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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조선대목구 설정 180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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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9-03 ㅣ No.453

조선대목구 설정 180돌 (상) "조선 선교사로 제가 가겠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조선대목구 설정 소칙서.

 

 

오는 9일로 조선대목구 설정 180주년을 맞는다. 한국천주교회의 '뿌리'가 된 조선대목구는 이제 19개 교구(침묵의 교회인 덕원자치수도원구, 함흥ㆍ평양교구 포함)에 이르는 '가지'로 자라나 뻗어간다. 더불어 조선대목구가 서울ㆍ대구대목구로 분리된 지도 꼭 100년으로, 그 시점은 1911년 4월 8일이었다.

 

침묵의 교회를 제외한 한국교회 16개 교구 신자 수는 2010년 말 현재 520만 5589명이며 복음화율은 10.1%다. 성장엔 명암이 있다. 주일미사 참례자 수는 141만여 명으로 27.2%에 그치고 있고, 신자증가율도 전년도에 비해 1.7%(14만 644명)대로 떨어졌다. 하지만 어려울수록 첫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초심은 조선대목구 설정 당시 오간 서한과 교황 소칙서 등에 그대로 담겨 있다. 이에 이 같은 문건을 중심으로 조선대목구 설정 당시 상황을 살펴 거울로 삼는다.

 

 

1831년 9월 9일 소칙서 반포

 

#1. 1831년 9월 9일, 로마 성모 마리아 대성전(Santa Maria Maggiore). 사도좌에 착좌한 지 7개월째인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재위 1831~1846)는 조선교회의 이정표와도 같은 두 소칙서를 반포한다. 하나는 조선대목구 설정을 명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시암대목구 부주교였던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대목구장 주교에 임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중국 베이징교구에서 완전히 독립된 대목구를 조선 왕국에 설치하며 이 조치는 현재와 미래 모두에 결정적이고 유효하며 효과적인 것으로 전적인 효력을 발생한다는 내용이었다. 1784년 이벽(요한 세례자)ㆍ이승훈(베드로) 등 주도로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생겨난 지 47년 만이었다. 이로써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한국교회에서 잊을 수 없는 교황이 됐다.

 

어부 성 베드로(마태 4,18-19; 마르 1,16-17)의 후계자임을 상징하는 어부의 반지를 찍은 짧고 단순한 편지 형식 소칙서를 통해 교황은 "보편교회의 통일성에서 중심이 되는 사도좌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살고 있는 양들을 특별히 더 부지런히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는 마땅히 그러해야 하듯이 양들을 찾아내 사도적 보살핌으로 진리의 양 우리 안에 들어가게 하고 영원한 목자께서 재림하실 때 천상 목장으로 불러 성공적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고 조선대목구 설정 취지를 강조했다.

 

유진길 등 조선대목구 신자들이 1624년(혹은 1825년) 말 교황 비오 12세에게 보낸 선교사 파견 청원 서한. 원본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고, 사본만 남아 있다. 사진제공=(재)한국교회사연구소.

 

 

교황청에 선교사 파견 청원

 

#2. 이에 앞서 4년 전인 1827년. 교황청 포교성성에 몇 통의 서한이 도착한다. 훗날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에 오르는 포교성성 장관 바르톨로메오 알베르토 카펠라리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였다.

 

서한은 유진길(아우구스티노) 등이 1824년 말(혹은 1825년 말) 교황청에 보낸 것으로, 마카오 포교성성 대표부를 통해 로마에 전달됐다. 마카오 대표부 책임자였던 움피에레스 신부는 1826년 11월 이 서한에 조선교회를 베이징교구에서 독립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덧붙여 로마로 보냈다.

 

유진길 등이 보냈지만 서한 분실될 경우 신원이 드러날까봐 이름을 가명으으로 쓰기로 하고 '조선교회의 암브로시오와 그 동료들'이라는 이름으로 작성된 서한의 내용은 1811년 교황 비오 7세에게 보낸 신미년 서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조선에 선교사들을 파견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달라고 청원하고 △ 선교사들의 입국 방법에 관해서는 유럽 선박을 이용하되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사절단과 동행할 것을 요청했다. 또 서한 후기엔 주의사항을 붙여 선교사들이 입국 시 준비할 배의 운용 방법과 당시 조선의 국내 정세 등을 적었다.

 

1824년 역관 자격으로 사신 행차에 동행한 유진길이 베이징교구를 거쳐 교황청에 보낸 서한은 보잘것없는 한문본 서한 한 통일 뿐이었다. 그러기에 아무도 이 서한이 조선대목구 설정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선교회의 안정적 사목을 위한 방책을 세워달라는 조선교회의 요청은 교황청 내에서 조선을 더 이상 베이징교구에 맡겨놓아 둘 수만은 없다는 공감대를 갖게 했다. 조선에 주문모 신부를 파견한 전임 베이징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재치권도 교황청이 구베아 주교 개인에게 부여한 권한이었기에 구베아 주교 선종과 함께 그 권한도 소멸한 상황이었다. 그러기에 조선교회 신자들이 교황께 보내는 서한을 라틴어로 번역한 움피에레스 신부는 조선교회를 위해 다른 수도회 내지 선교회에 맡길 것을 제안했다.

 

 

조선 선교 맡을 수도회 물색

 

#3. 유진길의 서한을 받은 카펠라리 추기경은 조선 선교를 단독으로 맡을 수도회를 물색한다. 먼저 1827년 9월 예수회와 교섭을 벌였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어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장상인 랑글로와 신부에 서한을 보내 선교 의향을 타진했지만, 그도 인원 부족과 비용 문제, 입국 정보 미비, 회원들 동의문제 등을 들어 부정적 의견을 보냈다. 다만 랑글로와 신부는 1828년 초 아시아에서 활동하는 회원들에게 포교성성의 제안을 알리고 의견을 묻는 공동서한을 보내 겉으로 드러낸 부정적 입장과 달리 다소 유보적 입장을 취한다.

 

그렇다고 해도 파리외방전교회는 당시 선뜻 새로운 선교지를 맡을 입장이 아니었다. 각 대목구마다 활동하는 선교사 수가 제한돼 있을 뿐 아니라 박해 탓에 애써 건설한 공동체마저 와해되는 상황이었다. 주교들이나 장상들, 회원들도 부정적 의견이 대세였다.

 

조선교회로서는 실낱같은 희망도 끊길 위기였다. 그런데 그 때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본부에 서한 한 통이 도착했다. 시암(현 타이)대목구 방콕 신학교에서 브뤼기에르 신부가 보낸 것이었다. 1829년 5월 19일자 편지로, 포교성성과 파리외방전교회 간 교섭이 중단된 지 1년이 넘은 1830년 무렵이었다. 이 편지가 꺼져가던 조선 선교의 촛불을 되살렸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문장.

 

 

브뤼기에르 신부, 선교 자청

 

#4. 브뤼기에르 신부는 이 서한을 통해 랑글로와 신부가 카펠라리 추기경에게 보낸 답변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자신이라도 조선 선교사로 자원하겠다고 밝혔다. 편지를 보낸 직후 갑사(Capsa) 명의 주교에 임명된 것과 동시에 시암대목구 부주교에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후에도 세 차례나 포교성성에 편지를 보내 조선 선교사로 가겠다는 자신의 의사를 거듭 전달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연보」 제25호(1831/7)에 실려 있는 이 서한은 183년이 지난 오늘날에 읽어도 여전히 뜨거운 감동을 준다.

 

"일찍이 우리 신학교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서 무엇을 거부한 적이 있었습니까?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였던 시기에 우리가 맡고 있던 선교지들 가운데 하나라도 포기한 적이 있었습니까? 의심할 바 없이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 도움을 간청하였습니다. 우리는 착한 사람들을 악에서 구해내시는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우리의 기대는 어긋난 적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선교지들을 도와주려고 기적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우리 하느님의 힘이 약해지셨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신앙과 확신이 줄어들었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 기금이 없다는 변명엔 주님께서 새로운 재원을 마련해 주실 것이고 △ 선교사가 없다는 변명엔 신학교에 있는 모든 젊은 신학생들의 애덕과 열성에 간절히 호소하면 될 것이며 △ 다른 선교지에도 부족한 것들이 많다는 변명엔 저 불쌍한 조선 사람들의 경우만큼 절박하지 않고 △ 입국이 힘들다는 변명엔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여러 해 동안 성직을 수행하다가 영광스러운 순교로 과업을 완수했는데 유럽인 신부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이냐고 반문했다.

 

끝으로 △ 너무 많은 것을 움켜쥐려고 하면 제대로 잡지 못한다는 변명엔 "저는 우리 파리외방전교회가 아직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또 잘 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평화신문, 2011년 9월 4일, 오세택 기자]

 

 

조선대목구 설정 180돌 (하) 찬란한 복음의 빛이 조선으로 향하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저희는 내일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제 앞에는 온갖 어려움과 장애와 위험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저는 머리를 숙이고 이 미로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조선인 새 신자들을 보살펴라"

 

#1. "제가 가겠습니다." 청원은 계속됐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이어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으로도 편지를 보내 조선 선교사로 가겠다는 의지를 거듭 표명했다. 시암대목구장 플로랑 주교도 이에 동의하는 서한을 포교성성에 보냈다. 1829년 한 해 동안 여러 통의 서한이 파리에, 바티칸에 도착했다.

 

청원이 받아들여진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831년 7월이었다. 이에 앞서 포교성성 장관이던 바르톨로메오 카펠라리 추기경이 그해 2월 교황에 선출됐다. 그레고리오 16세다. 교황은 자신이 장관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관여한 조선교회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고자 했다. 포교성성은 그해 7월 브뤼기에르 주교 청원을 허락하며 조선대목구 설정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들어갈 수 있을 때 허락한다고 밝힌다. 두 달 뒤인 9월 9일에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한다는 소칙서를 반포한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임명 소칙서에는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성좌의 지극한 관심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2년 11월에 쓴 첫 번째 사목서한.

 

 

"그러므로 존경하는 형제여! 소조폴리스의 주교인 시암대목구장 부주교인 귀하께서 조선인의 나라로 들어가 조선인 새 신자들을 보살필 책임을 맡도록 허락해 달라고 겸손하게 청원했을 때, 본인은 조선 그리스도인들의 절박한 사정을 심사숙고하고, 덧붙여 시암대목구장이 자신의 부대목으로 선출할 다른 알맞은 신부를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는 이유를 참작하고, 로마교회 추기경들과 의논하여 귀하의 간청을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아무런 장애가 없다면 귀하가 새로운 선교지로 떠나 그 선교지에서 참으로 순조롭고 성공적인 출발을 이끌어 나가도록 허락합니다."

 

#2. 조선교회가 보편교회의 새 일원이 된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시작이었다.

 

특히 포르투갈의 보호권(padroado) 문제가 불거졌다. 교황청과 조약을 맺고 중국을 포함해 동아시아 선교 보호권을 행사하던 포르투갈 주교나 신부들은 교황청 직속 대목구를 증설하려는 선교지역 재편에 반대했다. 포르투갈은 선교지 보호 의무는 이행치 않으면서 주교 임명권이나 십일조 수취권만을 주장한 것이다. 조선대목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 또한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무관심으로 어려움에 처한다. 대표적 경우가 난징교구장 겸 베이징교구장 서리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와의 갈등이었다. 페레이라 주교는 조선대목구 설정을 반기고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대목구장 취임을 인정하면서도 조선 입국을 돕기보다는 그저 방관하는 자세를 보였다. 1834년 초 조선에 입국한 두 번째 중국인 사제인 여항덕(파치피코) 신부도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들과 갈등을 빚어 모방 신부는 1836년 조선대목구장 직무대행자의 권한으로 여 신부에게 성무집행 정지를 내릴 정도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8월 마카오로 가 조선 입국을 준비한다. 페낭신학교 재학 중 병으로 학교를 그만둔 왕요셉이라는 중국인 청년과 함께였다. 마카오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들에게 서한을 보내 오해를 푼 브뤼기에르 주교는 다시 포교성성에도 서한을 보내 조선 선교지를 다시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토록 청원함으로써 1833년 9월엔 드디어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지를 자신들의 관할지역으로 받아들인다.

 

 

조선 교우들에게 사목서한 보내

 

#3.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여러분의 소원이 이뤄졌습니다. 왜냐하면 교황님께서 여러분이 서한을 통해 청한 유럽인 주교를 어떤 중국인과 함께 파견하셨기 때문입니다. 조선에 있는 양들에게 목자가 없다는 소식이 여러분들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 우리는 조국을 떠나 다른 대목구를 맡고 있었으나, 교황님께 서한을 올려 빵을 청하는 이들에게 그것을 쪼개어 나누어줄 사명을 지닌 주교들과 사제들을 파견해 줄 것을 줄곧 청해왔습니다.… 조선 왕국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우리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 삶을 바칠 것입니다."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 소장 한국관계 문서철 제578권에 전해지는 사목서한은 오늘날에 읽어도 가슴을 뜨겁게 한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11월 마카오에서 조선 교우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날마다 기도 중에 조선 교우들을 복되신 동정녀와 모든 천사들의 보호에 맡긴다.

 

그리고서 1832년 12월 마카오를 떠난 브뤼기에르 주교는 푸젠(福建)대목구를 거쳐 난징(南京)교구에 다다른다. 여기에서 미리 베이징에 보낸 왕요셉을 통해 브뤼기에르 주교는 페레이라 주교 혹은 그 대리인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를 받는다. 이 편지에서 자신의 임명 소식에 대해 조선 신자들이 보인 환희에 찬 반응을 본 브뤼기에르 주교는 다시 난징을 출발, 한 달간의 긴 여행 끝에 대륙을 종단해 베이징 인근 교우촌에 도착했다. 그 사이 피로와 더위, 부족한 음식, 질병, 박해 위협 등으로 갖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어 3주 가량 휴식을 취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페레이라 주교의 권유에 따라 산시(山西)대목구 타이위안으로 가서 1년간 머무르다가 1834년 10월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들의 활동근거지였던 허베이성 시완쯔(西灣子)로 거처를 옮긴다.

 

 

1931년 한국으로 유해 모셔와

 

#4. 조선 입국은 갈수록 늦춰졌다. 남이관(세바스티아노) 등은 1834년 가을에 작성한 서한을 통해 조선 사정이 좋지 않아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서양인들은 겉모습이나 말이 판이하게 달라 당국에 발각되기 쉽다는 이유에서였다.

 

2008년 4월 브뤼기에르 선종지 마치아쯔에 들러 브뤼기에르 주교 묘비 앞에서 기도를 바치는 서울 개포동본당 순례단. 평화신문 자료사진.

 

 

이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월 왕요셉을 베이징으로 보내 동지사 일행에 끼어 청나라에 들어온 조선교회 밀사들을 설득한다. 그 친서는 오늘날에도 전해진다. "여러분의 결정이 어떠하든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서 위임받은 선교 임무를 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1835년 음력 11월 중에 조선 국경으로 가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문을 두드릴 것이고, 교우 여러분이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보내주신 주교를 받아들일 만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 수천 명 교우 중에 한 명쯤은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이에 조선 교우들은 그해 1월 20일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연말에는 반드시 조선으로 맞아들이겠다고 약속한다.

 

실로 오랜 만에 조선으로 밀입국할 가능성이 보였다. 게다가 브뤼기에르 주교가 그해 5월 랴오뚱에 파견했던 중국인 전교회장이 비엔먼 근처 민가를 빌려놓고 10월에 시완쯔로 돌아와 조선 입국에 빛이 비쳤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압록강에서 북쪽으로 47㎞(120리) 정도 떨어진 비엔먼 근처 민가에서 숨어지내다가 조선 교우들을 만나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널 작정이었다.

 

그해 10월 안내인들과 함께 시완쯔를 떠나 비엔먼으로 향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네이멍구 마치아쯔(馬架子)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랴오뚱으로 떠날 준비를 하며 보름 가량 머무르려 했다.

 

하지만 그곳까지였다. 1835년 10월 19일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진 브뤼기에르 주교는 회복하지 못한 채 이튿날 불과 43살 나이로 하느님 품에 안긴다. 그 심경은 마카오에 있는 동료 선교사에게 보낸 브뤼기에르 주교의 마지막 편지(1835년 10월 6일자)에 담겨 있다. "저희는 내일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앞으로가 제 여행 중 가장 험난한 여정입니다. 제 앞에는 온갖 어려움과 장애와 위험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저는 머리를 숙이고 이 미로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해 11월 21일 마치아쯔에 묻혔고, 19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한국으로 유해가 모셔져 서울 용산 성직자묘역에 안장됐다. [평화신문, 2011년 9월 11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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