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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0년 2월 24일 (월)연중 제7주간 월요일주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신부님강론
연중 26주일 (가해)

197 양권식 [ysimeon] 2008-09-27

연중 26주일 (가해)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연중 26주일입니다. 오늘 교회 전례는 겸손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점검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이 전개되는 상황은 예수님 공생활의 마지막 부분이랄 수 있는 성전에서의 설교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오르시어 성전을 정화하시는 의미에서 장사꾼들을 채찍으로 쫓아내셨습니다. 이와 함께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는 심화되고 이들이 예수님의 언행에서 예수님을 체포하여 죽일 빌미를 찾고 있는 과정에서 비롯된 세 가지 비유로 된 설교 말씀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즉 두 아들의 이야기,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하늘나라의 잔치의 초대에 관한 이야기가 이와 같은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반대 세력인 유다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행하여집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던 청중 속에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도 분명히 끼여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네들 앞에서 똑똑하고 율법을 잘 아는 지도자들보다, 죄인으로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당시 유대 사람들 특히 지도자들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이며, 또한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을 보장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죄인들 특히 세리와 창녀는 하느님의 율법을 어기었기에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유다 지도자들은 세리와 창녀들은 성전에 들어올 수 없도록 규정하였으며 그네들과 길가에서 만나기만 하여도 부정한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통념을 깨고 예수님은 이네들과 함께 어울리고, 더욱이 성전에서의 설교에서 율법을 준수한 이들보다 먼저 이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예수님은 미치거나 아니면 제거되어야 할 인물로 받아 드려졌을 것입니다. 그에 앞서 자존심 강한 유다 지도자들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수치이며 욕설로 받아 드려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교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반대 받는 표적으로서의 말씀을 하셨을까? 도대체 무슨 말씀이 실까를 새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당시 세리와 창녀들은 죄인들의 대명사이기도 하였지만 또 한편 천대와 질시를 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대표하는 것으로도 여겨졌던 것입니다. 율법을 기준으로 해서 보면 이네들은 분명 율법도 지키지 않으며 나아가 민족적 자존심과 정결을 거스른 죄인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따라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천대를 받으면서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나는 죄인이니 가까이 오지 마시오.’ 라고 외치며 살아야 하는 이들의 삶의 뒤안길에는 통한의 눈물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주홍 글씨의 낙인을 몸에 담고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참회와 속죄의 뉘우침이 언제나 그네들의 삶에 전제되어 있었기에, 회개를 촉구하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과 예수님의 설교에 맨 먼저 몸을 씻을 수 있었던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에 대한 전문가임을 자부하면서 율법을 형식적으로 준수하였을망정, 율법의 내용이라 할 수 있는 회개와 쇄신의 삶은 등한시하였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을 단죄하고 죄의식을 심어 주었으며,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더욱 심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회개하라고 외치는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의 설교에 반항하고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예언자들의 전통에 따라, 독선적인 자들의 비위를 맞추는 표현을 하시지 않고, 그들의 거짓됨을 매우 직설적으로 나무라고 계십니다. “사실 요한이 너희를 찾아와서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줄 때에 너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았고 그를 믿지 않았다.”
형제자매 여러분! 겸손이란 단어는 라틴어로 흙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흙의 모습에서 참으로 겸손 됨의 의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흙은 모든 더러운 것을 다 받아 드리고 정화합니다. 모든 것을 받아 드리고 추한 것을 삭혀 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명을 움터 내 열매를 맺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흙을 통해서 겸손의 참된 의미와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리와 창녀가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은 세리의 불의와 창녀의 죄를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겸손 된 마음이 구원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어긋나지 않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를 깨닫고 참회하고 뉘우치는 겸손한 마음, 하느님 앞에 무릎 꿇어 자비를 간구하는 흙과 같은 겸손한 마음이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흙 없이 생명이 돋아날 수 없듯이 겸손한 마음 없이 우리의 삶은 열매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흙에서 새 생명이 돋아나듯이 겸손 된 자만이 새로운 삶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끝없는 경쟁의 현실에서 겸손의 덕을 실천한다는 것은 패배자가 되거나, 그 패배를 감추려는 태도로 오해 받을 수 있지만, 겸손함을 잊어버리게 되면 우리는 남의 흉내를 내거나 진실을 외면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함 없이 우리는 하느님 앞에 마주설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스스로를 외면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현대의 문명의 이기 중에 전기는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줍니다. 우리는 이 전기로 말미암아 밤에도 전등을 켜고 낮처럼 일을 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늘 불을 켜고 생활함으로써 밤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밤의 어두움은 우리의 피곤함을 쉬게 해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혀 주고, 하루를 정돈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러나 밤에도 전등을 켜고 낮처럼 살 수 있게 된 대가로, 밤을 잊어버림으로써 우리는 어둠이 해 주던 역할까지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현대인은 지나친 피곤함, 정신질환, 산만함과 같은 치명적인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픔이 가시지 않는, 애 쓰고 살아도 행복하지 못한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열매 맺지 못하는 현실을 사는 우리가 다시 겸손한 삶을 자세를 묵상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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