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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가밀로 데 렐리스 (Camillus de Lellis)
    같은이름 가밀루스 , 까밀로 , 까밀루스 , 카밀 , 카밀로 , 카밀루스
    축일 7월 14일
    신분 신부 , 설립자
    활동연도 1550-1614년

       성 카밀루스 데 렐리스(또는 가밀로 데 렐리스)는 1550년 5월 25일 이탈리아 남부를 지배하던 나폴리 왕국의 부키아니코(Bucchianico, 오늘날 아브루초[Abruzzo]에 속한 곳)에서 태어났다. 거의 50세에 그를 낳은 어머니 카밀라 콤펠리 데 라우레토(Camilla Compelli de Laureto)는 156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는 나폴리와 프랑스 왕실 군대의 장교로 복무하며 거의 집에 있을 때가 없었다. 청소년 시절부터 노름을 좋아하고 군대를 동경하던 그는 입대하고자 했으나 오른쪽 발에 궤양이 생겨 연기하였다. 1571년 로마의 산 지아코모 병원(San Giacomo Hospital)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병원에서 조수로 일하던 중 노름을 하다 쫓겨났다. 다시 군에 입대해 베네치아(Venezia) 군대에 소속되어 이탈리아를 침략한 터키군과 여러 전투에서 맞서 싸웠다. 1574년경에는 청소년 때부터 습관이 된 도박에 빠져 빈털터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군대에서도 나와 이곳저곳을 방황하다가 우연히 아풀리아(Apulia)의 만프레도니아(Manfredonia)에 있는 카푸친 수도원의 공사장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어느 날 한 수사의 설교를 듣고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그는 수도자가 되고자 수도회에 지원하였다. 하지만 거친 수도복에 발이 쓸려 예전의 상처가 도져 수련소에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치료를 위해 다시 로마의 산 지아코모 병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병을 치료하며 조수 일을 맡았다. 1579년 다시 카푸친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상처가 덧나면서 결국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병으로 일생 고생해야만 했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성 카밀루스 데 렐리스는 자신을 성화하는 방법으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투신하기로 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면서 그는 병원의 회계를 담당하는 최고 관리자까지 되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그는 병원의 놀라운 상황과 여러 부정적인 문제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남은 인생을 바칠 결심을 하고 뜻있는 간호사들과 함께 테베레(Tevere) 강변의 한 빈민촌에 공동체를 이룬 후 가난한 병자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정성껏 돌보았다. 그는 자신의 고해신부이던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5월 26일)의 권고를 받아들여 사제가 되기 위해 로마의 예수회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1584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이미 함께 봉사하던 이들과 협조자를 모아 ‘병자 간호 성직 수도회’(Clerici regulares infirmis ministrantes)를 창설했다. 초대 총장이 된 그는 병든 이들의 상처뿐만 아니라 영적인 돌봄에도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1586년 교황 식스투스 5세(Sixtus V)로부터 수도회 회칙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 성 카밀루스와 동료 사제와 수사들은 우선 로마의 주요 병원을 방문하여 환자들의 영육의 건강을 돌보는 데 집중했고, 이어서 1588년 나폴리, 1594년에는 밀라노(Milano)의 병원에도 진출하여 환자를 돌보았다. 그러면서 보통 카밀로회(Ordo Sancti Camilli, O.S.C.)로 더 잘 알려진 그의 수도회는 청빈 · 정결 · 순명의 서원 외에 제4의 서원으로 ‘환자에 대한 정성 어린 간호’를 추가했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페스트가 유행했었다. 성 카밀루스 데 렐리스와 동료들은 로마 항구의 배들을 통해 전염된 페스트 환자들에게 큰 관심을 기울이고 치료하는 데 열중했다. 무엇보다 병원의 청결을 중요하게 생각한 그는 항상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환자들이 적당한 음식을 먹도록 하고, 전염병일 경우는 적절히 격리하는 방법 등을 활용해 병자들의 치료에 도움을 주었다. 그와 동료들은 항상 숨을 거두는 환자들 곁을 끝까지 지켰고, 임종자들의 장례 등에도 큰 관심을 보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높은 칭송을 받았다. 그들의 헌신적인 간호와 환자들과의 인격적 만남에 감동한 사람들이 ‘성 카밀루스의 품에서 죽으면 지옥은 안 간다’라고 그에게 존경과 애정을 표현했고, 그를 ‘로마의 성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성 카밀루스 데 렐리스는 건강이 점차 나빠지면서 더는 총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1067년에 사임하였다. 그 무렵 수도회는 이탈리아 전역뿐만 아니라 헝가리까지 확장되어 나갔다. 사임 후에도 수도회와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던 그는 신임 총장을 동반해서 이탈리아 여러 곳의 병원에서 활동하는 수도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면서 병에 걸려 건강이 나빠진 그는 마지막을 로마에서 맞이하고 싶다는 소망대로 로마로 돌아와서 1614년 7월 14일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로마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성당 제대에 안치되었다. 그는 1742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이어 1746년 같은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었다. 1886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천주의 성 요한(Joannes, 3월 8일)과 함께 모든 병자와 병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고, 1930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모든 간호사와 간호 단체의 수호성인으로 확대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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