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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자) 2025년 12월 19일 (금)12월 19일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다.
가톨릭 성인/축일
    성 아나스타시오 1세 (Anastasius I)
    같은이름 아나스따시오 , 아나스따시우스 , 아나스타시우스
    축일 12월 19일
    신분 교황
    활동연도 +401년

       성 아나스타시우스(또는 아나스타시오)는 막시무스(Maximus)의 아들로 로마(Roma)에서 태어났다는 것 외에 출생 연도나 교황이 되기 전의 활동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399년 11월 27일 성 시리치오(Siricius, 11월 26일)에 이어 교황좌에 올랐다. 그가 즉위할 무렵 교회는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주장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이 어떠한 관련성을 맺는가 하는 것이 논쟁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지도자였던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년)의 사상에서 유래했는데, 오리게네스는 삼위(三位)를 종속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오리게네스가 성경을 우의적 방법으로 주해한 데 반해, 성 예로니모(Hieronymus, 9월 30일)는 이를 배척하고 성경의 자의적 의미를 중시했다. 성 예로니모가 베들레헴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을 때 예루살렘 근교 수도원의 원장인 루피누스(Rufinus)와 예루살렘의 주교인 요한(Joannes)이 오리게네스 이단을 전파한다고 비판하였다. 이런 대립 후에 로마로 돌아온 루피누스가 오리게네스의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성 예로니모와의 분쟁이 재현되었다.

       성 아나스타시오 1세가 교황으로 즉위한 직후 로마 출신의 성녀 마르첼라(Marcella, 1월 31일)는 동료들과 함께 교황에게 가서 루피누스가 오리게네스의 저작들에 내포된 이단적 요소들을 전파한다고 고발하면서 루피누스가 직접 작성한 번역본을 증거로 제시하였다. 결국 교황 성 아나스타시오 1세는 성 예로니모와 놀라(Nola)의 성 바울리노(Paulinus, 6월 22일)와 함께 루피누스를 단죄하였다. 그는 또한 북아프리카에 만연한 도나투스파(Donatism)의 이단적 교리를 배격하고자 노력했다. 401년 카르타고(Carthago) 교회 회의 직후 카르타고의 주교들에게 편지를 보내 도나투스주의를 물리칠 것을 촉구하였다.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성 아나스타시오 1세 교황은 “주교들은 복음서 낭독 때 계속 서 있어야 한다”라는 규정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401년 12월 19일 선종하여 포르투엔시스 가도(Via Portuensis)에 있는 폰티아누스 카타콤바에 묻혔다.

       이단자들에 대해 엄격하게 대처했던 교황 성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축일은 “예로니모 순교록”(Martyrologium Hieronymianum)과 옛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 4월 27일 목록에 수록되었는데, 옛 “로마 순교록”은 교황 성 아나스타시우스가 가난 속에서도 가장 부유한 마음과 사도적 열정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고, 성 예로니모에 따르면 교황 재위 2년 만에 선종함으로써 로마가 고귀한 교황을 오래 볼 수 없었던 것을 안타까워하며 그의 재임 중에 로마가 황폐해지는 것을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존경심을 표현했다. 실제 그가 선종한 직후 고트족의 이탈리아 침략이 시작되어 410년 로마가 함락되고 약탈당하는 일이 있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그의 축일을 선종한 날인 12월 19일로 옮겨 가난을 실천하며 사도적 관심으로 이단 교리에 확고히 반대한 성 아나스타시오 1세 교황이 로마의 포르투엔시스 가도에 있는 폰티아누스 지하 묘지에 묻혔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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