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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홍) 2024년 5월 19일 (일)성령 강림 대축일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5분교리
미사의 재발견 (파견)

24 수유1동성당 [suyu1] 2008-03-22

 1. 영성체가 끝나면 사제는 영성체 후 기도를 바친다. 이어서 사제는 신자들을 축복하고서,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혹은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와 같은 말로 신자들을 파견한다.

이 파견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을 본받아 행해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활 중에 열 두 사도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견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고 병자를 고쳐주며 마귀를 쫓아내라고 분부하셨다(마태 10,5-9). 또한 부활 후에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당신의 사명을 이어가게 하셨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 미사를 마치면서 우리 역시 사제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의 파견 명령을 받아 세상에 나간다.

   2. 하느님은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선택하시어 풍성한 사랑으로 보살펴 주신다. 그분의 자애로운 보살핌은 말씀과 성사, 특히 성체성사를 통해서 그리고 신자들 간의 친교와 봉사를 통해서 지속된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만이 당신의 축복과 구원을 독점적으로 누리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선택하신 이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도 당신을 알게 되어 축복을 받고 구원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라신다. 이런 점은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면서 하신 말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2-3) 하느님은 세상에 당신 축복을 전해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축복하신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선택과 축복은 하느님의 구원의 도구가 되는 파견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미사의 마침 예식에서 사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신자들을 축복을 하고, 이어서 그들을 세상에로 파견하는 것이다.

    3.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을 당신의 도구요 일꾼으로 삼으셨듯이 우리들도 당신의 도구와 일꾼으로 쓰신다. 그분은 우리가 각자의 위치에서 당신의 지체가 되기를 원하신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손과 발을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손이 없지만 당신은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발이 없지만 당신은 가지고 있다. 당신의 눈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눈이 세상을 바라본다. 당신의 발로 그리스도는 좋은 일을 하러 나간다. 당신의 손으로 그리스도는 축복을 준다.”(성녀 대 데레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 몸의 지체인 우리는 그분을 대신하여 그분의 축복과 구원을 세상에 전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에 파견된 우리는 예리한 을 지녀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경제적인 풍요 속에서 정신적, 영적으로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 비록 겉으로는 번듯한 모습을 지니지만 속은 공허하고 병든 사람들이 많다. 이를 꿰뚫어보고 그들의 정신적인 허기와 헐벗음을 간파할 수 있는 예리한 눈을 지니면 좋겠다. 사마리아 어느 마을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의 영적인 갈증을 간파하신(요한 4,7-24) 예수님의 눈처럼 말이다.

    우리의 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당부하셨던 것처럼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입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 이웃에게 축복과 격려, 힘과 용기를 주는 희망의 말이 나와야 한다. 욕설과 저주, 절망의 언어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입에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야고 3,9-10)

    우리의 은 치유하는 손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손은 남을 비난하기 위해 손가락 질 하는 데에 사용되거나 혹은 복수를 위한 주먹으로 쓰여서는 안 된다. 사람을 낫게 하는 손이 되어야 한다. 사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치유해주는 예수님의 손(마르 8,23; 루카 13,13)을 닮아야 한다. 그래서 쓰러진 이를 일으켜주는 손, 우는 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손, 실망한 사람의 어깨를 토닥여 주는 손, 서로의 손을 맞잡게 해서 화해를 이룩하는 손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은 비록 낯선 곳이라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향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카파르나움에서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자 군중이 그분께 몰려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간청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마을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미련 없이 그 마을을 떠나셨다(루카 5,42-43). 우리 역시 편안하고 안락한 곳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다 해도 기쁜 소식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우리의 가슴은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채워져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잠시 휴식을 취하러 외딴 곳으로 피해가셨지만 곧 군중은 그분을 찾아 몰려들었다.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오히려 예수님은 이들을 목자 없는 양떼처럼 가엽게 여기시면서 많은 것을 가르쳐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셨다(마르 6,30-44). 극도의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귀찮을 정도로 많이 몰려든 사람들을 보살핀다는 것은 그 만큼 예수님의 가슴이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충만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우리의 가슴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의 는 하느님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 하느님께 귀를 열어 놓으셨다. 예수님은 아침 일찍 아직 제자들이 잠자고 있을 때나 밤늦게 홀로 기도하셨다(마르 1,35; 6,46; 루카 6,12) 바로 이렇게 성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예리한 눈, 복음을 전하는 입, 치유하는 손,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발,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채워진 가슴을 지니실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역시 항상 하느님께 귀를 열어 놓고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4.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은 그분의 이름으로 세상에 파견되었고, 따라서 힘자라는 데까지 그분의 손과 발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말과 행동이 비록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인해서 작고 보잘것없다고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단지 한 알의 작은 씨앗과 같다. 하지만 그 씨앗이 좋은 땅에 떨어지면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마르 4,8). 어떤 신부님의 경험담을 소개한다.

“얼마 전 낯선 발신자의 이름이 적힌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혹시 스팸이 아닐까싶어 잠깐 망설이긴 했습니다만, ‘17년 전의 인연을 기억하며’라고 적힌 제목을 보고선 도저히 안 열어 볼 수가 없었습니다. ‘17년 전...?’ 얼른 계산해보니 일반대학에 적을 두고 있던 때였습니다. 메일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저를 신부님도 아닌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17년 전의 한 제자가 보낸 메일이었습니다. ‘...제 인생에 첫 씨앗을 뿌려주셨던 분, 선생님을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로 시작된 메일은 무척 뜻밖의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반 아이들의 일기를 다 검사하고 난 다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중에 00이는 훌륭한 시인이 될 거라는 한마디의 제 칭찬이 씨앗이 되어 자신은 시인의 꿈을 키워왔고 몇 년 전 어엿하게 등단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죠. 그제야 저는 대학 시절 서울의 어느 초등학교에 교생실습을 나갔던 때가 어렴풋이 기억이 났습니다...세상에, 거의 20년 전의 기억조차 나지 않는 작은 칭찬 하나가 그것도 약 한달 간의 교생실습 중에 잠깐 만났던 인연의 끈이 이렇게도 한 매듭을 지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무척이나 놀랍고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렵기까지 했습니다.”(생활성서별책부록 <소금항아리>, 2006년 8월호에서)

 

 교생실습을 나갔던 대학생의 칭찬 한 마디가 초등학생의 마음속에 작은 씨앗처럼 뿌려졌고 그 씨앗은 17년이 지나서 결실을 맺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미속하다고 해서 결코 실망할 이유는 없다. 눈에 보일 듯 말듯 할 정도로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나고(마르 4,30-32), 소량의 누룩이 많은 양의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루카 13,20-21)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 말과 행동은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물론 언제, 어떤 결실을 맺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달려있다. 그분은 영원을 보시기 때문에 당신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결실을 내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과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파견된 자로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면 된다.

 

  5. 미사가 끝날 때 사제의 파견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나의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였듯이 이제 너희를 세상에 파견한다. 세상에 나가 나의 증인이 되어라.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4).”

 

- 생활성서, 2007년 4월 호에 게재, 글. 손희송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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