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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광복 70년 분단 70년12: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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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1-22 ㅣ No.730

[사진 속 역사의 현장 광복 70년 분단 70년] (12)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교회와 의인들의 노력으로 청년의 죽음은 민주화 위한 한 알 밀알이 됐다



- 정의구현사제단은 광주민중항쟁 7주기 미사에서 군사독재 정권의 압제 속에 묻힌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폭로한다. 사제단의 폭로는 6·10 민주화항쟁의 거대한 불씨가 됐다.


1987년 1월 14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연행된 한 젊은이가 잡혀간 지 몇 시간 만에 시신으로 변했다.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경찰은 “책상을 ‘탕’ 치니 ‘억’하고 쓰러져 죽었다”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변명으로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천주교회는 1월 26일 서울대교구 명동주교좌성당에서 추모 미사를 봉헌하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은 ‘박종철군의 죽음을 민주 제단에 바치며’라는 제목의 강론을 통해 “하늘마저 노할 경찰의 포악한 고문으로 숨진 서울대학생 고 박종철군의 참혹한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 이 자리에 모였다”며 “솟구쳐오르는 의분 속에 온 나라의 모든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잊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어제오늘”이라고 애도했다. 아울러 당시 정부에 회개를 촉구하고 오직 국민을 위해 봉사하며 민주화의 길을 착실히 밟아 나가라고 촉구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재야 단체와 연대 2월 7일 명동대성당에서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명동으로 향하는 모든 외곽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성당 입구를 막는 등 경찰의 강력한 저지로 약식으로 추도회를 치러야 했다.

군사독재 정권의 압제 속에서 묻히는 듯했던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발생 4개월 만에 극적으로 되살아난다. 5월 18일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 ‘광주민중항쟁 7주기 미사’를 통해서였다. 미사 직후 “고문 살인범이 조작됐다”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발표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다시 ‘폭풍의 핵’으로 떠올랐다. 이날 미사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뒤흔든 특별한 전례로 한국 현대사에 남게 됐다.

- 당시 서울대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은 ‘박종철군의 죽음을 민주 제단에 바치며’라는 제목의 강론을 통해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밝힐 것과 정부의 회개를 촉구했다.


당시 서울 홍제동본당 주임 김승훈 신부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이름으로 발표한 성명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조작됐다’는 내용의 11개 항목을 일일이 제시하며 고문 조작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판 공개 등을 요구했다.

김 신부는 특히 “박종철군을 직접 고문해 죽게 한 진짜 하수인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가 아니라 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사, 이정호 경장 등 3명으로, 이들은 여전히 경찰관 신분을 유지하고 있으며 범인 조작 각본은 경찰에 의해 짜였고, 현재도 진행 중”이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에 검찰과 치안본부는 “사제단 성명서 내용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반박하면서도 다음 날 고문에 가담한 3명을 추가 구속하고는 더 이상의 은폐 조작은 없다며 사건을 묻으려 했다.

사제단의 폭로는 6ㆍ10 민주항쟁의 거대한 불씨가 됐다. 고문치사와 조작, 은폐 등으로 얼룩진 공권력의 위신은 치명타를 입었다. 4ㆍ13 호헌 철폐 투쟁과 더불어 범국민적 저항에 불을 댕겼다. 그해 5월 27일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됐고, 6월 10일엔 국민운동본부 주최 국민대회가 전국적으로 진행됐다.

국민대회 하루 전인 6월 9일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생 이한열군이 최루탄을 맞은 것도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이한열군은 한달간 사경을 헤매다가 안타깝게도 사망했지만, 이날을 시작으로 날마다 전국 각지에서 집회와 시위가 들불처럼 타올랐다.

경찰의 원천 봉쇄에도 불구하고 전국 37개 도시에서 180만 명이 참가한 6ㆍ26 국민 평화 대행진은 6ㆍ10 민주항쟁의 절정을 이뤘다. 훗날 통계에 보면, 6월 10일부터 26일까지 17일간 전국적으로 2145회의 시위가 벌어졌고, 전국적으로 500만 명이 참가했으며, 경찰은 하루 평균 2만 660발, 35만 1200여 발의 최루탄을 발사, 전국 각지에선 최루탄 냄새가 가실 줄을 몰랐다.

4ㆍ13 호헌 철폐와 직선제 개헌 쟁취, 독재정권 타도를 외친 반독재 민주화의 시위 물결은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가 6ㆍ29선언을 발표,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기까지 전국을 뒤덮었다. 이로써 개헌과 함께 ‘1987년 체제’가 막을 올렸고, 지금까지 대통령 직선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 경제적 틀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22일, 오세택 기자]

 

 

‘명동성당=민주화 성지’ 도식, 6·10 때 시작

서강대 교육대학원 김녕 교수 “독재에 맞선 교회 잊어서는 안 돼”

 

 

- 김녕 서강대 교수.


“6ㆍ10 민주항쟁은 4ㆍ19의 연장선에 있는 민주화의 분수령이자 잊지 않고 되새겨야 하는 기억입니다.”

서강대 교육대학원 김녕(임마누엘) 교수는 “6ㆍ10 항쟁의 승리는 학생, 시민사회의 힘과 한국 천주교회의 헌신이 결정적이었다”고 말문을 뗐다.

김 교수는 이어 “6ㆍ10 규탄대회를 마친 학생들과 시민 수백 명이 경찰에 밀려 명동성당에 들어와 경찰과 대치하면서 이들을 연행하고자 공권력이 언제 투입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지자 김수환 추기경이 정부 당국자에게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라’고 말하며 보호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시위대 해산을 유도했던 사목적 행동과 예언자적 직분의 실천을 한국 교회는 꼭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그래서 “새뮤얼 헌팅턴은 1974년에서 1989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민주화 운동사를 정리하면서 ‘6ㆍ10 민주항쟁에 대해 한국 천주교회가 소수종교이면서도 엄청난 역할을 해낸 특별한 사례’로 꼽기도 했다”면서 “‘민주화의 성지’ 하면 ‘명동성당’이라는 도식은 이때부터 확고해졌는데, 이 정신을 한국 천주교회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6ㆍ10 민주항쟁을 계기로 ‘한국 민주화와 가톨릭 교회’를 주제로 미국 시애틀 워싱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 교수는 그래서 “제가 맡은 시민교육과 평생교육 강좌의 첫 강의는 늘 6ㆍ10 민주항쟁 영상물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며 “그 기억을 되살리려는 의미는 6ㆍ10 민주항쟁 때 꽃피운 민주주의가 권위주의 내지 국가주의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명동성당, 나아가 한국 교회 또한 김 추기경께서 앞장서서 독재정권을 막아주던 기억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또 “정부나 정치인들이 툭하면 교회에 들이대는 ‘정교분리’라는 원칙은 실은 국교를 인정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며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라는 의미일 뿐”이라며 “6ㆍ10 민주항쟁 당시 김 추기경이나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발언이나 실천은 정의구현을 위한 교회의 예언자적 직분의 실천으로서 당연할 뿐만 아니라 사회교리에서 권장하는 사항”이라고 언급했다. 동시에 “「현대 세계의 교회에 대한 사목헌장」 76항에 나오듯 교회가 정치 질서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정당하다”며 “이는 정치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정치 질서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기에 오늘에도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교회의 목소리는 가능한 한 시민 사회의 역할을 대체하거나 그 자율성을 가로막지 않아야 한다”며 “시민 사회에서 정치ㆍ경제적 현안에 대해 발언을 하지 못하거나 나오지 않는 상황에 이를 때까지 교회는 기다려야 한다”는 사회교리의 가르침도 상기시켰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22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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