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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9세기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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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19 ㅣ No.669

19세기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

 

 

1. 머리말 

2. 19세기 전반 경기 북부 지역과 천주교
3. 19세기 중반기의 경기 북부 교우촌
4. 맺음말

 

 

1. 머리말

 

경기 지역 중에서 처음으로 천주교가 전파된 곳은 양근 지역이었다. 1784년 초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그에게 서적과 聖物을 전해 받은 이벽은 9월(음)에 양근의 권철신 · 권일신 형제를 찾아가 복음을 전파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입교한 권일신의 노력으로 천주교가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양근은 조선 천주교회의 요람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1) 


양근의 권씨 형제와 함께 이벽이 접촉한 인물이 마재의 정약전 · 정약용 형제였다. 이벽은 권씨 형제를 찾아가기 전인 1784년 4월(음)에, 누님의 기제사를 마치고 마재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정씨 형제들에게 천지 조화의 시초, 形神과 生死의 이치를 설명하며 그들을 신앙으로 이끌었다.2) 그리고 1786년에는 마재에 거주하던 정약종이 중형인 정약전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양근 · 마재와 비슷한 시기에 신앙이 전파된 경기 북부 지역으로 포천이 있다. 포천에서 신앙을 받아 들인 사람은 권철신 · 권일신 형제의 외사촌인 홍교만과 그의 아들 홍인이었다.3) 홍교만은 서울에서 포천 청량면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뒤 아들 홍인을 낳았고, 1791년 이전에 권씨 형제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4) 그러나 즉시 입교하지 않다가 아들의 설명을 듣고 재촉을 받아 신앙을 실천하게 되었으며, 입교 후에는 아들과 함께 가족뿐만 아니라 많은 비신자들을 입교시켰다고 한다. 아울러 마재의 정씨 집안과는 자신의 딸을 정약종의 아들인 정철상과 혼인시킴으로써 사돈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이외에 고양 · 연천 등지에도 신자가 거주했다는 연구가 있지만,5) 대체로 초기 교회에 있어 경기 북부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양근과 인적 · 학문적으로 연계된 마재, 포천 등지에 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6)

그러나 경기 북부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1801년에 발생한 신유박해로 신자들이 체포 · 순교함으로써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신자 공동체는 이후에 다시 재건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데, 이처럼 신유박해 이후 와해된 신앙 공동체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재건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박해시기 경기 북부 지역의 신앙 전통’의 흐름을 정리해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2. 19세기 전반 경기 북부 지역과 천주교

신유박해 이후 숨어 지내던 신자들은 박해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교회의 재건을 꿈꾸며 활동을 재개하였다. 즉 신태보 · 이여진 · 권기인 · 홍우송 등은 1811년에 북경 주교와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 교회의 사정을 알리고 조선 교회의 재건을 위해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7) 그리고 1816년 이후에는 정하상이 성직자 영입 운동을 주도해 나갔고, 여기에 역관 출신인 유진길(1823년)과 마부로 북경 왕래를 자주했던 조신철(1826년)이 가세하면서 이 운동은 좀더 활기를 띄게 되었다.

특히 정하상 · 유진길이 1824년(혹은 1825년)에 교황께 올렸던 서한은 1827년에 교황청 포교성성(인류복음화성)에 전달되었고, 이를 계기로 1831년 9월 9일에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조선 대목구의 사목을 맡게 되면서 1836년 이후에는 모방(Maubant, 羅) 신부 · 샤스탕(Chastan, 鄭) 신부 ·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 등 서양 선교사들의 입국도 이어졌다.

선교사들은 입국 후 “신자들이 있는 조선의 방방곡곡을 방문하였고, 가는 곳마다 회장들을 임명하거나 승인하고, 어린이 代洗와 혼인, 장례, 주일과 큰 축일의 집회, 싸움과 소송의 판단 등 한마디로 가장 긴급한 모든 것에 관한 규칙을 정해줌으로써 신자 집단의 조직을 새로 만들거나 보충하였다.”8) 그 결과 한국 교회는 점차 체계를 잡아갔고, 신자 수도 모방 신부가 도착했을 때 6,000명(혹은 4,000명) 정도였던 것이 3년 후인 1838년 말에는 9,000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처럼 한국 교회가 발전해 가는 상황에서, 경기 북부 지역의 신앙 공동체 역시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표1>은 1836년 1월에 입국한 모방 신부가 조선 교회의 교세에 대해 보고 받은 내용 중에 경기 북부 지역의 교우촌과 교우 숫자이다.9) 이 자료에 의하면 1836년 초 경기 북부 지역에는 포천 · 마재 · 고양 · (고양)용머리 지역에 신자들이 존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중 고양의 경우는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증언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서울에서 태어나 11세 때 대세를 받은 유 바르바라가 신자에게 출가하여 1839년 당시 고양에서 살고 있었다든가,10) 1824년에 고양 용머리11)에서 태어난 원 마리아가 12세에 문교했고, 용머리를 방문한 모방 신부를 만났다는 기록,12) 그리고 서울의 밤섬 출신인 김효주 · 김효임 · 김 안토니오 형제가 고양 용머리로 이사해 살다가 기해박해 때에 김효주 · 김효임 자매가 체포되어 순교한 기록들이 있다.13)

따라서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볼 때, 1830년대 초 고양 지역에는 70-90명 규모의 신자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원 마리아가 김 안토니오의 집에서 모방 신부를 만났다는 사실은, 모방 신부가 이 지역을 사목 순방할 때, 김효임 · 김효주의 집이 공소 역할을 했음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고양 지역은 초기 교회 때에 드러나지 않던 지역이다. 따라서 이곳은 교회 재건 이후 새롭게 형성된 공소가 아닐까 생각된다. 즉 선교사의 입국 이후 활기를 띄어가던 교회 분위기와 서울 인근이라는 지역적인 배경 하에, 이 지역에도 신자 공동체가 새롭게 형성된 듯하다. 그리고 김효임 가족이 서울에서 고양 용머리로 이주한 사실은, 두 지역이 신앙적으로 연계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14)

다음으로 포천과 마재는 경기 북부에서 가장 먼저 복음이 전파된 지역이자 신유박해 때에 신자공동체가 와해된 곳이다. 그러나 1836년 초에 <표1>과 같은 수준의 교세가 나타난 것은, 이 지역의 신자공동체가 기존의 토대 위에 다시 재건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박해로 흩어졌던 신자들이 다시 모인다거나, 배교 또는 냉담한 신자들이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함으로써 신앙집단의 재형성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포천 고약리15) 출신이라는 이량의 자료가 주목된다. “이량은 본래 경기 포천 고약리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성교 사정은 알았으나 신유년 풍파 후로 성교 어두워 몇 구절 경문을 봉행하더니, 모방 신부 오신 처음에 매부 이 토마스 형제와 함께 서울에서 모방 신부를 뵙고 영세를 청했다”16)고 한다. 즉 신유박해 이후 신앙에서 멀어졌다가, 신부가 왔음을 확인하고 성사를 청하는 이량과 동료들의 모습을 통해, 박해 이후 포천의 신앙 공동체가 다시 재건되는 과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들이 모여 <표1>과 같은 성과가 나타났다고 생각되며, 마재 역시 이와 비슷한 과정 속에서 신자 공동체가 재건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17)

결국 19세기 전반기의 경기 북부는 비록 교세적인 측면에서는 경기의 동부나 남부보다 약하지만,18) 새로운 교우촌의 형성, 기존 교우촌의 재건을 통해 신앙을 이어갔고, 그런 가운데 지역적으로나 신자 수의 측면에서 초기 교회 때보다는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한편 교세적인 측면과 함께 이 시기에 있어 주목해야 할 점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이다. 물론 이와 관련해서 구체적인 자료들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동정녀로서 생활하다가 의연하게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김효임 · 김효주 자매와 같은 경우는 마재 출신의 정하상과 함께 신자들의 훌륭한 신앙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19)


3. 19세기 중반기의 경기 북부 교우촌

선교사들의 입국 이후 성장하던 한국 교회는 기해 · 병오 박해를 거치면서 다시 한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병오박해 직후 페레올(Ferreol, 高) 주교와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가 활동을 재개하면서 한국 교회는 점차 박해 이전의 모습을 되찾아 갔고, 이후에는 정치 · 사회적으로 교회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는 가운데 교회도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그 결과 1850년에는 신자가 11,000명에 달하였고, 공소는 185개 이상이 존재하고 있었다.20)

이러한 상황에서 경기 북부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신자들을 조사해 보면, 송도 64명21) · 장단 1명 · 포천 5명 · 고양 8명 · 파주 2명22) · 양주 2명의 자료를 얻을 수 있다.23) 이중 송도의 신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19세기 중반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 신앙이 송도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1860년대 초에 성립된 송도 공동체가 이처럼 짧은 기간에 이러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먼저 송도의 지역적인 특성이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즉 송도는 경기 북부의 중심지이자 서울과 함께 조선시대 최대의 상업 도시였다.24) 따라서 이 지역은 서울처럼 어느 정도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가능했으며, 여기에 이주 신자까지 모여들면서 교세가 급증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25)

이와 함께 지역적으로 서울과 가까웠던 점도 송도 교회의 발전에 유리했다. 즉 신자들 중에는 최필주처럼 서울에 왔다가 천주교를 접한 경우가 있으며, 이문홍처럼 문교한 후 서울로 와서 주교에게 영세하고 돌아간 경우도 있다. 그리고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도 2차례 이 지역을 방문했는데, 이와 같이 서울 교회와의 교류가 상대적으로 쉬웠던 점이 송도 교회가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 아니었나 생각된다.26)

다음으로 장단의 경우는, 장단에 거주하는 김조화가 동생인 김수정을 입교시키고, 또 송도 회장인 이문홍에게 보내 그의 집에서 베르뇌 주교에게 영세토록 했다는 기록27)에서 송도 지역의 영향 하에 신앙이 전파된 것으로 여겨진다.

포천 지역은 18세기 이래 신자 공동체가 이어지던 곳으로, 19세기 중반에는 고약리 · 격장리 · 솟다리28) · 남의골29) · 영평30) 등 구체적인 신자들의 출신지와 거주지도 나타나고 있다.31) 이중 고약리에서 백양선, 이 안드레아, 홍몽노, 홍성원 등 여러 신자가 병인박해 때에 체포된 것32)은, 포천에서도 고약리가 좀더 알려진 교우촌이었기 때문이며, 아울러 홍몽노와 홍성원의 고향이 포천의 이웃인 양주 일담리33)였다는 사실에서 양주와 포천 신자 간의 교류 양상도 상정해 볼 수 있다.

 


고양 용머리 지역은 기해박해 때 김효주 자매가 잡혀 순교함으로써 신자 집단이 타격을 입은 곳이다. 그러나 1843년에 용머리에서 태어난 원 수산나가 어려서 대세를 받고 15세에 성 베드로와 혼인을 했다는 사실은, 기해박해 이후에도 원씨 집안을 비롯한 여러 신자들이 고양의 신자 공동체를 재건하고 유지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41)

 


파주는 파주 출신인 방 안토니오가 문교하고 덕산으로 이사했다는 기록과 1866년에 석방된 윤쾌영 부부가 파주 잔버들 숫막46)으로 피신하여 생활했다는 사실에서, 이 지역의 신자 집단을 추정해 볼 수 있으며,47) 양주는 1868년에 체포된 유흥길이 양주의 ‘이 선생’을 교우라고 했고, 1870년에 체포된 이백흥이 서울의 이덕보 집에서 양주의 ‘이 선생’을 통해 입교했다는 점에서, 이 시기 양주에도 신자들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표3> 참조)48)

그런데 파주와 양주의 신자 기록은 이 시기에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기해 · 병오박해 이후 경기 북부 지역의 신앙지가 확산되는 모습으로 해석되는데, 이중 파주는 위치상 서울 → 고양 쪽에서 신앙이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양주는 <표3>의 기록처럼 포천과의 관계 속에서 신자들이 생겨난 것으로 보여 진다.49) 그러나 이 시기 파주와 양주의 교세가 공소를 형성할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19세기 중반의 기록에서 출신자는 확인되지만 거주자가 확인되지 않는 지역으로 마재와 교하가 있다. 이중 마재는 19세기 전반기까지도 다수의 신자들이 존재했다는 점[<표1>참조]에서 이후 계속적으로 신자 집단이 유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교하의 경우는 교하 출신인 강 마리아가 제천으로 출가하여 시아버지에게 수학했고, 역시 교하 출신인 심정도 부자가 제천으로 이사해서 살다가 체포되었다는 기록 외에, 교하 지역에 신자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 심씨 부자가 입교 후에 좀더 나은 수계생활을 위해 제천으로 이주했을 가능성과 제천의 남종삼가와 혼인을 맺은 강 마리아 집안이 천주교에 입교했을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이 시기 교하 지역에도 신자들이 존재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 볼 때, 박해시기 경기 북부 지역의 신앙 전통은, 초기 교회 이래 신앙을 지켜오던 포천과 마재, 19세기에 새로이 등장하는 고양과 송도 지역이 그 중심을 이루며, 이어 송도에서 장단, 고양에서 파주, 포천에서 양주 등 주변 지역으로 신앙이 확대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천주교 신앙이 이처럼 확산되는 현실 속에서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양주 · 송도 · 장단 등지에서 다수의 신자들이 처형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처형지 중에 의정부 교구와 관련 있는 양주의 경우는 기록상 5명의 신자가 이곳에서 희생된 것으로 나와 있다. 즉 김윤호 · 권 말다 · 김 마리아는 용인에서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었고, 홍성원은 포천에서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양주에서 치명하였다. 그리고 양주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박 서방은 양주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런데 이 5명 가운데 양주와 관련된 신자는 박 서방과 양주 일담리 출신으로 포천 고약리에서 체포된 홍성원(1868. 5) 정도이며, 용인에서 잡힌 3명은 전혀 양주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이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순교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시기에 양주에서 신자들이 처형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양주를 비롯한 경기 북부 지역의 신자 집단이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이에 양주목에서도 신자들을 체포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가 아니었나 생각한다.55)

 


 


 


4. 맺음말

이상에서 박해시기 경기 북부 지역의 신앙 전통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 경기 북부 지역은 18세기 후반에 마재와 포천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19세기에는 고양 용머리와 송도 지역이 새로운 신앙지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점차 기존 지역들의 영향 하에 장단 · 파주 · 양주 지역 등으로 신앙이 확산되는 양상을 볼 수 있었다.

한편 이러한 신앙 전통은 병인박해를 지나 개항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즉 블랑(Blanc, 白圭三) 주교가 사목 순방 후에 작성한 <1882-1883년도 교세통계표>를 보면, 경기 북부 지역의 공소로 양주의 고령(파주시 광탄면 용미리)과 가리비(우곡, 양주시 광적면 우고리), 연천의 밤골, 송도 지역이 기록되어 있고, 이듬해인 <1883-1884년도 교세통계표>에는 고양의 청대동 공소(고양시 덕양구 원당동)가 추가되고 있다. 그리고 2년 후인 <1885-1886년도 교세통계표>에는 교하의 연대산 공소(파주시 교하읍 연대산리)가 새로 등장하고 있으며, 이어 파주의 칠울 공소(1898년), 포천의 막은담이 공소(1900년), 장단의 동파 공소(1901년), 적성의 신암리 공소(1909년) 등이 차례로 설립되고 있다.

이처럼 개항 이후 경기 북부 지역에는 양주 · 연천 · 송도 → 고양 → 교하 → 파주 → 포천 → 장단 → 적성 등의 순서로 공소가 설립되고 있는데, 이들 장소는 초기 교회 이래 신앙 공동체가 세워졌던 곳이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경기 북부 지역의 신자들은 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초기 교회 이래 신앙을 꾸준히 이어왔으며, 그것이 오늘날 의정부교구의 신앙 전통이 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물론 송도와 포천 지역은 현재 의정부 교구의 관할 구역 밖에 있다. 하지만 이 지역들은 같은 경기도 내에 있고, 또 이 지역들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의정부 교구의 신앙의 역사가 형성되고 발전되었다고 할 때, 이들 지역과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고, 경기 북부 지역의 신앙사, 더 나아가서는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사의 범주 안에서 양자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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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上,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310~312쪽.
2) 차기진, 《조선후기의 서학과 척사론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182쪽.

3) 홍교만과 홍인의 자료는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 시복자료집 제2집》(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 특별위원회, 111-137쪽)과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 시복자료집 제4집》(171-183쪽) 참조.

4) 홍인이 포도청에서 진술한 내용에 의하면, 자신은 신해년에 부친의 가르침을 곁에서 듣다가 따라 배우게 되었다고 하였다.(《사학징의》, 불함문화사, 1977, 150쪽)

5)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7, 46쪽.
6) 오늘날 의정부 교구의 관할지역에 국한해서 본다면 마재가 거의 유일한 신앙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다.
7) 《한국천주교회사》 中, 17-37쪽.
8) 《한국천주교회사》 中, 359쪽.
9) 조현범, <모방 신부의 조선 전교>, 《교회사연구》 22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20-21쪽.
10) 《기해 · 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상, 한국교회사연구소(영인), 2004, 295, 316쪽.
11) 현재의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12) 《기해 · 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하, 819-820쪽.
13) 《기해 · 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하, 824-826쪽.

14) 이 시기 고양 지역에 신자들이 생겨난 것은 서울 西部 지역의 교세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듯하다. 즉 아현, 마포, 동막, 서강 등 마포 지역은 초기 교회 때부터 신자들이 존재했으며, 1830~1840년대에는 좀더 많은 신자들이 거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부 지역의 신자들 중에는, 밤섬 출신의 김효임 가족처럼, 지리적으로 가까운 고양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고양에도 신자 공동체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방상근, <마포 지역의 가톨릭 성장사>, 《교회사연구》 20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03, 148-152쪽 참조)

15) 고약리가 현재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오늘날 포천시 가산면 우금리에 <괴기>라는 지역이 있고, 이 곳이 <괴야리>라고도 불렸다는 점에서, 괴기(괴야리)가 교회 측 자료에 나오는 고약리(괴약리)가 아닐까 추정해 본다.

16) 절두산 순교성지 소장, 《병인치명사적》 6권, 45쪽(아들 이 요한의 기록). 이량은 《포도청등록》에 나오는 이병교와 동일인으로 생각되는데, 《포도청등록》(1879년 4월 1일)의 신문 기록에는 서울의 차동 태생으로 나온다.

17) 마재의 경우는, 신유박해 이후 마재로 내려갔던 정하상의 가족이 친척과 주위 사람들의 비난과 냉대를 받았고, 그 때문에 결국 정하상이 마재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에서, 신유박해 이후 이 지역의 신자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1836년 초 70-80명의 신자가 마재에 있었다는 것은 의외의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1818년에 해배된 정약용이 다시 교회의 본분을 지키기 시작했고, 그의 열심이 모든 신자들을 기쁘게 하고 감화시켰다는 내용은, 정약용의 신앙 문제를 떠나서, 당시 마재 지역의 신앙 분위기를 전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며, 그 결과가 포천과 마찬가지로 <표1>의 통계에 드러난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천주교회사》 중, 185~186쪽 참조)

18) 1836년 초의 기록에 의하면, 남부(수리산, 굴암, 수원, 양지, 죽산)에 35.9-36.2%, 동부(양근 · 지평(?) · 건업이 · 이천)에 32.9-33.6%의 신자가 거주한 반면, 북부(포천, 마재, 고양, 용머리)에는 15.1-15.9% 정도의 신자만이 거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19) 《기해일기》 김 골롬바, 김 아녜스 항목 참조. 조광 교수는 초기 교회의 신자 중에 정약종을 역할 모델로서 제기한 바 있다. (조광, <의정부 교구 창설의 교회사적 의미>, 천주교 의정부교구 사목연구소 제1회 심포지엄 자료집 ‘의정부교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2007, 19-20쪽)

20) 이후 신자 수는 1855년에 13,638명, 1861년에 18,035명, 1865년에 23,000명으로 증가하였다.

21) 송도 신자가 많게 나타나는 데에는, 송도 신자를 위주로 정리된 《邪學漢家舍汁物放賣成冊》의 명단이 여기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학한가사즙물방매성책》에 실린 30명을 제외하더라도 당시 송도에 거주했던 신자는 34명이나 되어, 여전히 다른 지역의 교우 집단에 비해 많음을 알 수 있다.

22) 파주에 거주한 것으로 나타난 2명은 병인박해 때 ‘파주 잔버들 숫막’으로 피신한 윤쾌영 부부이다. 따라서 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파주에 살았던 신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23) 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 천주교사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67-68쪽 참조.
24) 강만길,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3, 104쪽.

25) 당시 송도로 이주한 신자로는 광주의 손성즉 가족과 내포의 정치도 가족, 그리고 수원의 김도여와 용인의 김동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송도 서쪽 광덕산 기슭에 있는 두문동(두미울)에 거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송도의 두문동은 당시 타지에서 이주한 신자들이 주로 거주했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이외 송도에 거주했던 신자들의 거주지 분포를 보면, 도성 안과 그 인근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동부 · 남부 · 북부 · 덕암리 · 팔자동 · 새말 · 여능리 등지에 다수의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특히 송도 회장인 이문홍의 거처가 덕암리였고, 팔자동에 거주한 박의영 집에 베르뇌 주교가 와서 성사를 주었다는 사실은, 당시 송도 교회의 중심이 도성 인근인 덕암리와 팔자동이었음을 말해주며, 아울러 이러한 송도의 도시적인 성격이 서울과 마찬가지로 교회 형성에 유리한 조건이었음을 알려 준다.

26) 한편 1865년 8월 3일(음) 베르뇌 주교가 송도의 이 바오로 회장에게 보낸 서한에는, 당시 송도에서 영세 예비한 사람이 45명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서도 송도 지역의 교세를 짐작할 수 있다.(《베르뇌 문서》,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505쪽)

27) 《포도청등록》하, 보경문화사(영인), 1985, 476쪽.
28) 현 포천군 가산면 정교리(솥다리).

29) 남의골의 정확한 현재 지명은 알 수 없다. 다만, 오늘날 포천시 가산면 우금리에 <넘말>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곳이 남의골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그 근거는 첫째, 《치명일기》(316)에 “(백양선) 포천 남의골 사람으로 고약리로 우거하였다”는 기록에서 남의골과 고약리가 이웃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마침 고약리로 추정되는 <괴기>(주15)와 <넘골>이 가깝다는 점이며, 둘째는 남의골과 넘말이 명칭상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0) 현 포천군 영중면 영평리.

31) 포천과 관련된 사람으로는 이경종(《치명일기》 319), 김계호, 지여선(《포도청등록》 중, 769쪽), 이치재(《치명일기》 412), 백양선(《치명일기》 316), 이 안드레아(《치명일기》 315), 이 요한(《병인치명사적》 1권, 87쪽), 서정직(《치명일기》 516), 이량(《치명일기》 354) 등이 나타나지만, 이중 서정직과 이량의 경우는 다른 지역 출신이라는 기록도 있다.

32) 이외 이경종 가롤로가 고약리 출신이며(《치명일기》 319), 이량(이병교)도(《치명일기》 354)에는 고약리 출신으로 나온다.

33) 현재의 동두천시.
34) 《치명일기》 417
35) 《치명일기》 317
36) 《치명일기》 411
37) 《치명일기》 596
38) 《치명일기》 444
39) 《치명일기》 416
40) 《포도청등록》 하, 473쪽.

41) 고양에 거주한 것으로 파악한 8명은 고양 태생인 원 수산나와 원 마리아의 가족들, 즉 두 사람의 부모와 남편들이다. 따라서 드러난 인원수는 상대적으로 많지만 가족 단위라는 점과 또 원 수산나와 원 마리아가 결혼 후에 계속 고양에 거주했는지도 불명하기 때문에, 인원수만 가지고 이 시기 고양 지역의 교세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42) 《치명일기》 71
43) 《치명일기》 213; 《병인치명사적》 9권, 27~28쪽.
44) 《치명일기》 214
45) 《병인치명사적》 2권, 159쪽.

46)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잔버들(세류동). 《한국천주교회사》(하, 404쪽)에는 추베더리로 표기되어 있는데, 잔버들의 오역인 듯하다. 이곳은 1866년 남종삼이 피신했다가 체포된 곳으로, ‘고양 잔버들 숫막’ 혹은 ‘고양’으로도 나온다.(《병인치명사적》 10권, 30쪽, 《박순집증언록》 1권, 11-b쪽, 《죄인남종삼등추안》 1월 15일 기사) 이것으로 보아 ‘파주 잔버들 숫막’은 고양 지역으로도 알려져 있는 듯하다.

47) 남종삼이 이곳으로 피신한 점이나, 남종삼이 체포된 곳임에도 불구하고, 윤쾌영 부부가 다시 이곳으로 피신하여 생활한 사실은 이 지역과 교회와의 연관성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아울러 1883년 교세통계표에 가장 먼저 나오는 공소가 이 지역이라는 사실에서도 파주 지역의 신앙 전통을 짐작해 볼 수 있겠다.

48) 유흥길은 제천 배론에서 신학 공부를 했던 신학생이며, 자신의 교우로 용인의 김 선생, 양주의 이 선생, 수원의 박 선생 등을 지목하였다. 그런데 유흥길이 자신의 교우에 대해 선생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은, 이들이 신학 공부를 같이한 신학생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추정이 맞다면 양주에는 신학생을 배출할 정도의 신자 가정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성립될 수 있다.(《포도청등록》 하, 473쪽 참조).

49) 양주 지역의 복음 전파와 관련해서, 포천과의 관계 속에서 양주에 신자들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양주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포천 쪽으로 피신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다.(토론자 서종태 박사) 그러나 교세적인 측면에서 볼 때, 포천은 교회 초기부터 신앙의 흔적들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1836년 초의 통계에는 90~95명의 신자 수가 보고되기도 하였다. 반면 양주 쪽은 신자의 존재가 거의 보이지 않다가 19세기 중반에야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양주 일담리의 세거지인이라는 홍씨 일가는, 입교 전에 고약리를 비롯한 다른 교우촌 지역으로 이주했고, 그 이후에 포천 쪽에서 양주 쪽으로 신앙이 전수되었다고 보는 것이 좀더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50) 《치명일기》 369
51) 《치명일기》 75
52) 《병인치명사적》 23권, 103, 106쪽.
53) 《병인치명사적》 23권, 103, 106쪽.
54) 《병인치명사적》 23권, 124쪽.

55) 지역적으로 충청도인 진천의 권성삼 · 유원필 · 윤 생원 · 장륵진 · 송재풍 등이 양주 포교인 이성근에게 체포되었다가 돈이나 소를 주고 풀려난 사례들도 당시의 분위기를 알려주는 자료라고 생각한다(《포도청등록》 중, 664쪽).

56) 《치명일기》 413
57) 《치명일기》 414
58) 《치명일기》 415
59) 《치명일기》 416
60) 《치명일기》 417
61) 《치명일기》 393
62) 《치명일기》 394
63) 《치명일기》 395
64) 《치명일기》 396
65) 《치명일기》 397
66) 《치명일기》 398
67) 《치명일기》 399
68) 《치명일기》 400
69) 《치명일기》 401
70) 《치명일기》 402
71) 《치명일기》 403
72) 《치명일기》 404
73) 의정부 교구의 경계 문제에 대해서는 조광 교수의 <의정부 교구 창설의 교회사적 의미>, 24-25쪽 참조.

[교회사 연구 제31집, 2008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방상근(세종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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