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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분도회 선교사들의 한국 문화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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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06 ㅣ No.685

[특집 2009년도 심포지엄] 성 베네딕도회의 한국 선교와 문화 활동


분도회 선교사들의 한국 문화 연구

 

 

1. 추념과 고백 

2. 예비적 고찰
3. 선교사들의 한국 문화 연구
4. 선교와 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하기
5. 남은 이야기들


1. 추념과 고백

베네딕도 회원들은 … 한국의 전통 문화, 外來文明에 오염되기 전 한국 문화의 原型을 밝히고 소개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들은 修道者였기 때문에 파리 외방전교회원과 같이 늘 일선사목에 종사해야할 在俗 神父들보다는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고, 뿐더러 한국인들에게 고등 교육을 실시하고자 來韓했던 만큼 기초 지식으로서 한국의 언어, 역사, 민속 등을 깊이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 베네딕도 선교사 중에 학자가 많았고, 또 한국을 학문적으로 연구할 시간과 방법을 갖추고 있었다.1)

10여 년 전의 이야기이다. 박사 학위 논문을 구상하다가 한국 교회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선교사 문제를 다루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일단 관련된 연구 논문들을 찾아 읽기로 하였다. 그때 제일 먼저 접한 것이 바로 위에 인용한 논문이었다. 2009년 7월 20일에 선종하신 최석우(안드레아) 몬시뇰께서 1984년에 쓰신 글이다. 2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학술적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특히 프랑스 선교사와 독일 선교사를 비교하는 시도를 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공부의 방향을 정하는 데에도 몬시뇰의 논문이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그 후로도 관련 자료들을 찾을 때면 항상 몬시뇰께서 쓰신 논문들의 주석에 나오는 문헌들부터 먼저 뒤졌다. 足脫不及을 절감하던 淺學卑才가 이제 공부의 指南마저 잃어 어디에 물어볼 곳도 없으니 막막하기 이를 데 없다.

학술적인 성격을 담은 글을 쓰면서 개인적인 감회를 앞세운 이유는 다름 아니다. 한편으로는 한국 교회사학계의 태두이셨던 분에 대한 개인적인 애도를 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글이 노정하게 될 학문적인 미숙함을 미리 고백하려는 뜻에서이다. 분도회 선교사들이 일제시대에 벌였던 활동들 가운데 한국 문화에 대한 연구들을 정리하여 소개하고, 또 그러한 활동들이 어떤 배경에서 가능하였는지, 나아가서 교회사 속에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성과를 이루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것이 바로 선교사들의 한국 문화 연구에 관련한 자료들을 빠짐없이 충실하게 발굴하여 정리하는 일이라도 제대로 해놓자는 생각이었다. 기초 자료에 대한 조사 작업이 잘 마무리 된다면, 나중에라도 더 눈 밝은 연구자에 의해서 본격적인 분석과 종합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하의 본론에서 전개할 논의의 내용도 분도회 선교사들의 한국 문화 연구라는 주제가 포괄할 수 있는 대략적인 얼개를 제시하는 수준에 머물 것이다.

우선 독일 출신의 분도회 선교사라는 존재의 성격을 짐작하기 위해서 예비적인 고찰들을 진행할 것이다.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독일 교회의 선교 운동을 개괄하고, 분도회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설립과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는 독일 제2 제정기의 문화투쟁에 관해서 살펴볼 것이다. 왜냐하면 피선교지의 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던 분도회 선교사들의 심성 속에는 문화에 대한 어떤 인식 태도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 분도회 선교사들의 한국 문화에 대한 연구들을 한국어, 한국 문학, 한국 예술, 한국 민속, 한국 종교 등 다섯 분야별로 살펴볼 것이다. 해당 분야에 관련한 선교사들의 연구서나 선교 잡지 기고문들을 최대한으로 수집하여 간략한 내용과 함께 그것들을 소개할 것이다. 이 글에서 가장 역점을 두고자 하는 것은 해당 자료들에 대한 충실한 조사 작업이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분도회 선교사들이 한국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학술적으로 연구한 이유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특별히 이 글에서는 교회 내에서 진행되던 선교 패러다임에 관한 논의들을 중점적으로 검토하였다.


2. 예비적 고찰

1909년부터 한국에 진출한 분도회 선교사들의 한국 문화에 대한 연구를 다루기에 앞서서 배경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사항들을 간단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19세기 독일 교회에서 선교 운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이른바 ‘문화투쟁’이 분도회의 설립과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는지, 나아가서 ‘문화투쟁’ 과정에서 형성된 문화에 대한 관념이 분도회 선교사들의 심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18세기에 계몽주의와 국가교회의 세속화는 독일 교회에서 선교 정신의 쇠퇴를 가져왔다. 이는 다음 세기에 들어서 종교적 부흥이 이루어지면서 다시 싹트게 되었다. 먼저 과거의 수도회 교단들이 선교 사명을 자각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프랑스나 여타 나라의 외방 선교 단체들이 독일 지역에 선교부 등을 건립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독일인들로 구성된 선교회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아르놀트 얀센(Arnold Jansen, 1837~1909) 신부가1875년에 설립한 신언회(神言會,2) Societas Verbi Divini)였다. 이 단체의 첫 선교사들은 1879년 중국으로 떠났다. 또한 1854년부터 1858년 사이에 독일 예수회원들도 인도의 봄베이(Bombay)와 푸나(Poona) 선교지를 넘겨받았다. 그 뒤 독일 제2 제정하에서 본격적으로 식민주의 팽창 정책이 실시되던 시기에 독일 교회의 선교사들도 남아프리카 각지로 진출하였다. 1885년에는 나탈 지방(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속한 지역)에 있는 마리안힐(Marianhill)이라는 곳에 독일의 트라피스트회가 보혈선교수녀회를 건립하였으며, 이듬해인 1884년에는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회도 동아프리카 탄자니아로 출발하였다. 또한 1890년에는 팔로티회(Pallotins) 소속의 독일인 선교사들이 카메룬에, 그리고 1892년에는 신언회가 중국 선교와 더불어 아프리카 선교에 나서서 토고에 도착함으로써 독일 교회의 남아프리카 선교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한편 19세기 중엽부터 외방선교를 지원하는 후원 단체들도 독일 지역에서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1838년 바이에른(Bayern)에서 루트비히 선교협회(Ludwigmissionsverein)가 세워졌으며, 1842년과 1843년 사이에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협회(Franziskus-Xaverius-Verein)가 아헨(Aachen)에서 조직되었다. 이들 두 단체가 결성되는 것에 앞서서, 프랑스 리용에 소재지를 두고 연보를 발간하던 선교 후원회(Propagation de la Foi)가 1832년부터 스위스의 아인지델른(Einsiedeln)에서 독일어판 연보를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873년에 가서 〈가톨릭 선교지들〉(Katholischen Missionen)이라는 선교 잡지가 출범하였다. 어린이를 위한 최초의 선교 잡지도 1888년에 출현하였다. 또한 교황청에서 설립한 선교 후원 단체인 선교 후원회와 성-베드로 사도회가 독일에 두 군데의 지부를 설치하였는데, 그 하나는 바이에른 지방의 교구들을 위하여 뮌헨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아헨에 세워졌다. 아울러 성영회 역시 대중적인 호응을 얻으면서 독일 교회의 여러 본당들에 세워졌다. 그리하여 1818년부터 1921년 사이에 독일에서는 총 45개의 선교 후원 단체들이 들어왔거나 신설되었다.3)

그러나 1871년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배제하고 통일 제국을 수립하게 되면서 독일 교회는 크나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천주 교세가 강했던 오스트리아가 제국에서 배제됨으로써 독일 제2 제정하에서 독일 교회는 소수 집단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또 제국의 통일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비스마르크가 독일 내의 천주교회를 차별하는 이른바 ‘문화투쟁’을 전개하였기 때문이다. 신생 통일국가 프로이센 제국은 16세기 종교개혁의 결과로 수립된 루터파 국가교회를 제국의 이데올로기적 발판으로 삼았다. 이미 1817년에 루터파와 칼뱅파의 통합이 이루어진 이후로 루터파의 국가교회는 법적으로 공인된 기구였다. 루터파 국가교회는 국가의 후원으로 세금을 인상하고 국민학교의 수업을 공동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반면에 루터파 교회는 거기에 대한 전형적인 반대급부로서 국가에게 ‘종교적 수단을 통하여 국가의 정당성과 신민의 복종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었던 것이다.4)

이에 반해서 천주교회는 프로이센 제국 내에서 소수파에 불과하였으며, 로마 교황청에 충성을 맹세하는 반국가적인 조직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결국 1871년에 들어와서 비스마르크에 의해서 천주교회를 탄압하는 법률들이 제정되면서 국가와 교회의 물리적인 충돌로 비화되었다. 이를 일컬어 ‘문화투쟁’이라고 부른다. 먼저 비스마르크는 1871년 프로이센 문화부(Kultus-Ministerium) 내에 설치되어 있던 가톨릭국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제국 의회에서는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 사제들이 미사 중에 강론하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하는 성직조항(Kanzel-paragraph)을 제정하였다. 1872년 아달베르트 팔크(Adalbert Falk)는 문화부 장관에 임명되자 학교감독법(Schulaufsicht)을 만들어 모든 공립 및 사립학교에 대한 감독권을 국가가 독점하도록 하였다. 이 법안에 따라서 천주교 사제들이 학교 내에서 종교 교육을 행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또한 1872년 제국의회에서 예수회법을 통과시켜 예수회, 구속주회, 라자로회 등이 제국 내에서 추방되었고, 소속 수도회들도 해산당했다.

그 이후 프로이센 의회는 독일 천주교회를 탄압하는 강도 높은 법률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었다. 1873년 이후 비스마르크의 제안으로 시작된 일련의 반천주교 입법들은 이른바 ‘5월법’(Maigesetze)이라고 불리는데, 이에 따르면 신학생 교육과 사제 서품 문제까지도 국가가 통제하도록 규정하였다. 말하자면 독일에서 사제직을 지원하자면 독일 시민이어야 하고, 국가가 인정하는 대학교 혹은 신학교에서 신학과정을 이수하였음을 증명하는 독일 고등교육 증명서를 소지해야 하며, 철학과 역사 및 독일 문학에 관한 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더욱이 국가는 이 5월법에 근거하여 사제 서품을 거부할 수 있고, 또 정치적으로 의심스러운 사제에게서 그 자격을 박탈할 수도 있게 되었다.

1875년 4월에 프로이센 의회는 이른바 재정법(Brotkorbgesetz, 말 그대로 하면 빵바구니법)을 통과시켜 독일 천주교회의 목줄을 더욱 죄었다. 이 법안은 5월법에 반대하는 주교들에 대한 국가의 재정 지원을 중단하는 것을 그 골자로 하였다. 이에 따라 제국 정부는 국가의 기금으로 독일 교회에 재정을 지원하는 것을 중단하였으며, 나아가서 성직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저항하는 성직자들을 미사 거행 중에 연행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프로이센 제국의 정부에 몰수당한 독일 교회의 재산은 만 마르크를 1,600 상회하였다. 또한 국가의 탄압에 저항하는 천주교회 성직자나 신도들에 대해서도 폭력적인 체포와 구금이 이루어졌다. 국가에 대한 저항 세력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프로이센 내 11명의 주교들 가운데 7명이 구금되고 4명은 추방되었다. 문화투쟁이 종결될 때까지 모두 합산하여 약 1,600명의 사제들이 투옥되거나 추방당했으며, 수도회의 1/3이 폐쇄되고 296개의 종교 시설물이 수난을 당하였다. 이처럼 1871년부터 약 10여 년 동안 독일 교회와 신자들은 비스마르크가 촉발한 문화투쟁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5)

그러나 프로이센 제국에서 강력한 입법 활동과 물리적인 탄압으로 천주교를 박해하는 문화투쟁을 전개하였지만, 제국 자체가 안고 있는 제도상의 전근대성, 재정적 한계로 말미암아 반천주교 문화투쟁이 그다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먼저 정치적으로는 천주교에서 조직한 정당인 독일 중앙당(Deutsche Zentrumspartei)이 약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문화투쟁 과정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결속하는 구심점의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사회적으로도 천주교 신자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뿐만 아니라 1873년에 대불황이 시작되면서 프로이센 제국이 보호 무역 정책을 펼치게 되자 정치적인 협력자였던 자유주의자들이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제국은 중앙당과 협조 관계를 이룰 필요가 생겼으며, 그 결과 비스마르크는 문화투쟁의 책임을 씌워 문화부 장관을 해임하는 것으로 투쟁을 종결지었다. 그리하여 1879년 무렵에는 독일 내에서 천주교를 적대시하는 문화투쟁이 사실상 막을 내렸다.

그런데 문화투쟁에서 발생한 독일 교회에 대한 억압들의 원인에 관하여 주목할 점이 한 가지 두드러진다. 그것은 1848년 혁명의 뒤를 이어 독일 지역에서 천주교 수도회의 숫자와 구성원들이 급격하게 증가하였던 것에 대한 두려움과 적대감에서 기인하였다는 것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1815년부터 1848년 3월 혁명 사이의 시기(Vormarz) 동안에 전통적인 종교적 실천들과 신심, 경건성에서 쇠퇴가 일어났지만, 이 시기를 겪고 살아남은 소수의 수도회들로부터 수녀원과 수도원들이 종교적 갱신의 시간 동안 갑자기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고 한다. 1855년 호엔촐레른 왕국 전역에서 713명의 수사와 수녀들이 산재해 있었지만, 1867년에는12년 만에5,877명으로 증가하였으며, 1872년과 1873년에는 8,795명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다.6)

1875년 문화투쟁의 절정기에 프로이센 의회는 이 수도회들을 철폐시키고 지원자 모집을 금지시키는 수도회 법안을 승인하였다. 이 법안이 수도원의 활동들을 방해하고, 수도자들에게 크나큰 장애를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한 것에 미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많은 수도회 교단들이 국가에서 운영하는 병원과 학교, 그리고 자선 단체들의 순조로운 운영에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호 및 병원 업무나 교육 사업에 종사하는 수도회들은 특별한 면제 조치가 내려져 즉각적인 해산에서 제외되었다. 이 때문에 의료 사업이나 교육 사업을 표방하는 수도회들로서는 활동의 폭에 제한받지 않을 수 있었으며, 문화투쟁 과정에서도 집중적인 탄압은 피할 수 있었다. 보이론의 베네딕도 수도원의 경우에도 음악 교육 분야에서의 중요성 덕분에 수도원을 빼앗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7) 나중에 한국으로 진출한 분도회의 모원이었던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을 설립한 암라인 신부는 바로 이 보이론 수도원 출신이었다. 그리고 암라인 신부가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한 것도 바로 문화투쟁이 한풀 꺾이기 시작한 때인 1884년이었다. 그러므로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이 표방한 수도 생활의 지침이나 교육을 통한 선교 사명 등은 이러한 문화투쟁기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뿐만 아니라 문화투쟁은 독일 교회와 천주교 신자들의 의식 속에서 근대 문명 내지 문화에 대한 관념을 새롭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문화투쟁이 조장하였던 로마 교회와 그 지지자들에 대한 대중적인 편견들과 적대감들 가운데 많은 부분은 천주교회의 교의들에 대한 무지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특히 교황의 수위권과 무오류 교의, 성인 공경, 동정 성모 신심 등은 프로이센과 독일 전역에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의 많은 분파들 사이에 비웃음과 경멸을 자아내거나 광범위한 적대감을 야기하였다. 즉 천주교회는 수많은 미신들로 뒤덮인 집단이자 반근대적인 존재들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문화투쟁이 왜 ‘문화’라는 용어를 표방하였는가 하는 점과 관련하여 주목할 주장이 있다. 그것은 당시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동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던 국민-국가 건설의 한 과정으로 문화투쟁을 이해하려는 시각이다. 즉 천주교회와 근대 국민-국가의 신봉자들, 자유주의자들 사이의 투쟁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문화투쟁은 독일 민족의 특수성을 문화적인 차원에서 반영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문화투쟁에서 ‘문화’라는 어휘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다는 말인가? 통상적으로 문화와 문명이라는 두 가지 상이한 개념군은 19세기 유럽 사회에서 독특한 개념사적 함의를 갖는다.8) 이를 19세기 독일의 정치적 내지는 사회적 현실 속에서 관찰하면 천주교회의 유럽적인 ‘문명’(civilization)에 대항하는 민족적인 ‘문화들’(cultures)의 투쟁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9)

그러므로 독일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민족적 통일성을 획득하는 것을 기치로 내세운 문화투쟁 과정에서 독일 천주교회는 반문화적인 존재들, 비독일적인 집단으로 낙인찍히는 경험을 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반응의 과정에서 독일 교회는 자신들이 전근대적이라거나 반문화적인 존재가 아님을 강변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근대 유럽의 산업화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문화적으로도 세련된 지식수준을 갖추고자 애를 썼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러한 판단은 암라인 신부가 표방한 일곱 가지 근본 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 즉 암라인 신부는 선교 사명의 역사적 정당성을 강조하면서 분도회의 문화적 사명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즉 성 베네딕도회는 유럽 역사 속에서 문화적 유산을 보존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교도 세계에서 문화적 등대로서 기능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신을 되살려는 것이 암라인 신부가 설립하고자 하는 새로운 수도회의 본질적인 사명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던 것이다.10) 문화에 대한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에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베버 총아빠스는 1905년 초에 약 9개월 동안 동아프리카 탄자니아 각지를 순회한 후 1907년에 《온 세상으로 가라》(Euntes in mundum universum)라는 작은 책자를 간행하였다.11) 이 책에는 분도회의 오랜 선교 활동의 역사를 비롯하여 회원들의 복음 전파 및 그리스도교 문명 전달 활동에 관한 전반적인 설명이 제시되어 있어, 이후 한국에 진출한 분도회 선교사들이 선교 전략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도회 선교사들이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 수집, 편찬 활동을 벌인 것이 선교사 개인의 지적인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분도회 설립과 관련되어 있는 근본적인 심성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과연 이러한 생각이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 한국 문화와 관련된 분도회 선교사들의 연구 활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되새겨보도록 하자.


3. 선교사들의 한국 문화 연구

1) 한국어 연구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해당 지역의 언어를 신속하게 습득하는 것이다. 신자들과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어야만 사목 활동이든 기타 선교 활동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박해 시절부터 한국에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 역시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습득하기 위한 노력을 벌였으며, 후배 선교사들이 좀 더 손쉽게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한국어 학습서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저술들은 박해 과정에서 분실되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최초의 한국어 교재나 문법서, 어휘집 등을 확인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다만 개항 직후인 1880년대 초반에 선배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들을 토대로 한국어 관한 사전과 문법서가 집대성되어 나온 적이 있다.12)

이에 비하면 독일 분도회 선교사들은 좀 더 이른 시기에 한국어에 관한 연구들을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관련 연구서들을 일반 간행물의 형태로 내놓을 수 있었다. 아마 그것은 박해 시절과는 달리 자유롭게 한국 문화를 관찰하고 한국어를 연구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프랑스 선교사들과는 달리 본당 중심의 사목 활동보다는 학교 교육과 같이 간접적인 방식의 선교 활동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구의 기회가 더 많았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겠다.

한국어 연구와 관련하여 분도회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내놓은 연구물은 1923년에 안드레아스 에카르트(Andreas Eckardt, 玉樂安, 1884~1974) 신부가 지은 저작이었다. 이 저작은 한국어 문법책 1권과 별책 부록 1권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서 출판되었다.13) 한국어 제명은 《朝鮮語交際文典》이라고 하였으며, 46판 양장으로 저자 서문과 추천사 및 차례를 합쳐서 16면에 본문 422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14) 아울러 부록의 형태로 되어 있는 문제풀이집(Schlussel)15)은 본서에 실려 있던 연습 문장들을 따로 추려서 독일어와 한국어 대역본을 만든 것인데, 총 204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연습 문장들 가운데에는 일상 회화를 담은 것도 있지만, 조선의 역사, 구전 설화, 문헌 설화 그리고 유교 경전인 대학(大學) 등에서 뽑은 내용들이 상당수 실려 있다. 이것을 보면 에카르트 신부가 한국의 문헌들에 해박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에카르트 신부의 1923년 저작은 한국어 문법 체계를 서구어의 문법 용어로 빌어서 9품사 체계(명사, 동사, 대명사, 형용사, 부사, 수사, 접속사, 후명사, 감탄사)로 소개하였다.16) 그리고 이와 더불어 회화와 문장을 익히기 위한 내용들이 각 단원별로 배치되어 있어서 학습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에카르트 신부의 한국어 문법서가 대상으로 하는 독자는 아마도 한국에 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독일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으로 파견되는 분도회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독일의 일반 지식인들도 포함해서 말이다. 이것은 이 책 자체가 당시 식민지 조선 내에서 발행된 것이 아니라,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서 발행되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문제풀이집을 제외하면 본서에서는 한국어 철자를 사용하지 않고 모두 로마자로 표기하였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에카르트 신부가 1923년에 한국어 문법책을 발간한 것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38년부터 한국인 학자들에 의해서도 주목을 받았다. 특히 조선시대 고어(古語) 연구가인 정희준은 에카르트 신부의 작업과 한국어에 쏟은 정성을 다음과 같이 상찬하기도 하였다.

冊을 저 하이델벨그에서 印刷할 그 때는 마침 世界大戰의 最中이었었으므로 著者와 같이 他國에 앉아 原稿를 먼 本國까지 運送하기는 極히 困難하였었다. 저 ‘註解’의 原稿들은 特히 손수 써서 朝鮮서 石版까지 만들어 보내곤 하였었다는데 그것을 단 한 벌씩만 부치기는 배가 戰濤中의 배라, 잃어버릴 念慮가 있다 해서 꼭 두 세벌씩 해서 이번 배로도 보내고, 또 다음 배로도…, 이렇게 부치었다는 것이다. 그의 한글에 對한 이러한 熱誠을 듣고 우리는 끔찍하게 고맙고, 또한 그와 꼭 같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17)

에카르트의 한국어 문법서와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사실로는 그가 서문에서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문자의 역사를 개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서력 기원 전후의 시기에 중국으로부터 한자가 도입되었으며, 설총이 이두를 발명하여 한문을 단어와 음절에 따라 풀어쓸 수 있게 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그런 뒤에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 세종이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등에게 자문을 구하였지만 쓸모가 없자, 1446년에 세종이 스스로 현재의 한글 자모를 창제하였다고 하였다. 아울러 에카르트 신부는 민족의 문화 수준을 언어와 문자로 자리매김한다면 한국은 세계에서 일류에 속한다고 보았다. 이는 한글의 간이성, 단순성, 표현 용이성을 높이 평가한 것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에카르트 신부가 훈민정음 글꼴의 기원에 관해서 창호(窓戶) 기원설을 주장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이전부터 한국어와 한국 문자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일본과 중국 그리고 유럽의 학자들은 훈민정음 글꼴의 기원에 대해서 산스크리트어 기원설, 고대 한자 기원설, 몽골 문자 기원설 등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된 바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에카르트 신부는 한국인의 생활 문화인 한옥의 창호 문창살의 모양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다. 사실 이것은 에카르트 신부의 독창적인 견해는 아니다. 이미 개신교 교육 선교사 헐버트가 한국인들 사이에 퍼져 있던 구비전승을 인용하여 1892년에 주장하였던 바가 있었다.18) 그러므로 에카르트 신부 역시 헐버트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이를 계승하였던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에카르트 신부는 한글과 금속 활자 인쇄 기술에 관한 내용을 1914년 무렵부터 독일의 선교 잡지에 기고하였으며,19) 1923년의 한국어 문법책을 발간한 뒤에 앞의 기고문을 좀 더 상세하게 논증하여 소책자 형태로 일본 동경에서 간행하기도 하였다.20)

한편 에카르트 신부 다음으로 한국어 연구에 공헌한 인물로는 덕원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루치우스 로트(Lucius Roth, 洪泰華, 1890~1950) 신부를 들 수 있다. 1930년부터 덕원 수도원에서 원장직을 맡았던 로트 신부는 로마 미사 경본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는 등의 전례 관련 활동 외에도 1936년에 독일인 선교사들의 한국어 학습을 위한 교육 교재로 한국어 문법책을 출판하였다. 당시 덕원 수도원의 연대기에 따르면, 이미 덕원 신학교에서는 안셀름 로머(Anselm Romer, 盧炳朝, 1885~1951) 신부의 한국어 문법서가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이 등사판이었던데다가 절판된 지도 오래되었고, 또 로머 신부가 증보판을 낼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로트 신부가 이 일을 이어받아 종래에 사용되던 로머 신부의 문법책을 증보하여 간행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덕원 수도원의 1936년도 후반기 연대기에 실린 이야기를 직접 소개하도록 하겠다.

12월 7일에 루치오 원장 신부가 거의 6백 면에 달하는 큰 책을 출판했는데, 그것은 특히 그의 동료들, 이미 조선에 와있는 동료들뿐 아니라 앞으로 조선에 오게 될 동료들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그것은 연습 문제가 포함된 독한(獨韓) 문법서이다. 이 책의 초판은 안셀모 신부가 편집하여 백 권이 등사판으로 발행되었었다. 그것은 이미 절판된 지가 오래고 또 안셀모 신부가 증보판을 낼 시간이 없기 때문에, 루치오 원장 신부가 이 수고를 맡게 되었다. 이제 이 작업이 완료되어 8절 호화판으로 모든 교과 과정이 포함되어 나왔다. 이로써 이제 조선어 공부가 즐겁고 쉬워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30세로 젊어져서 그 책을 가지고 말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제 젊은 사람들에게 조선어 공부에 대한 불안을 사라졌다. 그들은 그 책을 좀 복잡한 소설을 읽듯이 공부하면 되고, 라틴어의 학습을 위해 그들이 했던 제3편처럼 힘들일 필요가 없다. 고향에서 오는 친애하는 많은 동료들은 이 책을 고맙게 생각하기를 바란다. 1천 권이 출판되었기 때문에, 이 책을 구할 기회는 충분히 있다.21)

그런데 왜 위의 서술에서는 분도회 선교사들이 만든 최초의 한국어 문법책이었던 에카르트 신부의 1923년 저작을 언급하지 않는 것일까? 실제 로트 신부의 문법책에서도 에카르트 신부에 대한 언급이나 인용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는 한 가지 있다. 로머 신부의 생애를 소개한 자료를 보면, 로머 신부는 1911년 12월에 한국으로 입국하였으며, 입국 후에 언어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당시에 독일어로 된 한국어 문법책과 사전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불한(佛韓) 문법책을 토대로 하여 등사판으로 문법책을 만드는 데 참여하였다고 한다.22) 그러니까 로머 신부 자신이 등사판 문법책을 저술한 것이 아니라 이 작업에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이 작업을 지휘한 실제 인물은 누구였을까? 우리는 그 인물이 에카르트 신부였으리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위의 짐작이 맞다면 〈연대기〉에서 거론하고 있는 로머 신부의 등사판 문법책은 바로 에카르트 신부가 1913년에 숭신학교의 교재로 만들었다고 하는 〈조선어 문전〉과 동일한 것이었으리라고 추정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또는 숭공학교 제2대 교장, 서울 소재 원산교구 신학교 초대 교장 그리고 서울 수도원 원장 등을 역임하였던 로머 신부가 나중에 가서 에카르트 신부의 저작을 토대로 하되, 독자적으로 신학교 교재용으로 등사판 한국어 문법서를 만들어 사용하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로머 신부가 저술한 문법서의 토대가 된 것은 아무래도 에카르트 신부의 저작이 아니었을까 한다. 에카르트 신부가 1930년 무렵에 독일로 돌아간 다음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귀환하지 않고 환속하여 세속 대학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분도회 탈퇴자의 이름을 거론하기 어려운 면이 있어서 로머 신부의 이름을 가탁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23)

로트 신부가 간행한 책은 8절 호화판으로 거의 600면에 달하는 큰 책이었으며, 연습 문제가 포함된 독한(獨韓) 문법서였다.24) 그런데 그 내용에서는 앞서 말한 에카르트 신부의 문법책과 큰 차이가 없다. 한국어 학습을 위한 자습서 형태를 취하고 있는 점도 그러하거니와 문법적인 내용 해설도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연습편에 나오는 문장들은 에카르트 신부의 문법책에 실린 것들과 판이하다. 처음에는 대부분 실용적인 일상 회화 위주의 대화체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후반에 가서는 조선 역사에 관한 두 편의 짧은 글과 맹모삼천지교, 의좋은 형제 등 수편의 설화들, 그리고 그 밖의 교훈적인 예화들을 수록하였다. 그런데 그 내용들이 대부분 에카르트 신부의 저작에 실린 것들과는 판이하다. 아마도 당시의 시의성을 고려하여 로트 신부가 새롭게 골라 뽑은 예문들일 것이다. 그래서 대화체 문장에서도 주로 본당 생활이나 신앙 활동에 관련한 내용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로트 신부의 1936년 저작은 단어나 용례를 설명할 때에 모두 한글 자모로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에카르트 신부의 저작이 한국어 어휘나 용례를 모두 로마자로 표기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아마 에카르트 신부 당시에는 한글 자모의 활자를 구하기 어렵거나, 아니면 다른 특수한 목적 때문에 한글로 표기하지 못했던 것에 반해서, 로트 신부의 저작은 덕원 수도원에서 발간되었고, 또 직접적으로 한국에서 활동하는 분도회 선교사들의 한국어 학습을 돕는다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로트 신부의 문법서가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을 꼽으라면, 당대 조선인 학자들의 한국어 문법에 관한 연구들로부터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아서, 1933년의 맞춤법을 신철자법(新綴字法)이라는 이름으로 채택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25) 이처럼 1936년에 한국어 문법서를 펴낸 로트 신부는 1년 뒤인 1937년에 가서 한국어 문법 학습을 위한 참고서로서 한문 독본을 발행하기도 하였다.26) 이 책은 국한문 혼용체의 문장들을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글 단어의 한자별 풀이를 수록하고, 관련 어휘들이 들어 있는 국한문 혼용체 문장들을 제시하여 일종의 한자어 학습서 구실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선교사들의 한국어 연구가 발전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분야는 바로 사전 편찬일 것이다. 즉 한국어 어휘들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게 되면, 이를 활용하는 사전류 저작들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분도회 선교사들의 경우에는 선교 초기에도 사전 편찬이 보이지 않으며, 나중에 가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어와 독일어 또는 라틴어를 등치시키는 각종 사전류를 발간함으로써 한국어에 대한 선교사들의 이해는 크게 증대된다. 이와 같은 중요도에 비추어 볼 때 분도회의 독일인 선교사들이 초기부터 한국어 사전을 발간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발견하기 쉽지 않음은 상당히 의아할 수밖에 없다.

그 대신 당시에 나와 있던 한국어 사전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 치밀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게일의 한국어-영어 사전을 많이 애용하였음을 알려 주는 기록들은 남아 있다. 물론 게일의 한영사전보다는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 특히 리델 주교의 작업으로 나온 《한불자전》을 더 일찍부터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게일의 한영사전이 나오면서 게일의 것을 더 선호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게일의 한영사전은 당시에 나온 한국어 사전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덕원 수도원의 년 연대기에는 1931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어서 이 사실을 입증해 준다.

게일(Gale)의 한영사전 제3판 증보판이 나왔기 때문에 조선어 공부가 이제 더 쉬워졌다는 사실을 후에 올 사람들을 위해 말해둔다. 이 사전은 오래 전에 매진되어서, 쓸 만한 사전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이미 8년 전에 재판이 나오게 되어 있었고, 이미 그 원고가 동경에서 인쇄 중에 있다. 그러나 당시의 지진으로 유실되고 말았다. 새 사전은 1,780면에 75,000개의 조선어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호화판이다. 그렇지만 세상에 완전한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이 사전에도 결점은 있다. 찾는 단어가 발견되지 않는 경우가 가끔 있다.27)

그런데 과연 분도회의 독일인 선교사들이 게일의 한영사전에 만족하고 독자적인 한독사전 내지는 독한사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1913년부터 각종 문법책과 독본들을 발간하면서 상당한 양의 한국어 어휘 수집은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문법책 내에도 각 과별로 단어들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 한국어 어휘들을 집대성하여 종합적인 사전으로 발간하는 작업이 과연 없었는지를 검증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하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자료들 몇 가지를 소개하도록 하겠다.28)

한국어 어휘 수집과 관련하여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은 카니시우스 퀴겔겐(Canisius Kugelgen, 具傑根, 1884~1964) 신부이다. 1911년 1월 6일에 서울 수도원으로 파견된 퀴겔겐 신부는 39년 동안 한국과 연길 등지에 체류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숭공학교와 숭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20년 원산 대목구 신설 이후에는 본당 사목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1928년 연길 지목구가 설정되자 연길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런데 퀴겔겐 신부가 이룬 업적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어휘 수집과 사전 저술이었다. 특히 입국한 지 5년밖에 되지 않던 1915년과 1916년에 이미 한자-한글-독일어 사전을 저술하였다.29) 약 3,000여 개의 한자를 수록하고, 여기에 한국어로 음과 훈을 적고, 그 다음에는 여기에 해당하는 독일어 풀이를 실었다. 이 사전은 한국에 부임하는 신임 분도회 선교사들이 한글과 한문 공부를 할 때 기본 교재로 사용되었다.30)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서문 다음 장에 일반 옥편처럼 부수별로 해당 면수를 기재한 표를 싣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한자-한국어-독일어 사전에 관해서는 일종의 자매편에 해당하는 수고본도 남아 있다. 즉 원음자전(元音字典)이라 하여 《요한덕해》의 하권이 원고 형태로 존재한다. 이것은 3,000자의 한자를 부수별이 아니라 한국어의 가나다 순서로 다시 배열한 것인데, 미처 등사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탓인지 문고판 크기의 공책에 칸을 지르고 깨알같이 육필로 기록하였다. 하지만 상권과 하권에 실린 독일어 해설문의 필체가 상이하기 때문에, 과연 퀴겔겐 신부의 자필인지는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퀴겔겐 신부의 업적은 한자어 사전 저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1924년부터 1928년 사이에 40,000개의 독일어 표제어를 담은 1,350쪽 분량의 독일어-한국어 사전을 저술하여 등사판으로 발간하였다.31) 또한 1931년에는 다시 종교적인 어휘에 치중한 한국어-독일어 사전도 저술하였다고 한다.32) 퀴겔겐 신부가 저술한 이들 사전류의 저작들은 대개의 경우 독일인 선교사들의 한국어 학습을 위한 교재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어 . 어휘 수집은 단순한 실용적인 언어 습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한자-한국어-독일어 사전의 경우에는 한국 문화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문헌 자료들의 해독력을 높이는 일과 연관된 것이며, 독일어-한국어 사전은 양 국가의 언어를 병치시켜 비교함으로써 피선교지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제고하는 데 긴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분도회 선교사들이 한국어에 대한 학습을 위해서건 한국 문화의 심층부를 들여다보려는 진지한 지적 성찰의 작업을 위해서건 간에 한국어에 대한 깊이 있는 사고를 전개하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한국어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 한국어로 이루어진 문화적 구성물들, 즉 한국 문학에 대한 연구로 우리의 관심을 옮겨 보자.

2) 한국 문학 연구

분도회 선교사들은 선교사로서의 기본 자질이자 피선교지 문화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가 되는 한국어 습득을 위해 다양한 노력들을 기울였다. 이와 더불어 한국어로 이루어진 문화적 구성물들, 즉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도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다. 한문학이나 고전 소설과 같이 고도의 언어적 능력을 요구하는 장르에 대해서는 접근하기가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주로 민담이나 설화, 전설과 같은 구비 문학 영역에 집중하였다.33) 이런 이유로 분도회 선교사들은 한국 진출 초기부터 한국의 다양한 민담이나 설화, 신화, 속담 등을 수집하였고, 이를 독일 민속학회지나 기타 선교 잡지에 기고하였다. 아마도 새로운 선교지인 한국의 사정을 유럽에 소개하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한국에 관한 흥미로운 읽을거리들을 제공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가장 먼저 한국의 구비 문학을 수집한 인물은 분도회의 한국 진출을 준비하기 위해서 선발대의 일원으로 내한한 도미니쿠스 엔스호프(Dominicus Enshoff, 1868~1939) 신부였다. 그는 사우어 신부와 함께 1909년 1월 11일 독일을 출발하여 2월 2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두 사람은 학교를 설립하고 수도원을 세울 부지를 물색하였는데, 엔스호프 신부는 7월에 발병하여 1달 정도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8월에 일본을 거쳐서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그러니까 엔스호프 신부가 한국 내에 체류하면서 실질적인 활동을 벌인 것은 1909년 3월부터 6월까지 약 4개월 남짓이었다.

엔스호프 신부는 베를린에서 발간되던 〈민속학회지〉에 1911년과 1912년에 걸쳐서 “한국의 이야기들”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기고하였다.34) 이글에서는 자신이 들었던 한국의 속담, 전설, 민담 등 51가지를 소개하였다. 그는 글의 서문에서 자신이 1909년 한국을 방문한 정보 여행에서 이 이야기들을 수집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1909년 3월부터 6월 사이에 분도회의 한국 진출을 위한 준비 작업을 벌이면서 만났던 여러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들을 듣고 이를 기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엔스호프 신부는 자신의 한국 민담 수집에 도움을 준 것은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과 한국의 방인 사제들이었다고 말한다. 이와 더불어 자신의 통역자였던 부우문(Vou ou moun) 요셉이라는 인물도 거명한다. 한국인들이 해주는 이야기를 이 사람이 한 구절 한 구절씩 프랑스어로 번역해 주었고, 그러는 동안에 자기가 이것을 받아 적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엔스호프가 수집한 51가지 이야기들에는 각각 그 구술자의 이름과 직업, 나이, 거주지가 맨 앞에 적혀 있었다. 구술자의 이름을 보면 대부분이 한국인 신자들이었으며, 간혹 홍병철(루카) 신부, 김성학(알렉시오) 신부, 강도영(마르코) 신부, 김문옥(요셉) 신부 등 방인 사제들과 비에모 신부와 같은 프랑스 선교사의 이름도 보인다.

엔스호프 신부가 한국에서 수집한 이야기들을 독일의 민속학회지에 기고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상트 오틸리엔에서 발간하던 선교 잡지인 〈포교지〉(Missionsblatter)에도 선교지 한국에 관한 기사들이 실리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들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게재한 것도 여러 편 들어 있다.35) 이 기사들의 주된 작성자는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신부였다. 에카르트 신부는 그 밖에도 〈동방의 정신〉(Geist des Ostens)이나 〈성배〉(Der Gral) 등의 선교 잡지들에 한국의 속담, 모내기 민요 등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36) 여기에 덧붙여서 말하자면 에카르트 신부는 이미 한문 해독에도 어느 정도 숙련되었던 모양인지, 조선시대에 대표적인 아동용 한자 교육 교재였던 천자문의 유래에 관련한 설화 한 토막과 250개의 시구절로 이루어진 천자문 가운데에서 초반부 아홉 구절을 번역하여 〈포교지〉에 게재하였다.37) 이러한 노력들을 바탕으로 하여 에카르트 신부는 전술하였던 1923년의 한국어 문법책과 별책 부록에 실린 연습 문장들 속에 한국어의 일상 대화법이나 한국의 풍속 그리고 유교 경전에서 뽑은 구절들과 함께 자신이 수집한 한국의 설화와 민담도 20여 편가량 수록하였다.38)

에카르트 신부가 입국 초기부터 수집한 한국 민담들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간행한 최초의 작품집, 《한국 민담집, 한라에서 백두산까지》는 1928년 상트 오틸리엔의 선교출판사에서 나왔다.39) 서문 7면에 본문 135면으로 구성된 이 저작은 제목 그대로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널리 산재한 민담과 전설, 설화, 민요 등을 망라하여 수집한 것 38편이 실려 있다. 저자에 따르면 1923년의 한국어 문법책에서 발췌식으로 게재하였던 한국 설화에 이어서 극동의 문학에 대한 연구의 일환으로 한국의 우화, 동화, 격언, 시, 설화 등을 발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작 속에 함께 들어 있는 16장의 삽화들은 조선시대 한국인들의 생활 세계를 생생하게 묘사한 풍속화들인데, 단원 김홍도의 그림 10점과 19세기에 활동한 풍속화가 성협(成浹)40)의 그림 6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그림들의 원화는 당시 서울에 있던 조선총독부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것이라고 한다.41)

에카르트 신부가 민담을 수집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구술자들이 누구였는지는 그의 서문에 잘 밝혀져 있다. 서울의 김봉제, 대구의 오창식, 미리내의 강도영 신부, 함흥의 박조학, 원산의 오평주, 제주의 고영필 등에게서 이야기들을 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38편의 이야기들이 각각 누구의 구술을 받아 적은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에카르트 신부는 20여 년이 지난 뒤인 1950년과 1955년에 가서 《오동나무 밑에서》와 《산삼》이라는 제목으로 민담집을 간행하였다.42) 이 두 민담집은 대부분 1923년 한국어 문법책과 1928년의 한국 민담집에 실렸던 것들을 다시 엮은 것이었다. 이 책들에서는 구체적으로 구술자의 이름들이 거명되고 있다. 대부분 에카르트 신부가 처음 한국에 도착하여 한국어를 배웠던 선생들인 김봉제, 오창식, 유염조, 권계량 등이 들려준 이야기였다고 한다.43)

엔스호프 신부나 에카르트 신부를 비롯하여 분도회 선교사들은 왜 한국인들의 민담이나 설화들에 관심을 가지고 수집하였을까? 한국인들의 심성과 문화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언어생활 속에 깃들어 있는 문학적 상상력의 흔적들을 살펴야 한다는 생각하였던 것은 아닐까? 이렇게 본다면 아무래도 선교사들이 행한 민담 수집은 그보다 한 세기 전에 시작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림 형제의 작업과 결부지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즉 특정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과 원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주민들이 구비전승의 형태로 보존하고 있는 다양한 신화, 설화, 민담 등을 수집하여 연구해야 한다는 사고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는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이미 지적하였던 문화(Kultur) 개념의 형성에 관한 독일적 사고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앞에서 간단히 논의하였지만 문화투쟁기를 거치면서 분도회 선교사들이 체득한 문화적 관념과 어느 정도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3) 한국 예술 연구

분도회 선교사들의 한국문화 연구 가운데에서도 가장 수준 높은 완성도를 보인 것은 한국 예술에 관한 연구였다. 이 방면에서는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신부의 노작들이 단연 돋보인다고 하겠다. 앞서 보았듯이 에카르트 신부는 한국어 문법 연구, 한국 민담 수집 등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한국의 미술과 음악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들을 내놓았던 것이다. 에카르트 신부가 음악과 미술 등 예술 분야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일화들이 있다. 먼저 그는 독일의 뮌헨에서 화가이자 김나지움의 미술교사였던 아버지와, 음악과 언어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 때문에 훗날 대학교수가 된 에카르트의 제자이자 대표적인 독일의 한국학자인 후베(Huwe)는 “한국에서의 연구 활동을 위하여 에카르트는 가장 최상의 도구를 가지고 왔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요람에서부터 뛰어난 예술적인 재능을 부여하였다. 그의 아버지 요한 니콜라우스 에카르트는 화가이자 미술 교수였으며, 그의 어머니 바르바라 에카르트는 그에게 음악적인 재능과 언어적인 재능을 주었다”라고 술회하였다. 또한 1899년부터 상트 오틸리엔과 딜링겐에서 뮌헨의 인문계 김나지움을 다니던 시절부터 에카르트의 타고난 예술적 재능은 널리 인정받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그는 뮌헨의 막시밀리안 김나지움 합창단의 독창자로 활약한 적도 있었다는 것이다.44)

에카르트 신부의 한국 문화 연구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최초의 한국 미술 통사’로 평가받는 저작을 내놓았다는 점이다.45) 1929년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간행된 에카르트 신부의 《한국미술사》46)에 대한 미술사학계의 평가는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20세기에 접어들어서 도약의 시대를 맞았던 세계 미술사 연구의 새로운 경향과 결부되어 있었다. 즉 중앙아시아 고고미술품에 대한 서구 열강의 발굴과 더불어 이루어진 이론적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 미술사를 조명하는 시야를 넓혔다는 것이다. 실제로 에카르트 신부는 독일의 알베르트 그륀베델, 알베르트 본 르콕 등의 발굴 성과를 직접적으로 섭렵함으로써 고대 한국 미술의 외래적 영향을 보다 폭넓은 시야에서 해석하였다. 둘째, 《한국미술사》가 담고 있는 500여 점에 이르는 방대한 국내외 도판자료들이 주로 거론된다. 에카르트 신부는 이 자료들의 수집을 위해 세계의 주요 박물관을 답사하였고, 여러 박물관들과 정보를 교환하였다고 한다. 특히 건축물과 유적들 중에는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사료적인 가치도 매우 높다고 하겠다. 셋째, 에카르트 신부의 《한국미술사》는 도자기를 포함하여 공예품에도 많은 비중을 할애하여 다루었다. 미술사에서 ‘마이너 아트’의 개념이 사실상 종식된 것은 20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활동했던 양식론자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e)에 의해서 성취된 것이었다. 리글은 공예품에 나타난 문양에 주목하면서 미술에서 공예의 위상을 상대적으로 높였던 것이다. 이와 비교할 때 에카르트 신부의 《한국미술사》가 공예품을 다룬 것은 일제 강점기의 시대적 취향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근대적인 미술사의 안목을 성취한 것은 높이 살 만하다는 평가이다.

또한 에카르트 신부는 《한국미술사》의 ‘서론: 조선 미술’과 ‘결론: 조선 미술의 특질’에서 독창적인 시각에서 조선의 본질적인 성격을 지적하였다. 그에 따르면 조선 미술의 특질은 ‘단순성’ 혹은 ‘간결성’이라고 한다. 그는 과장과 왜곡이 없는 상태를 ‘자연스러움’이라 개념화하는데, 이때 자연스러움은 ‘평상시의 단순성’ 또는 ‘과욕이 없는 상태’와 등가를 이룬다고 한다. 따라서 ‘단순성’이란 ‘소박성’과도 통하며, ‘단아함’과도 연결되는 특질이다. 특별히 에카르트 신부는 ‘소박성’을 새로운 미술사적인 개념으로 제시하며, 미술의 모든 장르에 적용하여, 간결미와 소박미를 ‘고전적인 성격’으로까지 격상시킨다. 그래서 에카르트 신부가 제시한 ‘단순성’과 ‘고전미’ 개념은 줄곧 주목을 받았으며, 한국 미술 연구자들의 한국 미술사 연구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47) 에카르트 신부는 중국과 일본의 미술에 대비할 때 조선 미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과거 조선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그것들이 평균적으로 세련된 심미적 감각을 증명하고 있으며, 절제된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동아시아 미술 분야에서 직접 조선 미술의 발달 과정에서 한 특징을 이룬다. … 때때로 과장되거나 왜곡된 것이 많은 중국의 예술 형식이나, 감정에 차 있거나 형식이 꽉 짜여진 일본의 미술과는 달리, 조선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가장 고전적이라고 할 좋은 작품을 만들어냈다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 결국 조선은 항상 아름다움에 대해 자연스러운 감각을 지니고 있으며, 그 아름다움이 극치를 이룰 때 그것을 고전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48)

그런데 한국 미술, 특히 조선시대의 회화 작품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그 화풍을 주의 깊게 관찰하였던 또 한 명의 분도회 선교사가 있었다. 사실 그는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가 아니었다. 다름 아니라 분도회의 한국 진출을 결정하고 또 선교 사업의 진척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잠시 한국 선교지를 순시하였던 독일 상트 오틸리엔 대수도원의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1956) 총아빠스였다.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2월에 한국을 방문하여 그해 6월까지 약 4개월 머물면서 국내의 여러 곳을 둘러보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1914년에 조선 여행기를 간행하였다.49) 그 뒤 베버 총아빠스는 1925년에 다시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이 당시 금강산을 유람하고 그 내용을 여행기로 남겼다.50)

금강산 여행기에 따르면, 베버 총아빠스는 1925년 6월 7일 유점사를 구경하고 오후에 온정리에 있는 일본 여관에 도착한다. 베버 일행은 여관에 묵고 있던 어느 일본 화가의 초대를 받아 일본 화풍으로 그린 금강산 그림들을 구경한다. 베버 총아빠스는 이 일본풍의 금강산 그림과 어느 조선 화가의 금강산 그림을 비교하는 내용을 금강산 여행기에 기록하였다. 일본인 화가가 금강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양식화한 것에 반해서, 조선 화가의 그림은 실제로 생기 있게 살아 있는 내금강의 전체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그림 기법이나 명암의 효과 면에서는 일본 화가의 그림이 더 낫다고 평가한다. 그렇지만 금강산의 전체적인 특성을 잘 재현하는 데에는 한국 화가가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한다.

베버 총아빠스의 금강산 여행기 앞부분에 있는 도판들 가운데에 제1번 도판은 이 문제의 일본 화가가 그린 그림이고, 제2번 도판은 베버 총아빠스가 비교하였던 한국 화가의 그림이다. 그리고 제24번 도판은 동일한 한국 화가가 그린 구룡폭도(九龍瀑圖)이고, 제25번 도판은 앞서의 일본 화가가 그린 구룡폭포 그림이다. 문제는 이 한국 화가의 그림이라고 소개된 2폭의 그림이 바로 겸재 정선의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1974년에 어느 독일 유학생에 의해서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선교박물관에서 발견되어 1976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51) 당시 발견된 정선의 그림은 모두 21점으로 중국의 고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 14점, 불교적인 주제를 다룬 것이 1점, 그리고 진경산수화 6점이었다.52) 그 뒤에 이 작품들에 대한 베버 총아빠스의 논평을 토대로 하여 한일회화의 비교분석론을 전개한 연구도 제출된 바 있다.53)

그러나 아직 겸재 정선의 그림 21점을 수집한 인물이 누구이며, 언제 어떤 경로를 거쳐서 취득하였는지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베버 총아빠스 역시 자신의 금강산 여행 도중에 구경한 일본인 화가의 그림을 논평하면서 정선의 그림을 제시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베버 총아빠스 자신이 1925년 여행 도중에 정선의 그림을 구입하였던 것인지, 아니면 독일로 귀환한 이후에 수도원에 보관된 그림을 보고 여행기에 삽입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현재 정선의 그림 21점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측에서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에 영구임대 방식으로 사실상 반환하였다. 앞으로 이 그림들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소장하게 된 경위에 관한 연구가 더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분도회 선교사들의 한국 예술 연구 가운데에서 한국 미술에 대한 연구와 미술품 수집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소개하였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한국 음악에 대한 연구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방면의 연구에서는 에카르트 신부의 작업이 독보적이다.54) 그러므로 본 절을 끝내기에 앞서서 에카르트 신부의 한국 음악에 대한 연구를 간략하게 소개하도록 하겠다.

한국의 전통 음악에 대한 에카르트 신부의 연구는 일찍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55) 그러나 본격적인 연구물을 간행한 것은 1930년에 출판된 《한국의 음악》이 처음이었다.56) 그리고 나중에 가서 1968년 뮌헨 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하는 시절에 한국의 춤에 대한 연구를 보완하고 기존 내용도 증보하여 《한국의 음악과 노래와 춤》이라는 제목의 저서를 출간하였다.57) 1930년에 나온 《한국의 음악》은 아마도 서양어로 된 최초의 한국 음악 연구서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머리말 2면에 본문 63면으로 구성되어 비교적 소략한 내용일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그 내용을 보면 상당히 많은 정보를 압축적으로 모아놓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 장별로 구체적인 내용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도록 하겠다.

먼저 제1장은 동아시아의 음악을 그 문학, 철학, 종교와의 맥락 속에서 전체적으로 개괄한다. 그런 다음에 제2장에 가서는 《두우》(杜佑)나 《통전》(通典) 등 중국의 고전을 토대로 하여 음조의 구성 법칙을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다. 심지어 궁상각치우 5음 사이의 비례를 아라비아 숫자로 환산하여 제시하기도 한다. 제3장에서는 한국 음악의 기본 범주를 제례악(祭禮樂), 연례악(宴禮樂), 민악(民樂)의 세가지로 제시하였다. 그런 다음에 제례악의 범주 속에서 보태평심곡(保太平心曲), 정대업지곡(定大業之曲), 풍안지곡(豊安之曲), 옹안지곡(雍安之曲), 흥안지곡(興安之曲) 등을 각각 해설하였다. 그리고 연례악에서는 태평춘지곡(太平春之曲), 승평만세지곡(昇平萬歲之曲),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曲), 경록무강지곡(景록?無疆之曲), 기수영창지곡(其壽永昌之曲), 봉황음(鳳凰吟), 수제천지곡(壽齊天之曲), 표정만방지곡(表正萬方之曲), 취태평지곡(醉太平之曲), 일승월항지곡(日昇月恒之曲), 수연장지곡(壽延長之曲), 송구여지곡(頌九如之曲), 무령지곡(武寧之曲), 만년장환지곡(萬年長歡之曲), 요천순일지곡(堯天舜日之曲) 등 15가지 노래를 소개하였다. 마지막으로 민악의 범주에서는 흥미롭게도 처용가, 정읍사, 가시리, 망향가 등을 한문 또는 한글 원문, 로마자 발음, 독일어 해석 등의 순서로 싣고 있다.

제4장에서는 짤막하게나마 한국음악사를 개괄하는데, 중심적으로는 삼국사기 등에 실린 가무에 관한 기록, 유명한 예인들, 장례원 등 정부 기구 등을 소개하고 있다. 제5장은 한국의 악기에 대한 소개이다. 금속악기인 특종(特鐘)에서 시작하여 양금(洋琴)까지 도합 68개의 악기들을 실물 사진이나 연주 장면이 담긴 사진과 더불어 설명하였다. 제6장은 기보법에 대해서, 그리고 제7장은 합주나 합창, 군무에 대한 언급을 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록에서는 문묘제례악, 종묘제례악, 춘곤가, 소요가, 만대엽, 망향가, 담바구야, 방아타령 등 모두 아홉 곡의 국악과 민묘 선율을 채록해 놓았다.

음악적인 창작력도 뛰어났던 에카르트 신부는 한국을 떠난 뒤에 총 21개의 곡을 작곡하였다. 특히 그는 뮌헨 대학교의 한국학 교수로 정년하고 고향 슈타른베르크에서 여유있게 작곡 활동을 하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제20번 ‘우정 심포니’와 제21번 ‘코리아 심포니’는 모두 한국의 전통 음악(‘노세 노세’, ‘방아타령’, ‘아리랑타령’, ‘애국가’ 등)을 소재로 만들었으며, 한국에 헌정하는 것이었다. 에카르트의 한국 헌정 음악은 그 자체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그가 선교사 시절에 채집하였던 민요와 전통 음악을 주선율로 채택하고 있다는 점 역시 중요한 분석 작업을 요한다고 하겠다.58)

4) 한국 민속 연구

피선교지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주된 임무는 신자들 사이에서 성사를 거행하고 신입 교우들의 신앙생활을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아직 신자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본당 사목을 중심 활동 영역으로 하지 않고, 수도원을 세워 수도 생활을 널리 보급하면서 아울러 사범학교나 기술학교 등을 세워 교육 활동을 전개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였던 분도회 선교사들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당시 한국인들의 생활 세계와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분도회 선교사들이 남긴 다양한 기록들 속에는 한국인들이 영위하던 민속 문화에 대한 관찰과 연구의 흔적들이 많이 발견된다. 만약 선교사들이 한국에서의 생활 과정에서 겪었던 사소한 체험들에 대한 기록들까지 다 합친다면 어쩌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한국 민속에 대한 관찰과 묘사들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각종 선교 잡지에 실린 여행 보고문, 활동 보고서, 신변잡기 등등에서 당시 한국인들의 삶에 대한 묘사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59)

사실 한국 문화에 대한 전문성을 띤 연구물들은 1910년대부터 1920년대 사이에 집중적으로 나왔다. 하지만 백동 시절을 정리하고 덕원으로 옮겨가면서 본당 중심의 사목 활동에 나선 이후에는 분도회 선교사들의 모든 노력은 일차적으로 일선 사목에 집중되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의 한국 문화 연구라고 일컬을 만한 역작들이 나오지는 않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한국인 신자들과의 접촉이 증대된 만큼 선교사들의 일상생활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생활 문화에 대한 관찰과 묘사는 더욱 증가하였다.60) 이 때문에 한국 민속에 대한 분도회 선교사들의 관찰과 연구, 인식 태도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방대한 양의 자료들을 섭렵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가장 특징적인 몇 가지 사례만을 간단히 소개하는 것에 그치고자 한다.

한국 민속에 대한 뚜렷한 관심을 가지고 광범위한 영역을 섭렵한 대표적인 사례는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였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서 한국을 여행하고, 관련 여행기와 일기, 그리고 각종 풍속 관련 기록 사진과 기록 영화들을 남겼다. 한국어 문법서, 한국어 민담집, 그리고 한국 미술사 및 한국 음악에 관한 저술들을 간행하여 분도회 선교사들의 한국 문화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신부는 자신의 저서를 간행할 때마다 베버 총아빠스에게 헌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하자면,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였다는 점에서 베버 총아빠스가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의 문화 의식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911년 2월 22일 상트 루트비히(St. Ludwig) 수도원의 포겔(Vogel) 원장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베버 총아빠스는 6월 24일까지 약 4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서울의 백동(栢洞, 현 혜화동) 수도원과 명동 대성당을 비롯하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하우현(下牛峴), 수원(水原), 안성(安城), 공주(公州), 해주(海州), 신천(信川), 평양(平壤) 등 유서 깊은 교우촌과 명소를 두루 여행하였다.61) 이때 그는 한국의 전통 문화와 풍습에 심취하여 전국의 유명한 사찰이나 기타 상혼상제의 예식이 거행되는 곳을 자주 찾아 이를 자세히 관찰하고 기록하였을 뿐 아니라, 사진과 그림으로도 남겼다. 베버 총아빠스는 독일로 돌아가서 한국 여행 중에 겪었던 여러 가지 경험과 견문을 바탕으로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제목의 여행기를 1915년에 간행하였다. 이 책에서 베버 총아빠스는 총 450쪽에 걸쳐서 한국의 풍속 혹은 민속, 민간 신앙, 불교 문화, 분도회의 선교 활동 등을 소개하였다. 또한 이 책에는 290여 장의 흑백 및 컬러 사진을 수록하여, 1910년대 한국 천주교회의 상황 및 한국 문화의 단면들을 보여 주었다.

10년 뒤인 1925년 5월 14일에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고 유럽에 소개할 목적으로 촬영 기사까지 대동하고 다시 입국하였다. 그는 당시 분도회의 관할 지역이었던 함경도와 북간도, 그리고 금강산을 비롯한 여러 지역을 여행하였는데, 이때에 한국의 특징적인 문화와 분도회의 전교 활동상을 담은 기록 영화를 제작하였다.62) 그런데 당시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필름들은 나치 정권의 배타적 아리안주의와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발생한 정치적 혼란들 때문에 파괴될 우려가 있었다. 이 때문에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수도원 창고에 벽을 쌓고 그 속에 베버 총아빠스의 필름들을 숨겨 놓고 전쟁터로 나갔다. 필름을 갈무리한 수도자들은 모두 전사하였고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그 필름들은 잊혀졌다. 그러다가 1978년 수도원에서 창고를 수리하던 도중에 필름이 보관된 상자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1998년에 또다시 벽을 허물다가 필름이 추가로 발견되었다.63)

이 두 번의 창고 수리 과정에서 발견된 필름들은 모두 합쳐서 15㎞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그 속에는 1910년대와 1920년대 식민지 한국인들의 일상생활과 전통 문화, 민간 신앙 등에 관한 귀중한 모습들이 담겨 있었다. 35mm 필름으로 된 이 기록 영화들의 전체 내용은 현재까지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중에서 일부 필름만이 ‘베네딕도 미디어’에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120분 분량의 VHS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뿐만 아니라 현재 서울시 종로구에 소재한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상설전시관 제2 전시실 ‘한국인의 일상’에서 베버 총아빠스의 기록 영화에 삽입되어 있는 베짜기 장면을 약 10분 분량으로 상영하고 있다.

이처럼 베버 총아빠스의 기록 영화는 오늘에 와서 귀중한 민속학적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일부 공개된 필름의 경우에도 언제 어디에서 촬영된 것인지를 명확하게 표기하고 있지 않아서 고증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관찰자로서 촬영한 것인지, 아니면 다분히 작위적인 요소가 개입된 연출된 장면인지 모호한 경우가 더러 보인다. 아마 베버 총아빠스의 여행 일기를 세부적으로 분석하여 필름 영상과 대조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1920년대 한국인들의 일상생활에 관한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즉 여행 일지와 필름에 나오는 장면들을 대조하여 그의 여행 일정을 추적하고 실제 내용들이 어느 지역의 어떤 민속 관행들을 촬영한 것인지, 혹은 어떤 방식으로 재현한 것인지를 분석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작업은 한국의 민속 문화와 한국인들의 일상 세계를 바라보는 베버 총아빠스의 시선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분석하는 데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 본다. 말하자면 당시 독일의 민족학 내지 인류학의 일반적인 경향과 관련지을 때 베버 총아빠스의 작업이 지닌 의미를 보다 더 선명하게 포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분도회 선교사들의 한국 민속에 대한 연구 내지는 관찰 기록과 더불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물질 민속에 속하는 물품들의 수집 활동이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은 이미 1911년에 선교 박물관을 설립하였다. 이 박물관은 1887년 수도원이 개원한 이래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선교지에서 수집한 민속 공예품들과 동물 박제품, 곤충 채집품 등 해당 선교 지역의 자연, 지리, 민속 문화 연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물품들을 전시하였다. 1910년대 이후에는 한국과 만주 등 아시아 선교지에서 민속품과 예술품들을 수집하여 소장하고 있다. 주로 도자기나 식기 등 생활용품들이 많으며, 불상, 조각품, 서적, 목판, 제사용 물품, 악기 외에도 무기, 의상 등 다양한 분야의 수집품을 보유하고 있다.

바티칸의 민족-선교 박물관이 1925년에 열린 선교 박람회에 출품된 물건들을 토대로 하여 1926년에 설립된 것에 비교한다면,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이 이미 1911년에 선교 박물관을 만든 것은 대단히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일로서 사실상 유례가 없던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것은 분도회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화에 대한 관념을 보여 주는 것이면서, 아울러 피선교지의 문화에 대한 인식 태도를 반영한다고 하겠다.

한국에서 활동하거나 한국을 일시적으로 방문하였던 분도회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수집한 한국 민속에 관련한 물품들을 대개의 경우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선교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처음 한국을 방문한 도미니쿠스 엔스호프 신부, 베버 총아빠스, 에카르트 신부, 퀴겔겐 신부, 보니파치우스 사우어 주교 등이 주된 수집자들이었다. 특히 베버 아빠스가 1912년과 1925년에 수집한 민속 공예품과 도자기 등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앞서 언급하였던 겸재 정선의 화첩 역시 이 선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한국의 왜관 수도원으로 반환되었다. 최근의 어느 조사에 따르면 이 선교 박물관에 소장된 한국 문화 관련 물품들의 총 수효는 559건 626점이라고 한다.64) 많은 경우에 수집자와 수집 연대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65)

그 밖에도 여러 분도회 선교사들이 한국 민속품 수집 활동에 보인 열정들은 실로 놀라운 바가 있었다. 예를 들어 프리돌린 치머만(Fridolinus Zimmermann, 閔德基, 1900~1946) 신부는 빈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 출신의 선교사로서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선교 박물관을 훌륭하게 구성한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1931년에 한국으로 파견된 치머만 신부는 회령 본당, 원산 본당 등지에서 활동하였는데, 한국의 민속품 수집과 한국 고대사 연구에 열정을 쏟았다.66) 치머만 신부가 볼프람 피셔(Wolframus Fischer, 1903~1938) 신부의 후임으로 원산 본당에 부임할 당시 원산 본당 연대기에 따르면, 치머만 신부는 20개의 짐을 가지고 부임하여 그것으로 조선 민속 박물관을 꾸몄다고 한다. 그가 수집한 한국 민속 관련 물품들은 1천여 점에 달했다고 전해진다.67) 그는 회령에서 약간 떨어진 계림 준본당에서 활동하다가 1946년에 선종하였는데, 치머만 신부가 생전에 수집하였던 상당량의 민속자료들이 해방 공간의 혼란기에 평양의 모 대학에서 이관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현재 그 행방은 알 수가 없다. 앞으로 분도회 선교사들의 한국 민속에 관한 문헌 연구뿐만 아니라 그들이 수집한 민속 자료의 행방을 조사하는 작업도 아울러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5) 한국 종교 연구

분도회 선교사들이 한국의 종교 문화에 대해서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 또는 어떠한 인식 태도를 보였는가 하는 문제는 앞서 살펴보았던 한국어, 한국 문학, 한국 예술 그리고 한국 민속에 대한 이해와는 몇 가지 점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영역들을 포괄하고 있다. 먼저 선교사들이 관광 여행이나 소풍 등 여가 시간에 마주치게 되는 한국의 종교 문화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일종의 구경거리로서 종교 유적이나 종교 유물, 혹은 종교 생활들을 대면하게 된다. 말하자면 선교사들이 유원지를 관람하는 입장에서 단순한 종교적 경관으로 한국의 종교 문화를 바라보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본당 사목에 전념하지 않았던 1910년대와 1920년대의 분도회 선교사들이 선교잡지에 실은 글들에서 주로 목격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시선들이다. 어느 익명의 필자가 서울에서 유럽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유원지의 하나로 소개하는 ‘흰색 불상’ 이야기, 그리고 카니시우스 퀴겔겐 신부나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신부 등이 불교 사원을 방문하였던 경험을 소개한 글 등이 그러한 경우이다.68)

하지만 현실에서 살아 있는 한국의 종교 문화들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분도회 선교사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즉 선교의 경쟁자이자 복음의 적대자들로서 한국의 종교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한국의 여러 종교들, 즉 불교나 유교 또는 동아시아의 전통 민간 신앙을 배타적인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을 보일 수 있다.69) 반면에 그 대척점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역사와 현재의 교세 성장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는 태도가 가로놓이게 된다.70) 또한 선교의 목적으로 선교 지역의 종교 분포나 종교 통계를 작성하는 경우도 가끔 발견된다.71) 그런데 만약 분도회 선교사들이 남긴 자료에서 한국의 여러 종교들에 대한 적대적 사고의 흔적들이 그렇게 빈번하게 등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지도 분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분도회 선교사들의 한국 종교 연구에서는 당시 현존하던 한국의 종교들에 대한 그들의 인식 태도도 함께 다루어야 할 것은 분명하다.

분도회 선교사들의 한국 종교 연구에는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영역이 남아 있다. 그것은 분도회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이 뿌리내린 토양을 발견하기 위하여 한국의 전통 종교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단순한 구경거리로서의 종교적 경관에 관심 가지거나, 선교 활동에서 대면하게 되는 잠재적 적대세력으로서의 한국 종교들을 비판하려는 목적을 띠고 있지는 않다.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종교성을 정확하게 파악함으로써 한국에서의 천주교 선교가 지니는 가능성과 장래 전망을 모색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나 유교, 또는 한국 고유의 하늘 신앙에 대한 분도회 선교사들의 글들 가운데에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작성되었거나 어느 정도 학문성을 갖춘 경우들을 발견된다. 가령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신부와 토마스 옴 신부와 같은 경우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72) 특히 토마스 옴(Thomas Ohm, 1892~1962) 신부는 한국 파견 선교사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대학교,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및 뮌스터 대학교 등지에서 선교학을 가르쳤던 학자였다. 그는 1927년부터 1928년까지 한국을 방문하였으며, 1936년에도 다시 한 차례 한국을 방문한 바 있었다. 이러한 방문 경험을 바탕으로 옴 신부는 한국 종교에 관한 여러 편의 글들을 집필하였던 것이다. 옴 신부는 한국을 위시한 아시아 교회와 전통 종교의 상호성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켜 1940년대 후반부터 토착화 신학의 가능성을 제창하였다.73) 이렇게 본다면 분도회 선교사들이 한국 종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것은 선교와 문화에 대한 정복주의적 패러다임과는 사뭇 다른 지형 위에 있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덧붙여서 분도회 선교사들이 지닌 또 다른 특성도 감안해야 한다. 즉 수도자 생활을 본연의 임무로 하는 수도 단체이기 때문에 유사한 수도 전통을 지닌 한국의 특정 전통 종교에 대해서는 상대적인 친근감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수행승 제도를 가지고 있는 한국의 불교에 대한 분도회 선교사들의 관심과 호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태도를 가장 잘 보여 준 것은 앞서 언급하였던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의 1915년 여행기와 1927년 여행기에 나오는 불교에 관한 묘사들이다.74) 이하에서는 1927년 금강산 여행기에 나타난 베버 총아빠스의 한국 불교 인식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1925년 제2차 한국 여행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갔던 베버 총아빠스는 금강산을 배경으로 조선의 불교와 예술을 소개하는 《한국 금강산에서》(In den Diamantenbergen Koreas)를 저술하여 1927년에 간행하였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와 관련 기록 영화에서 1910년대와 1920년대 조선인들의 일상생활과 전통 문화, 민간 신앙 등에 관한 귀중한 자료들을 실었던 그는 《한국 금강산에서》에서 금강산의 자연 지리적 풍광을 예찬하는 글과 겸재 정선의 금강산 화첩 및 어느 일본인 화가의 금강산 수묵화, 그리고 본인의 금강산 소묘 그림을 수록하는 한편, 조선의 불교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내용들을 기록하였다.

베버 총아빠스에 따르면, 금강산 여행을 함께 한 일행들은 베버 본인, 카누투스 다페르나스(Canutus d’Avernas, 羅國宰, 1884~1950) 신부, 하인, 그리고 서울의 분도회 수도원과 친분을 가지고 있던 독일인 헨켈씨 부부 등이었다고 한다. 그는 금강산 여행의 목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의 자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산 속의 ‘불교 성전’을 보길 바라며 산행을 했다. 머나먼 북쪽의 낯선 땅에서 들어와 조선 왕조의 탄압을 피해 누구도 쳐들어오기 힘든 천연의 요새인 이곳에다 스님들은 거처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율곡 이이의 시를 인용하여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극찬하였다. “금강산에 들면 선비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수려함에 빠져 조물주의 걸작품에 깃든 정신 세계는 잊어버린다.”75) 그러면서 베버 신부는 찬란했던 조선의 불교 문화가 급격히 쇠퇴하게 된 원인을 16세기 말 일본의 침략과 부를 쌓기 위해 벼슬자리를 사고팔던 조정의 부패한 정치 탓이었다고 보았다. 베버 신부와 일행은 1925년 6월 2일 화요일에 금강산의 장안사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베버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행문을 기록하였다.

세속을 떠나 깊은 산 속의 정적을 찾은 이들에게 한 때 거처가 되었던 이곳은 이제 폐허로 변해 있었다. 지붕에는 이끼가 무성하고 서까래는 썩어 있었으며, 기와들은 불에 그을려 있었다. 이 모든 정경이 암자의 적막과 이곳을 혹독하게 몰아쳤던 겨울을 말해주는 듯했다. 세상의 물욕을 벗어던진 이들이 깊은 명상에 잠길 때 살을 도려내는 추위가 이곳의 문틈을 통해 파고들었으리라. 한 인간으로서 자연스런 생활마저 극기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대하면 불교에 대한 경외감을 금할 수 없다. 당시 석가모니가 제자들에게 보인 모범과 엄격한 규율은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선원(禪院)의 규율이 완화되기는 했지만, 부처의 큰 도를 닦으려는 도덕적 의도는 곧이곧대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약함과 변화무쌍함 속에서도 인간의 의지를 수천 년 동안 이토록 아름답고 고귀하게 지속시켜 나가는 불심에 우리는 그저 경탄할 따름이다. … 기독교 수도자들의 수행은 영원한 광명으로 하느님과 가까이 하려는 데 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즉 20세기를 살아가는 수도자들의 수행은? 머나먼 타국의 깊은 산 속 수행자들의 높은 뜻을 우리도 본받게 되기를!76)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베버 신부는 조선의 여타 종교들 중에서도 유독 불교에 대해서 친근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자신이 속한 분도회가 수도 생활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였던 만큼, 수행승을 위주로 한 조선 불교에서 공통 요소를 발견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모습은 베버 신부 일행이 6월 5일 금요일에 보문암이라는 비구니 암자에 도착하여 기록한 감상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감상에서는 불교 수행승 집단과 가톨릭 수도회의 피상적인 친연성을 넘어서, 보문암이라는 고독한 수행처에서 자신들 수도회의 과거 역사를 회상하는 모습까지 등장한다.

깊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와 도를 닦는 이곳 비구니들의 생활은 단조롭기 그지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 표정들에는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세속을 떠나 도를 닦는 바로 이 생활이 그들을 행복케 하는 모양이었다. 불공을 통해 부처님에게 정성스럽게 보시를 하는 일이 하루의 중요한 과제였으며, 작은 밭을 일구어 채소를 가꾸거나 원시적인 베틀에 앉아 무명과 삼으로 베를 짜는 것이 반복된 생활에서의 변화라면 변화였다. 매일, 매년 같은 일을 하면서 그들은 스스로 찾아야 할 평화를 위해 울창한 숲속에 파묻혀 있는 이 암자에 기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젊고 혈기왕성한 베네딕도는 깊디깊은 아니오 계곡으로 든다. 그는 몬테 카시오라는 산골짜기에서 외로운 은둔 생활을 시작한다. 그의 친자매인 스콜라스티카 성녀 역시 세속을 떠나 그 산 아래에서 그의 지도로 수도생활에 들어간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있던 나는 어느새 이탈리아의 오랜 역사를 더듬고 있었다.77)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이처럼 베버 총아빠스가 자신의 여행기 《한국 금강산에서》를 통해서 보여 주는 불교의 수행승 전통에 대한 호감은 동아시아 천주교회의 선교 역사에서 대단히 혁신적인 면모라고 생각된다. 마테오 리치를 위시하여 중국에 진출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불교가 처한 열악한 사회적 위치를 깨닫고 유교 지식인과의 접촉을 더 중시하였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해 시절에 활동을 시작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한국 불교가 국가의 탄압으로 거의 하층민으로 전락하여 한국인들로부터 정신적인 면에서 그다지 존경받고 있지 못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반해서 분도회는 한국의 전통적인 가치관 혹은 종교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공존의 대상으로 존중하기 위하여 영성적인 면에서 대화할 상대방을 찾고자 하였으며, 그 일차적인 대상으로 부각된 것이 바로 불교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베버 총아빠스의 여행기 사례에서만 일회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분도회의 한국 선교와 문화 활동이 지향한 선교 패러다임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에, 여전히 현재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78) 그러면 이제 장을 바꾸어 분도회 선교사들이 보여 주었던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 활동을 전체적으로 평가하면서 그 의미를 선교와 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관점으로 조명해 보도록 하자.


4. 선교와 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하기

이제 새로운 질문을 던져 보자. 왜 독일에서 온 분도회 선교사들은 피선교지 조선의 전통 문화를 연구하는 데에 관심을 가졌을까? 선교 활동을 원활하게 수행하는 데 기초적인 수단인 한국어와 한국의 지리에 관해서 지식을 습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한국어의 문법 구조를 분석하거나 한국의 설화와 민담들을 채록하고, 미술과 음악 등 한국 예술의 역사를 연구하고, 예술품이나 민속 공예품들을 열정적으로 수집하는 한편, 한국의 민속과 종교 사상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이유는 무엇일까? 독일 선교사들이 보였던 관심과 열정은 그 이전 시기부터 한국에서 활동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경우와 비교하면 그 독특성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프랑스에서 온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1836년부터 100여 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한국에서 사목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그들은 독일 선교사들처럼 그렇게 체계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한국의 문화를 연구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다. 물론 박해시절에는 그러한 연구 활동을 전개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개항과 더불어 선교 활동의 자유가 주어진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극소수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한국의 식물을 연구한다거나, 한국 교회의 순교자 역사에 관련한 문헌 자료들을 수집하기는 하였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오로지 일선 본당에서 한국인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목 활동을 벌이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볼 때 프랑스 선교사들은 피선교지 문화 연구에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고 보아도 크게 벗어난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프랑스 선교사들과 비교했을 때 독일 선교사들이 보여 주었던 한국 문화 연구의 열정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주장을 담은 연구가 제출된 바 있다. 주로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의 한국 여행기를 분석한 이 연구는 한국 문화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베버 총아빠스의 관심과 인식 태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이에 따르면, 베버 총아빠스는 식민지 한국 사회에서 근대화의 과정이 시작되면서 과거 전통 문화에 속한 요소들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음을 발견하자, 이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에서 그것들을 기록하고 수집하고 보존하려는 열망이 보였다. 그 바탕에는 뛰어난 문화 민족인 조선에 대한 존경과 한국 교회가 지닌 순교자 역사에 대한 경의의 감정이 있었다. 아울러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 사회의 풍습과 전통에서 그리스도교 선교의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열의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리스도교 선교를 서양화로 보지 않고,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와 가치, 덕목을 교회 내에 받아들여서 융합시키고자 하는 의지에서 한국 문화를 연구하였다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서 비신자들을 선교와 교육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을 벗어나서, 문화를 창조하는 주체로서 진지하게 대하며, 선교사 자신도 그들의 가치와 덕목을 받아들여서 가꾸어야 한다는 상호적인 관계에 대한 생각이 베버 총아빠스의 선교 관념 속에 깃들어 있었다고 한다.79)

물론 베버 총아빠스 개인에게 적용된 위의 분석과 평가가 곧바로 한국에서 활동한 분도회 선교사들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80) 섣부른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베버 총아빠스의 선교 방침과 피선교지 문화에 대한 관심을 그대로 구현한 대표적인 인물들을 들자면,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신부나 토마스 옴 신부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베버 개인의 생각을 넘어서 당시 분도회 선교사들에게는 실질적으로 한국 문화를 연구하였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를 떠나서 널리 확산되어 있는 사고방식 내지는 인식틀이 존재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베버 총아빠스나 에카르트 신부, 옴 신부 등 특출한 개인을 통해서 발현되는 특수한 패러다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선교와 피선교지의 지역 문화에 대한 새로운 20세기형 패러다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이런 관점이나 태도는 애초부터 형성되어 있고, 그런 다음에 선교지에 들어와서 그대로 적용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암묵적인 코기토(tacite cogito)81)의 형태로 막연한 선교 관념을 가지고 있던 선교사들이 피선교지의 문화와 만나면서 자기 형성, 자기 초월을 경험함으로써 명백한 모습을 갖춘 패러다임으로 가시화된다고 보는 편이 더 낫다.82) 그리고 바로 그러한 역동성을 찾아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분도회 선교사들의 한국 문화 연구가 아닐까?

하지만 피선교지의 문화에 대한 이러한 공감적(sympathetic) 감수성과 근대 문명의 매개자로 부각되고 싶어 하는 심리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사실 분도회는 노동과 교육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피선교지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첩경이라는 인식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분도회가 조선으로 진출하면서 부여받은 초기 사명도 이런 것이었다. 또한 문화투쟁 이후에 독일 교회 자체가 문명화의 순방향을 공유한다는 인상을 독일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싶어 하였다. 그래서 독일 식민지가 있었던 동아프리카의 탄자니아 등지로 진출하였던 해외 선교 역시 그러한 목적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독일 제국에 봉사하겠다는 마음, 그래서 독일 민족의 충성스러운 일원으로 인정받겠다는 마음, 피선교지에 나가서 교육과 노동을 통해서 근대화에 기여하겠다는 생각들, 이런 것들과 피선교지 문화에 대한 존중 사이에는 어떤 일관된 논리가 내재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선교사들 자신이 문명과 문화 사이의 모호한 긴장 속에 존재했던 것일까?

위에서 제기한 문제는 19세기와 20세기 독일 사회의 맥락 속에서 작동하던 문화(Kultur) 개념에 대한 개념사적인 연구나, 문화투쟁 시기를 거친 이후에 독일 교회가 제국주의 정책 및 문명화 사명에 가지고 있었던 관념에 대한 연구 등 좀 더 포괄적인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자면 제한된 지면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 원치 않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남겨 놓고자 하며, 다만 여기서는 분도회 선교사들의 한국 문화 연구가 지닌 의미를 교회 내적인 맥락에서 가늠할 수 있는 몇 가지 요소들을 검토하는 데에 그치고자 한다. 그것은 근대적인 선교의 방법과 패러다임을 다루는 새로운 학문 분야로서 선교학이 처음으로 선보인 곳이 바로 독일이었다는 점, 그리고 피선교지의 지역 문화를 바라보는 선교 패러다임의 변화가 교황 회칙을 통해서 표출되기 시작하였다는 점 등이다.

19세기까지 로마 교회에서 지속된 선교의 패러다임은 신대륙 발견 이후에 형성된 것이었다. 그것은 현세보다는 내세를 지향하는 것이었으며, 개인 영혼의 구원을 중시하는 선교 신학적 패러다임이었다. 포교성성이 1658년 8월 17일자 훈령을 내려 피선교지의 전통 문화나 관습을 존중하라는 권고를 내렸지만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중국의 의례 문화를 둘러싼 대규모 논쟁을 거치면서 그리스도교 복음과 피선교지 문화와의 만남보다는 천주교 신앙과 교의의 순수성을 더 강조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피선교지에서 방인 사제를 양성하는 일은 지속적으로 중시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유럽 교회를 모델로 한 지역 교회의 자립을 지향하였을 뿐이다. 19세기 중엽에 오면 비오 9세 교황이 근대 유럽의 사상적 동향에 제동을 건 회칙 〈Quanta Cura〉(1864. 12. 8)를 반포하면서 반근대주의 노선이 선교사들의 의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유럽 문화와 동양 문화를 가리지 않고 현세적인 관심들에 대한 경시 풍조가 만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20세기 선교의 패러다임이 새롭게 출현하기 시작한 것은 먼저 독일에서였다. 1910년 1월 22일 베를린에서 열린 선교협의회에서 로베르트 슈트라이트(Robert Streit)가 신학교와 가톨릭 대학의 교과 과정에서 선교 문제를 고려할 것, 선교학 전문가를 양성할 것, 가톨릭 대학에 선교학 강좌를 설치할 것 등을 제안하였다고 한다.83) 그 이듬해인 1911년에 뮌스터 대학에 처음으로 가톨릭 선교학 교수직이 신설되었다. 최초로 임용된 정원 외 교수는 요제프 슈미틀린(Josef Schmidlin)이었다. 같은 해에 뮌스터에서는 ‘세계 선교학 연구소’가 설치되었으며, ‘선교학 잡지’도 발간되었다.84) 이런 이유로 슈트라이트와 슈미틀린은 독일 천주교 선교학의 창시자로 평가받고 있다.85) 좀 더 학문적인 수준에서 선교의 방법과 패러다임을 다루는 선교학 강좌가 개설되고 이를 전담한 교수진이 확보되었다는 것, 그리고 선교학 연구를 전문적으로 행하는 연구소와 학술잡지가 출현하였다는 것은 현대 사회와 선교의 문제를 진지하게 재검토하는 분위기가 천주교회 내에 널리 퍼져나가게 만드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86) 더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분도회의 토마스 옴 신부가 뮌스터 대학의 선교학 연구소에 주임으로 부임하였다는 사실 역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즉 20세기 전반기 동안 분도회가 아프리카, 한국, 만주 등지에서 행한 선교 활동과 문화 연구가 그 결실을 맺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독일을 중심으로 불기 시작한 근대적인 선교학의 형성과 19세기 선교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은 로마로도 유입되었다. 즉 1919년에 베네딕도 15세 교황은 교황립 포교성 전문학교(현재의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선교학을 가르칠 것을 명령하였고, 1932년에 가서 ‘교황립 선교학 연구소’도 설립되었던 것이다.87) 이러한 사정은 당시 교황들의 선교에 대한 인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베네딕도 15세의 대회칙인 〈Maximum Illud〉(1919. 11. 30)이다. 이 회칙은 근대 선교에 관한 대헌장이라 불리며, 선교 활동의 유럽화 문제를 반성하면서 방인 성직자 양성 문제를 강조하였다. 또한 선교 교황이라 불릴 만큼 선교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비오 11세도 방인 성직자 양성과 선교 지역에 교계 제도를 구축하는 문제를 강조한 회칙 〈Rerum Ecclesiae〉(1926. 2. 8)를 반포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들을 놓고 볼 때에 분도회 선교사들이 벌였던 한국 문화에 대한 연구 활동들은 20세기 전반기의 보편 교회 내에서 선교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려는 노력들과 어느 정도 서로 영향 관계를 주고받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분도회의 활동이 이런 노력들에 전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거나, 혹은 그 반대로 분도회의 활동이 전적으로 그 영향을 받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양자 사이에 긴밀한 상관관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세계 선교에서의 이러한 노력들이 종합되면서 최종적인 결실을 맺은 것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채택된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Ad Gentes Divinitus〉(1965. 12. 7)였다. 그리고 이 교령의 반포를 기념하여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선교 패러다임에 관한 주목할 교황 회칙들이 반포되었다. 특히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 〈Evangelii Nuntiandi〉(1975. 12. 7)는 복음 선교의 방법을 논하면서 각 지역에서 형성된 민간 신앙을 그리스도교적 빛으로 조명하여 제 민족의 문화와 전통적 가치를 그리스도교적 복음 메시지와 연결시켜 전하는 방법이 필요함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Redemptoris Missio〉(1990. 12. 7)는 선교 방법을 제시하면서, 복음과 문화는 긴밀히 연결되어 토착화되어야 복음이 효율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복음과 민족 문화와의 융합을 통한 선교’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선교 패러다임은 20세기 초반 극동 아시아에서 분도회 선교사들이 한국 문화를 연구하면서 선구적으로 실험하였던 바로 그것이었다.


5. 남은 이야기들

분도회 선교사들은 유독 사진을 좋아하였던 것 같다. 베버 총아빠스의 경우에는 정말 그렇다. 자신의 여행기를 온통 이국적인 모습의 사진들로 가득 채웠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 사진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중에서 사진 한 장이 눈길을 끈다.88) 1911년에 조선을 방문한 베버 총아빠스와 함께 여행을 나섰던 유럽인 신부들이 병풍 앞에 각자 독상을 받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제일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카시아노 니바우어 신부이고, 그 다음이 베버 총아빠스라고 한다. 양쪽 이마 위로 높게 파고들어간 V자 모양의 머리카락과 콧날의 모양, 그리고 수염 색깔 등을 보고 판단하자면 그렇다.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 사람은 당시 베버 총아빠스와 함께 조선을 방문했던 상트 루트비히 수도원의 플라치두스 포겔 원장 신부이고, 제일 오른쪽 인물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빌렘 신부라고 한다. 베버 총아빠스와 두 사람은 모두 버선발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수저를 들고 있다. 병풍 너머에는 한 무리의 한국 사람들이 둘러 서 있다. 아마 병풍과 음식상들은 마당에 차려졌고, 한국 사람들은 마루와 섬돌 위에 서서 이것을 구경하고 있었나 보다.

낯선 지방의 문화에 적응할 때 가장 힘든 것은 음식과 냄새라고들 말한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문화적 간격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미각과 후각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진 속의 선교사들이 먹고 있는 음식은 무엇이었을까? 겉모습만으로 보아서는 그냥 밥과 국, 그리고 간단한 반찬 몇 가지인 듯하다. 낯선 몸동작인 책상다리를 하고서도 여유있게 수저를 놀리며 한국식 식사를 즐기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은 이미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타자의 존재이다. 타자는 타자이되, 우리와 더불어 몸짓 그리고 음식을 공유하고 있는 타자인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들의 한국식 식사 장면이 담긴 그 사진은 이 글이 본론에서 전개하였던 많은 논의들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고 하겠다. 분도회 선교사들이 한국 문화에 관해서 보였던 관심과 연구열은 그들이 남긴 자료들을 통해서 살펴보았고, 또 그러한 관심이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를 가늠해 보았다. 물론 분도회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었던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는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나가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관점에 따라서 여럿으로 갈릴 수 있다. 서구 유럽의 우월한 지위와 물질적 수단들을 동원하여 정복 전쟁을 벌이듯이 복음을 강요하는 방법이 유일한 것으로 치부되었던 시대도 있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 독일을 중심으로 선교학이 하나의 학문 분야로 성립하고, 또 여러 교황들이 회칙을 통하여 복음 전파와 피선교지 문화 존중을 결합시키도록 권고하면서 선교사와 선교 단체의 활동방식에서 서서히 변화가 일어났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변화의 징후가 이미 분도회 선교사들의 문화 활동에서 발견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특히 베버 총아빠스와 에카르트 신부 그리고 토마스 옴 신부의 한국 연구에서 19세기의 선교 패러다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관점과 사고방식을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을 토착화 신학의 원초적 형태였다고 평가한다면 지나친 과장 아니면 견강부회일까?

한국의 전통 문화에 대한 분도회 선교사들의 연구와 해석을 복음의 토착화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것은 과거의 사실에 대한 해석과 평가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 교회로서는 현재적인 논점이 아닐까 한다. 이미 한국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 성장하였다. 그래서 교계 신문에 따르면 한국 교회는 세계 81개국에 670여 명의 선교사를 파견하였다고 한다.89) 한국 교회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이 문화와 관습이 판이한 피선교지에서 조우하게 될 상황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에서 신자들의 생활 상태를 개선하는 일 못지않게 그리스도교 복음을 현지의 문화와 조화시키는 일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 외방선교회든 어디든 한국 교회가 선교사 양성 과정에서 과거 한국에 진출하였던 선교단체들에 대한 연구를 포함시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무엇보다도 오랜 기간 동안 피선교지 신자들과 함께 살며, 진정으로 동고동락할 때 비로소 참된 선교의 길이 보일 것”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한국 교회의 지배적인 선교 관념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중시한 분도회 선교사들의 선교정책과 선교 패러다임은 한국 교회의 입장에서도 소중한 자산으로 여겨야 하리라. 현재적인 관점에서 이들을 평가하고 연구함으로써 교회의 선교 사명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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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석우, 〈재한 천주교 선교사의 한국관과 선교 정책〉, 《한국 교회사의 탐구》 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350, 363쪽.

2) 신언회라는 한국어 명칭은 한국 진출 당시 일본에서 사용하던 것인데, 현재는 ‘말씀의 선교 수도회’로 고쳐 부르고 있다.

3) Le Cardinal Costantini, et al., Histoire Universelle des Missions Catholiques: L’Eglise Catholique Face au Monde Non Chretien, Paris: Librairie Grund, 1958, pp. 96~97.

4) 한스-울리히 벨러, 《독일 제2제국》, 신서원, 1996, 209~210쪽.

5) 문화투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탄압들이 독일 교회에 가해졌는지에 관해서는 다음의 연구들을 참조. 박근제, 〈19세기 후반 독일의 사회문화에 대한 고찰〉, 《인문논총》 11, 경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8, 260~261쪽 ; 이주희, 〈1870년대 독일 문화투쟁에 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16~24쪽.

6) Ronald Ross, The Failure of Bismarck’s Kulturkampf: Catholicism and State Power in Imperial Germany, 1871~1887, Washington, D.C.: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98, p. 76.

7) Ibid, p. 85.

8) 문명과 문화의 개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자신의 저작 《문명화 과정》 제1권에서 프랑스적인 문명 개념과 독일적인 문화 개념을 대비한 논의가 고전적이다. 노버트 엘리아스, 《문명화 과정, 매너의 역사》, 유희수 옮김, 도서출판 신서원, 1995, 33~96쪽.

9) Christopher Clark and Wolfram Kaiser, eds., Culture Wars: Secular-Catholic Conflict in Nineteenth-Century Europ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 8.

10) 안드레아스 암라인, 〈일곱 가지 근본사상〉, 《코이노니아》 9, 한국 베네딕도 수도회연합, 1984, 75, 77~78, 81~82쪽 참조.

11) Norbert Weber, Euntes in mundum universum: Gedanken uber die Ziele, welche unserer Missionstatigkeit gesetzt sind; Seinen geistlichen Sohnen, [nach, 1907] ; 선지훈, 〈‘선교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과 선교활동〉, 《교회사연구》 29, 한국교회사연구소, 72~74쪽. 특히 아프리카 선교 혁신 프로그램의 역사적 근거로서 유럽의 문화 발전과 사회 발전에 베네딕도회가 기여한 사실을 든 점과, 현실적 근거로서는 아프리카인들의 토착적인 구조와 심성을 강조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베버 총아빠스의 선교론과 선교지 토착문화론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위의 텍스트를 전면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12) 한불자뎐 韓佛字典 Dictionnaire Coreen-Francais, par les missionaires de Coree, Yokohama: C. Levy, Imprimeur-Librairie, 1880 ; Grammaire Coreene, par les missionnaires de Coree de la Societe des Missions Etrangeres de Paris, Yokohama: Imprimerie de L. Levy et S. Salabelle, 1881.

13) Eckardt, Andreas, Koreanische Konversations-grammatik: mit Lesestucken und Gesprachen, Heidelberg: Groos, 1923 ; Eckardt, Andreas, Schlussel zur Koreanischen Konversations-grammatik, Heidelberg: Groos, 1923.

14) 에카르트 신부는 서문에서 이미 1913년에 서울 숭신학교(사범학교)의 교재로 〈조선어 문전〉을 시도한 바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분도회 선교사들의 한국어 연구에서 최초의 사례가 되는 것은 이 1913년판 〈조선어 문전〉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향후의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하겠다.

15) 에카르트 신부는 문법책의 자매편에 해당하는 이 책을 ‘부주해’(附註解)라고 표기하였다.

16) 에카르트 신부의 1923년 한국어 문법책에 대한 국어학적인 내용분석과 평가에 관해서는 고영근, 〈國語文法硏究一世紀(上)〉, 《한국학보》 12, 1978, 150~152쪽 참조.

17) 鄭熙俊, 〈에카르트와 한글〉, 《한글》 59, 한글학회, 1938, 6쪽.
18) H.B. Hulbert, “The Korean Alphabet”, The Korean Repository Vol. 1, 1892, p. 74.

19) Andreas Eckardt, “Die Koreanische Sprache und Schrift und die Erfindung der Buchdruckerkunst”, Geist des Ostens, II, Munchen, 1914/15, S. 288~303, 364~371.

20) Andreas Eckardt, Der Ursprung der koreanischen Schrift, Tokyo: Deutsche Gesellschaft fur Natur und Volkerkunde Ostasiens, 1928.

2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 연대기》, 함경도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91, 333~334쪽.
22) 이유림, 〈안셀모 로머〉, 《한국가톨릭대사전》 4, 2000, 2201쪽.

23) 2009년 9월 11일에 왜관 수도원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이 글의 논평을 맡았던 분도회 왜관 수도원의 오윤교 신부는 안셀름 로머 신부가 1913년에 참여한 등사판 문법책 제작 작업을 지휘한 사람이 에카르트 신부가 아니라 카시아노 니바우어(Cassianus Niebauer) 신부였을 수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에카르트 신부가 물리수업을 위한 소책자를 만든 반면에, 함께 입국했던 니바우어 신부는 ‘새로 오는 신부와 수사들을 위한 말본’으로서 비교적 작은 문법책을 편찬했다는 증언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주장을 신뢰한다면 니바우어-로머-로트로 이어지는 문법책 발간 작업은 에카르트 신부의 작업과는 별도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전자는 주로 한국에 파견된 분도회 선교사들의 한국어 공부를 돕기 위한 용도였고, 후자는 독일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소개하는 용도였을 것으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오윤교 신부님의 논평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지면을 빌어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24) Lucius Roth, Grammtik der Koreanischen Sprache, Tokwon: Abtei St. Benedikt, 1936.

25) 그 밖에 로트 신부의 1936년 문법서가 지닌 국어학적 특징과 이에 대한 평가는 이숭녕, 〈천주교 신부의 조선어 연구에 대하여〉, 《아세아연구》 8-2, 1965, 214~216쪽 ; 고영근, 앞의 글, 152~154쪽 등을 참조할 것.

26) Lucius Roth, Han-Moun 漢文 Hilfsbuch zur Grammatik der Koreanischen Sprache, Tokwon: Abtei St. Benedikt, 1937.

27)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 연대기》, 180쪽.

28) 이하에서 소개할 자료들은 분도회 왜관 수도원의 선지훈 신부님의 허락으로 열람할 수 있었다. 지면을 빌어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한다.

29) Canisius Kugelgen, Handbuch des Han-Mun 要漢德解三千字典上卷, Seoul: Abtei St. Benedikt, 1915~1916.

30) 앞서 로트 신부의 국한문 혼용체 독해를 위한 학습서를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퀴겔겐 신부의 한자 사전은 그 체제와 내용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용도를 달리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니면 서울 수도원 시절에 저술된 퀴겔겐 신부의 사전이 등사판으로 제작된 것이어서 대량으로 공급할 수 없었고, 따라서 덕원 수도원에서는 한자 학습 교재를 나중에 가서 활자 조판의 형태로 따로 제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31) Canisius Kugelgen, Deutsch-Coreanisches Worterbuch 獨鮮辭典, 1925.
32) 선지훈, 〈퀴겔겐, 카니시우스〉, 《한국가톨릭대사전》 11, 2005, 8545쪽.

33) 훨씬 뒤의 일이지만, 분도회를 벗어나서 독일의 세속 대학에서 한국학을 개척하는 일에 종사하였던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신부는 1968년에 본격적인 한국 문학사 통사를 저술한 바 있었다. Andre Eckardt, Geschichte der koreanischen Literatur, Stuttgart: W. Kohlhammer Verlag, 1968.

34) Dominicus Enshoff, “Koreanische Erzahlungen”, in Zeitschrift des Vereins fur Volkskunde, 21. Jahrgang, Berlin: Behrend, 1911, S. 355~367 ; 22. Jahrgang, 1912, S. 69~79.

35) Andreas Eckardt, “Was die Koreaner erzahlen”, in Missionsblatter XVI, St. Ottilien, 1911/12, S. 165~169. 이 글에는 ‘1. 저승의 술 취한 세 사람 2. 황새가 어떻게 재판을 하는지 3. 늙은 두꺼비’ 등 세 편의 한국 설화가 소개되어 있다. Andreas Eckardt, “Die Arche Noahs in koreanischer Uberlieferung”, in Missionsblatter XVIII, St. Ottilien, 1913/14, S. 169~171. 이 글은 제주도에서 전승되고 있는 삼성혈 설화를 소개하고 있다. 에카르트 신부는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이야기와 유사한 내용을 담은 대홍수 이야기가 전 세계에 산재한 수많은 민족들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는 보편적인 현상임을 주장하면서 한국의 사례로서 제주도 설화를 제시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1913년 7월 20일부터 8월 4일까지 제주도를 방문하여 도보로 여행하면서 전해 들은 설화라고 한다.

36) Andreas Eckardt, “Koreanische Sprichworter”, in Geist des Ostens I, Munchen, 1913/14, S. 757~759 ; Andreas Eckardt, “Koreanische Volkspoesie. Gesang beim Reispflanzen”, in Der Gral, XXI, Munchen, 1922, S. 179~182 ; Andreas Eckardt, “Koreanische Poesie”, in Der Gral XVIII, Munchen, 1923, S. 102~106.

37) Andreas Eckardt, “Die koreanisch-chinesische Fibel”, in Missionsblatter XVIII, St. Ottilien, 1913/14, S. 172~175.

38) 몇 가지만 간추려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앵무새와 오리 이야기, 2. 도적을 속인 진담, 3. 나는 노루, 4. 병 고친 이야기, 5. 세 병신 이야기, 6. 아이들의 소원, 7. 아무것도 모르는 선비, 8. 웃음거리, 9. 거짓 이인, 10. 제주 한라산 신선 이야기, 11. 왕의 꿈, 12. 임금이 피난감, 13. 귀신을 위하는 이야기, 14. 물품을 운전하는 기계, 15. 견우직녀성 이야기, 16. 지혜로운 의원, 17. 농민이 벼슬한 이야기, 18. 남의 성미 맞추기가 어려움, 19. 도적이 개과함.

39) Andreas Eckardt, Koreanische Marchen und Erzahlungen, zwischen Halla und Paktusan, St. Ottilien, Oberbayern: Missionsverlag, 1928.

40) 에카르트 신부는 서문에서 이 풍속화가의 이름을 ‘Song Tjop’라고 표기하였으며, 제11도 투전도에 대한 설명에서 이 화가를 한국인 신자이며 유명한 송씨로서 지난 세기(19세기) 중엽에 살았던 인물이라고 하였다. 현재 풍속화가 성협의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에, 그가 천주교 신자였다는 에카르트 신부의 주장은 자못 흥미로운 바가 많다.

41)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42) Andreas Eckardt, Unter dem Odongbaum: Koreanische Sagen, Marchen und Fabeln, Eisenach: Roth, 1950; Andreas Eckardt, Die Ginsengwurzel, Eisenach, Roth, 1955.

43) 에카르트 신부의 한국 민담 연구 가운데 구술자의 문제와 민담 채록 방식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최석희, 〈한국 문학의 독일어 번역-한국민담을 중심으로-〉, 《헤세 연구》 13, 2005, 376~384쪽.

44) 조효임, 〈안드레 에카르트와 ‘코리아심포니’〉, 《음악과 민족》 8, 1994, 104~105쪽.

45) 물론 에카르트 신부는 1929년 이전에도 한국 미술에 관련한 연구물들을 발표한 바가 있었다. 고구려 양원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고분의 벽화들을 분석한 소논문이 바로 그것이다. Andreas Eckardt, Das Grosse Konigsgrab Yangwons: ein Beitrag zur koreanischen Kunstgeschichte, [Berlin : s.n.] 1924. Repr. from: Ostasiatische Zeitschrift. n.F. 3, Heft 1. S. 64~69. 그 밖에도 에카르트 신부는 한국 예술 및 한국 교회 미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글들을 유럽의 잡지들에 기고한 적이 있었다. Andreas Eckardt, “Der Zodiakal-Tierkreis in der koreanischen Kunst des 9. Jahrhunderts”, in Ostasientische Zeitschrift XIV, Berlin und Leipzig, 1927/28, S. 189~195 ; Eckardt, Andreas, “Ludwig Chang und die christliche Kunst in Korea”, in Die christliche Kunst, XXV, Munchen, 1929, S. 174~185. 또한 에카르트 신부는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1903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아빠스로 취임한 것의 25주년을 기념하여 1928년에 발간한 《눈먼 자들에게 빛을》이라는 논문집에 한국 문화에 대한 포괄적인 글을 실은 적도 있었다. 이 논문에서 에카르트 신부는 동아시아 역사라는 맥락에서 한국과 한국 문화, 한국 철학, 한국 종교 등을 설명하였다. 아마 에카르트 신부로서는 자신의 한국 선교 활동을 총결산한다는 느낌으로 이 논문을 작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Andreas Eckardt, “Zum Kampf um die ostasiatische Kultur und Weltanschaung”, in Lumen caecis; Festschrift zum silbernen Abts-Jubilaum des Dr. Norbert Weber O.S.B., Erzabtes von St. Ottilien 1903, St. Ottilien: Missionsverlag, 1928, S. 237~268.

46) Andreas Eckardt, Geschichte der koreanischen Kunst, Leipzig: K.W. Hiersemann, 1929 ; 권영필 옮김, 《에카르트의 조선미술사》, 열화당, 2003.

47) 권영필, 〈안드레아스 에카르트의 미술관〉, 《미적 상상력과 미술사학》, 문예출판사, 2000. 그 밖에 에카르트 신부의 한국 미술사 저작에 대한 연구물로는 다음의 글들이 있다. 권영필, 〈안드레아스 에카르트(Andreas Eckardt)의 미술사관〉, 《미술사학보》 5, 1992 ; 윤세진, 〈두 개의 미술사, 하나의 시선-에카르트의 《조선미술사》, 세끼노 타다시 《조선미술사》-〉, 《창작과 비평》 통권 123호, 2004년 봄호 ; 권영필 외, 《한국의 美를 다시 읽는다》, 돌베개, 2005 ; 인가희,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와 에카르트(Eckardt)의 한국 미학관 연구〉, 《고황논집》 37, 경희대학교 대학원 원우회, 2005 ; 김영훈, 〈한국의 미를 둘러싼 담론의 특성과 의미〉, 《한국문화인류학》 40, 2007 ; Kwon Young-pil, “ ‘The Aesthetic’ in Traditional Korean Art and Its Influence on Modern Life”, Korea Journal, Autumn 2007. 에카르트 신부의 한국미론(韓國美論)에 관한 위의 연구들이 주장하는 바에 대해서 특별히 재론할 것은 없다. 하지만 윤세진의 글에 대해서는 주의를 요한다. 윤세진은 대표적인 식민사관 주창자인 세끼노 타다시와 마찬가지로 에카르트 신부 역시 조선에 대한 서구적인 왜곡의 담론인 오리엔탈리즘에 사로잡힌 인물로 평가한다. 그러나 박해시절도 그렇거니와 개항 및 구한말과 일제시대 한국에서 활동한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의 사고방식을 모두 오리엔탈리즘의 소산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사태를 지나치게 일면적으로 인식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식민 관료, 탐험가, 군인, 인류학자의 시선과 천주교 선교사의 시선 사이에는 미묘한 불일치의 지점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48) 권영필 옮김, 앞의 책, 20쪽.

49) Norbert Weber, Im Land der Morgenstille: Reise-Erinnerungen an Korea, Munchen: Verlag von Karl Seidel, 1915 ; Oberbayern: Missionsverlag St. Ottilien, 1923.

50) Norgert Weber, In den Diamantbergen Koreas, Oberbayern: Missionsverlag St. Ottilien, 1927 ; 노르베르트 베버,《수도사와 금강산》, 김영자 옮김, 푸른숲, 1999.

51) 유준영, 〈聖오티리엔(St. Ottilien) 수도원 소장 겸재 화첩〉, 《미술자료》 19, 1976, 17~24쪽.

52) 케이 E. 블랙, 에크하르트 데거, 〈聖 오틸리엔 수도원 소장 鄭敾筆 진경산수화〉, 《미술사연구》 15, 2001, 227쪽.

53) 유준영, 〈20세기 초 Norbert Weber의 한국미술품 수집과 비평〉, 《미술사학보》 9, 미술사학연구회, 1996.

54) 물론 분도회 선교사들의 한국어 성가집 발행 작업도 넒은 의미에서는 한국 음악 연구라는 영역 안에서 다룰 수 있겠지만, 이 주제는 필자가 맡은 임무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55) 덕원 수도원 연대기에 따르면, 에카르트 신부는 1928년 3월 23일 당시 서울에 있던 왕립 아시아학회 ‘조선 지회’에서 한국의 고대 음악에 관해서 슬라이드를 상영하고 영어로 강연을 하였다(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 연대기》, 118쪽 참조).

56) Andreas Eckardt, Koreanische Musik, Tokyo: Deutsche Gesellschaft fur Natur und Volkerkunde Ostasiens, 1930.

57) Andreas Eckardt, Musik, Lied, Tanz in Korea, Bonn: Bouvier, 1968.
58) 조효임, 앞의 글, 118~120쪽 참조.

59) 신임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기까지의 여행 과정을 묘사한 글들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가령 1913년에 서울로 파견된 세바스티안 슈넬 신부의 여행기에서도 한국인들과 한국 문화에 관한 묘사들이 발견된다. Sebastian Schnell, “Reise nach Korea”, in Missionsblatter XVIII, St. Ottilien, 1913/14, S. 317~322, 349~356.

60) 에카르트 신부는 서울의 동묘에서 관우 사당을 발견하고는,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역을 판도로 관우에 대한 민간 풍습을 소개하는 글을 썼다. Andreas Eckardt, “Der chinesische Kriegsgott”, in Missionsblatter XXIX, St. Ottilien, 1924/25, S. 103~105, 134~135, 172~175. 또한 에카르트 신부는 순종 황제의 국장 과정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관찰 기록도 남긴 바 있다. Andreas Eckardt, “Der leßte Kaiser von Korea”, in Missionsblatter XXXI, St. Ottilien, 1926, S. 210~214. 1940년대에 들어서도 한국인들의 결혼식 풍습, 일상적인 음식문화 등에 관한 선교사의 글들이 지속적으로 게재되었다. Honorat Millemann, “Eine Hochzeit in Korea”, in Missionsblatter, 47, Uznach, 1943, S. 132~134 ; Honorat Millemann, “Was essen die Koreaner?”, in Missionsblatter, 48, Uznach, 1944, S. 36~39.

61) 베버 총아빠스의 여정을 잘 개괄한 것으로는 다음의 참조할 수 있다. 김미란, 〈20세기초 독일 여행문학에 나타난 한국문화-노르베르트 베버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를 중심으로-〉,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20, 2009.

62)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 연대기》, 76~79쪽.

63) 베버 총아빠스의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기록 영화 제작에 관해서는 선지훈,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들숨날숨》 창간호, 1999, 52~59쪽을 참조. 베버 총아빠스의 기록 영화에 대한 선지훈 신부의 소개는 《들숨날숨》 제11호, 2003까지 연재되었다.

64) 박수환, 〈독일 St. Ottilien 수도원 선교박물관 한국관련 소장품 정리지원을 다녀와서〉, 《민속소식》 152, 국립민속박물관, 2008, 10~11쪽.

65) 선교박물관에 소장된 한국 관련 물품들의 전체 목록과 촬영 사진 및 세부 사항들은 다음을 참조할 것. 《독일 쌍트 오틸리언 수도원 선교박물관 소장품 정리지원 사업 결과 보고서》, 국립민속박물관, 2009.

66) 선지훈, 〈치머만, 프리돌린〉, 《한국가톨릭대사전》 11, 2005, 8332쪽 참조.

67)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 연대기》, 482쪽. 한편 1935년도 덕원 수도원 연대기의 저자는 치머만 신부의 수집품들을 “동양에서의 독일인의 문화 사업의 하나”라고 평가하였다. 위의 책, 266쪽.

68) Anonymous, “Der ‘weiße Buddha’ bei Seoul”, in Missionsblatter XVII, St. Ottilien, 1912/13, S. 236~238 ; Canisius Kugelgen, “Aus einer Unterhaltung mit einem Bonzen”, in Missionsblatter XVIII, St. Ottilien, 1913/14, S. 164~169 ; Andreas Eckardt, “Der neue Schintotempel in Seoul”, in Missionsblatter XXX, St. Ottilien, 1925/26, S. 270~273 ; Andreas Eckardt, “Die Besuch in einer koreanischen Bonzerei”, in Katholischen Missionen LVII, M.Gladbach, 1929, S. 123~126 ; Honorat Millemann, “Heidnische Kloster in den koreanischen Bergen”, in Missionsblatter, 46, Uznach, 1942, S. 158~160.

69) 산신당을 악령들의 거처라고 표현하거나, 신주단지를 귀신 항아리라 부르면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서 그러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 연대기》, 518, 594쪽 참조).

70) Rhabanus Fischer, “Die Geschichte des ersten Tabernakels von Korea”, in Missionsblatter XVIII, St. Ottilien, 1913/14, S. 295~298, 305~316 ; Andreas Eckardt, “Die Katholische Kirche in Korea”, in Akademische Missionsblatter XIV, Munster, 1926, S. 34~40.

71) Arnulf Schleicher, “Religiose und soziale Verhaltnisse in Wonsan in ihrer Beziehung zur Mission”, in Missionsblatter, XXXIX, St. Ottilien, 1935, S. 170~173, 216~219. 그에 앞서 1932년도 원산 본당 연대기에서도 원산시의 종교 통계가 소개된 바 있었다(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 연대기》, 471~474쪽 참조).

72) Andreas Eckardt, “Verehrung Buddhas in Korea”, in Geist des Ostens II, Munchen, 1914/15, S. 34~47, 146~158 ; Andreas Eckardt, “Die Konfutse Verehrung in Korea”, in Historisch-politische Blatter fur das katholische Deutschland CLIII, Munchen: Riedel, 1914, S. 416~432 ; Andreas Eckardt, “Die koreanischen Himmelsreligion (Tschondokyo)”, in Weltmission, 1921 ; Thomas Ohm, “Von koreanischen Bonzen und Bonzereien”, in Katholischen Missionen, LVI, Aachen, 1928, S. 197~202 ; Thomas Ohm, “Der Konfuzianismus in Korea”, in Katholischen Missionen, LVIII, M.Gladbach, 1930, S. 129~132 ; Thomas Ohm, “Himmelsverehrung in Korea”, in Katholischen Missionen, LX, Dusseldorf, 1932, S. 205~206, 236~237.

73) 선지훈, 〈옴, 토마스〉, 《한국가톨릭대사전》 9,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6505~6506쪽 참조.

74) Norbert Weber, Im Land der Morgenstille: Reise-Erinnerungen an Korea, Munchen: Verlag von Karl Seidel, 1915 ; Oberbayern: Missionsverlag St. Ottilien, 1923 ; Norbert Weber, In den Diamantbergen, Oberbayern: Missionsverlag St. Ottilien, 1927.

75) 노르베르트 베버, 김영자 옮김, 《수도사와 금강산》, 푸른숲, 1999, 19쪽.
76) 위의 책, 42~43쪽.
77) 위의 책, 72~73쪽.

78) 오늘날에 와서도 한국의 분도회 수도자들 가운데에는 베버 총아빠스가 보여 준 정신에 공감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글은 충분히 시사적이다. 진 토마스, 〈한국 불교승려계와 베네딕도회에 있어서 대인 관계의 구조에 관한 비교연구〉, 《코이노니아》 8, 한국 베네딕도 수도회 연합, 1984. 79) 이유재,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본 식민지 조선: 가톨릭 선교의 근대성〉, 《서양사연구》 32, 서울대학교 서양사연구회, 2005, 159~160쪽.

80) 안타까운 일은 1930년대에 접어들어서 분도회가 원산 대목구를 맡아서 본당 사목에 뛰어들면서 베버 총아빠스의 선교 노선과 선교 사상은 쇠퇴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즉 한국 문화를 연구하려는 선교사들의 관심도 현저하게 줄어들었으며, 선교 방침을 둘러싸고 선교사들 사이에 이견이 속출하기도 하였다. 교육 선교와 수도생활 보급을 중심으로 하던 서울 수도원 시대와 본당 사목에 매진하던 덕원 수도원 시대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

81) 이 용어는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것이다. 명석판명한 데카르트적인 지식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 도식(schema corporel)처럼 명징한 의식 표면 위로 떠오르지 않으면서도 생활 세계에서 작동하는 사유 형식을 가리킨다.

82) 선교사들이 피선교지 입국 이전에 이미 형성해 있던 사고가 입국 이후에 벌인 실천적인 활동들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해서 재조정되면서 새로운 인식틀을 완성한다는 의미에서 한스 요아스가 말하는 ‘행위의 창조성’ 개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한스 요아스, 《행위의 창조성》, 한울아카데미, 2002, 275~279쪽 참조).

83) 김웅태 엮음, 《선교의 역사와 개념》,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2, 127쪽.

84) Thomas Ohm, Wichtige Daten der Missionsgeschichte, Munster: Aschendorffsche Verlagsbuch-handlung, 1955, S. 113~114.

85) 특히 슈트라이트는 기념비적인 저술인 《선교 문헌 총록》(Bibliotheca Missionum)의 발행을 시작한 인물이었다. 필자 역시 이 저술의 한국 항목에 실려 있는 선교사 문헌 목록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86) 가톨릭 선교학의 역사에서 슈미틀린이 미친 공헌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많다. 슈미틀린은 뮌스터 학파의 개종(conversion) 모델에 가까운 인물로서, 루뱅 학파로 대표되는 부식(plantation) 모델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은 이해가 없었던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의 업적은 선교학 강좌를 최초로 개설하였다는 사실에 국한되어야 하며, 현대 사회 속에서의 가톨릭 선교 문제를 진지하게 재검토하는 데 공헌을 하였다는 평가는 재고할 여지가 있다. 이러한 사실 역시 앞서 각주 23에서 밝힌 행사에서 이글의 논평을 맡았던 오윤교 신부님이 지적해 준 것이다.

87) 김웅태 엮음, 앞의 책, 133~134쪽.

88) Norbert Weber, Im Land der Morgenstille: Reise-Erinnerungen an Korea, Oberbayern: Missionsverlag St. Ottilien, 1923, S. 224.

89) 〈평화신문〉 2009년 3월 15일자 사설.

[교회사 연구 제33집, 2009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조현범(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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