고 신고하고 그것도 안되니 ‘정신병원’을 알아보러 찾아 다닌다.

이 얼마나 천인 공로할 인간인가!--각 성당마다 주기도문을 팔아먹고 교우들의 수첩까지 만들어서 파는 주제에 이렇게 까지 인간 말살의 인간이 되어도 된다는 건지...
지금까지 어떻게 목숨을 유지해서 살아 왔는지 모른다. 너무 힘들어 자살 기도도 했었는데 그런때도
나를 팽개쳐 버리고 여행가서(물론 여자가 그때 있었어)일주일 후에 돌아오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죽던지 말던 지 상관 안했어.
나를 살린 것은 복지관 직원들과 동사무소 복지담당자 였어.
이런 천인 공로할 인간도
천하를 주름잡듯 자신이 벌었다고 자신만의 유흥에다 자신만의 배를 채우며
누비로 다니고 있답니다.--지면 관계상 아주 간단한 사건만 적은 것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 하고요,
이렇게 당하고 살아갈 자신이 없어 용기마저 다 잃고 희망마저 다 잃었습니다.
한 남자를 잘못 만나 길거리의 특수강도보다 더한 강도를 만나 한 여자의 인생이 뿌리채 뽑히어 버린 제 인생
어디가서 보상받고 어디가서 하소연 해야 할지 몰라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2004, 8, 16

정희준(암브로시오)의 호적상 처인 -헬레나입니다.(결혼식올리지 않은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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