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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성인모시기와 성인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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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9-21 ㅣ No.547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성인모시기와 성인되기


“성인이 났다.” 1984년 한국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식이 있은 직후 파리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하는 시성감사미사가 있었다. 첫영성체를 한 지 2년밖에 안 된 나는 그날 무척이나 흥분했었다. 과거 속의 사람이 눈앞에서 성인이 됨을 확인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들떠 있었는지 그 농담 잘 하는 스페인어 교수가 “너도 공부를 열심히 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라고 한마디 던졌다.

동양과 서양의 성인개념은 매우 다르다. 동양에서는 성인이 존경받는 사람, 완벽한 인격을 갖춘 사람을 말하고, 서양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드러낸 사람을 말한다. 더욱이 동양의 성인 개념은 고대지향적이다. 그러므로 당대의 인물이 종교의식을 통해 성인으로 선언된다는 시복시성은 한국사회에서는 낯선 개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이라고 할 때 성인을 그냥 훌륭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한다. 이렇듯 시복시성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부르던 성인이란 칭호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게 하는 기회이다. 따라서 현재 한국가톨릭 교회가 추진하고 있는 시복시성운동은 우리 사회에 또 하나 커다란 선교 선언이 될 수 있다.

처음 창립되면서부터 박해로 점철한 한국교회는 순교자에 대한 현양으로 이어져 왔다. 그리하여 교회는 초기부터 순교자들을 기록하는데 주력했다. 기해 및 병오순교자 기록은 시복시성을 위해 1847년 로마에 제출되었다. 이 명단에 대해 예부성성은 박해로 인해 한국교회에 정규적인 사건을 조사할 수 없고 또 첨부된 문헌이 순교자 선정에 상당히 엄밀하므로 정규적 절차를 면제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857년 9월 23일 교황 비오 9세는 한국교회의 시복조사를 접수하는 법령을 반포했다. 이로써 한국교회에 처음으로 82명의 가경자가 탄생했다. 조선 순교자의 첫 시복식은 1925년 7월 5일 로마 성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됐다. 교황 비오 11세의 칙령으로 기해·병오박해의 가경자 중 3명이 탈락하고 79위가 복자품에 올랐다. 교황은 조선이 가톨릭교회의 순교역사에 실리게 된 것을 기뻐했다. 시복식 참석을 위해 로마에 머물던 뮈텔 주교, 드망즈 주교, 사우어 주교는 복자경문을 발표하고 조선교회 신자들에게 복자들이 속히 성인품에 오를 수 있도록 기도하기를 요청했다. 이때 한국교회는 바티칸에서 조선을 알리는 사진전을 열었다. 출품작품은 70점이었는데, 드망즈 주교가 이를 준비했다.


복자성월을 순교자성월로

한국교회에서는 병인박해 100주년에 해당되는 1966년을 전후로 대대적인 순교자현양운동을 벌였다. 원래 이 현양운동은 중앙에서 전개하기로 기획되었다. 그러다가 병인순교자를 기리는 현양운동을 논의하던 주교회의는 이 운동의 일환으로 교구마다 교구의 책임 아래 기념성당을 짓기로 했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순교자현양운동은 전국단위의 조직적 기구가 아니라 각 교구를 독자적 단위로 하여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구대교구에서도 1964년부터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하는 복자성당 건립운동이 시작되었다. 성당의 건립기금은 전체 교구민이 참여해서 마련했다. 특히 평신도뿐만 아니라 대구, 왜관, 안동지구의 모든 신부가 2년 동안 기금납부에 동참했다. 대구대교구의 복자성당은 삼덕성당에서 분리되어 1966년 공사를 시작하여 1970년에 완공했다. 1973년에는 복자성당 내에 대구 감천리 교구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순교자 허인백, 김종륜, 이양등의 유해를 이장했다. 절두산 복자기념성당을 비롯한 전국의 복자성당은 거의 이 무렵에 세워졌다.

이러한 현양의 열기와 더불어 병인순교 가경자 26위 중 24위의 시복식이 있었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베드로대성전에서 거행된 시복식에는 5만여 명의 순례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5백여 명의 한국 신자들, 2천 5백여 명의 프랑스 신자들이 참석했다. 시복선언이 끝나자 당시 서울대교구 김수환 대주교의 주례로 대례미사가 올려졌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이날 새 복자들에게 경배한 후, 한국 24위의 순교자들을 신앙의 귀감이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한국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나 정신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도 했다. 대구대교구에서는 10월 13일 대건중·고등학교 교정에서 서정길 대주교와 교구 사제단의 공동집전으로 합동축하미사를 거행했다.

한국교회의 본격적인 시성운동은 전 교구에 한국인 교구장이 임명된 1971년 이후에야 추진되었다. 이보다 앞서 조선교회는 1939년 기해박해 100주년을 기해 이들의 신앙심을 본받으려는 신앙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서울교구를 중심으로 태동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효과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다. 이후 다시 병오박해 100주년인 194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천주교순교자현양회가 발족되면서 시복시성운동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운동은 순교지 조사 보존, 순교자의 유물수집 등의 수준이었다. 1971년 주교회의에서는 한국순교복자 시성추진안을 접수하였고, 1976년 한국순교복자 전체 103위에 대한 시성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했다. 당시 시성추진위원장은 김남수 주교, 로마주재 시성수속 담당관은 로마에 유학 중이던 서울대교구 박준영 신부였다. 교황청에서는 1978년 시성청원서를 정식으로 접수하고 심사에 들어갔다.

한편 한국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는 1980년 시성시복운동을 한국천주교 창설 200주년의 기념사업으로 입안하고 적극 추진했다. 주교단은 1982년 한국순교복자의 시성을 위한 기적보고 관면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했다. 이듬해에는 순교자 유해순회기도회를 개최하고, 시성시복 후보자 표준영정을 제작했다. 교황청은 그해 한국순교복자 103위의 시성에 필요한 기적심사를 관면하고, 시성을 허락했다. 이러한 노력에 의해 한국천주교 창설 200주년인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의 순교자 103위가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광복 이후부터 지내오던 9월 복자성월은 이때부터 순교자성월로 지내게 되었다.


아버지 순교자의 시복시성운동

103위의 시성 이후 시복시성운동은 이벽을 비롯한 신앙선조들과 1801년의 신유박해를 전후하여 순교한 이들을 대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우리 교회사에서는 부자가 순교한 사례가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정약종 및 정하상 부자와 같다. 이 두 명 모두 교회를 위해 큰일을 했고, 자신의 신앙을 증거했다. 그런데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아들 정하상은 시성되었고, 1801년 순교자인 아버지 정약종은 아직 시성되지 못한 형편이다. 이는 한국인의 정서에 매우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신유박해 전후 순교자의 시복시성을 추진하지 못했던 데에는 증빙사료 미정리 및 사료부족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그래서 최근 여러 교구에서는 이 누락된 분들을 위한 시성준비가 한창이다.

원래 시복조사는 후보자의 해당 교구에서 시작된다. 대구대교구에도 적지 않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이들의 시복시성은 물론 대구대교구가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경상도지역에서 을해·정해박해 순교자를 찾아내고 이에 관한 증빙사료를 붙이는 일은 대구대교구의 몫이 되었다. 이에 당시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는 시복시성운동과 순교자현양사업 및 교구사 편찬사업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시작했다. 즉 1996년 이문희 대주교와 사제, 평신도 13명이 향후 2년간 교구의 순교록을 작성하기로 결정하면서 순교자현양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총재 이문희 대주교, 위원장 김경식 신부를 중심으로 하는 ‘대구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가 다시 창립되었다. 2001년에는 영남지역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위한 구체적인 활동 전개를 목표로 각 본당별로 위원 한 명씩을 추천받아 순교자현양위원회를 재구성했다.

한편 순교자들에 대한 연구는 영남교회사연구소의 시복시성역사분과위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998년 역사분과에서는 대구의 순교자 72명 가운데 사료가 확실한 23명의 행적을 담은 『대구의 순교자들』을 발행하고, 이어 증언사료집 『대구의 순교자들2』를 출간했다. 2001년에는 『대구순교자연구』를 발간하고, 매월 교구민들을 위한 논문 발표회를 열었다. 대구대교구 사제평의회는 1998년 을해·정해·병인박해 순교자 23명의 시복추진을 결의하고, 이문희 대주교는 이해 가을 제5회 ‘관덕정후원회원의 밤’ 미사에서 이를 공포했다. 이들 중 세례명이 없는 세 분 순교자는 이번 시복시성대상자에서 보류되고, 나머지 20인의 시복시성이 추진되고 있다. 출발 당시 우리 교구의 시복추진 주관자는 김경식 신부, 청원자는 구본식 신부였다. 현재에는 전국 교구들과 보조를 맞추며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시복시성은 모범적인 신앙선조를 성인이 되도록 하는 일이다. 그것은 순교자를 위한 일이 아님은 물론이다. 시복시성을 하면서 그들의 덕행을 추구하여 살아있는 우리가 덕을 닦는 것은 그들을 닮기 위해서이다. 순교현양을 하는 것은 오늘날 살아있는 우리가 성인이 되기 위해서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신앙선조처럼 순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덕을 오늘의 사회가 어떻게 이어 받을까를 해석해내어야 한다.

관덕정 순교성지의 현 관장 여영환 신부는 한국순교성인들의 축일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즉 우리가 김대건 신부와 정하상과 그 동료들의 축일인 9월 20일을 축일로 지내는 일은 마땅하지만, 한국성인 본명을 가진 사람은 각기 해당 성인의 순교일을 찾아 본명축일로 기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성인공경을 우리의 삶에 좀더 가까이 연결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우리 성인으로부터 모범을 취하고 격려받자는 우리의 요청인 시복시성이 이루어지고 나면, 세계인들이 우리에게 성인들의 구체적 삶을 제시해 달라고 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내줄 수 있는지 깊이 질문하게 되는 9월이다.

* 김정숙 교수는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교구 100년사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월간빛, 2012년 9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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