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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서평: 기나긴 겨울 - 한 선교 사제의 한국전쟁 포로 수기(조선희 저, 허종열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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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12 ㅣ No.903

《기나긴 겨울 - 한 선교 사제의 한국전쟁 포로 수기》

20세기 한국의 격동을 몸으로 만난 서양인들, 그 인류애

조선희 지음, 허종열 옮김, 가톨릭출판사, 2016(재출간)

 

 

세상에는 책이 많다. 그중에서 시간을 넘어 살아남는 책도 상당수이다. 책의 가치는 주제의 중요성과 참신성, 내용을 전달하는 기술과 흥미, 그리고 그 책의 진실성을 보증해주는 저자의 생애 등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이 모든 요건을 갖추고도 그 완전성에 비해 덜 알려진 책이 있다. 필립 크로스비(Philip Crosbie, 조선희, 1915~2003) 신부의 《기나긴 겨울》(허종열 역, 가톨릭출판사, 2003/2016년(재출간))이다.

 

이 책의 원서는 1955년에 여러 나라에서 서로 다른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아일랜드에서는 Three Winters Cold,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Pencilling Prisoner, 미국에서는 March tilll They Die로 선보였다. 한국어 번역본은 아일랜드 본을 저본으로 삼아서 원저가 출간된 지 약 50여 년이 지난 2003년에 출간됐다. 그리고 2016년 신호철 신부를 중심으로 한 뜻 있는 사람들이 조 신부 출생 100주년 · 선종 10주기를 기해 2쇄를 찍었다. 초판에는 장익 주교, 재판에는 김운회 주교의 서문이 실렸다.

 

번역은 문체가 깔끔하다. 보통 영어는 주어를 수식(修飾)하거나 목적어를 수식하는 문장들이 있는데 번역본은 이를 단문으로 잘라 명료하게 처리했다. 또한 인명도 한국 이름으로 전부 바꾸었다. 다만 미터법을 원문대로 마일과 야드를 그대로 표기한 것은 한국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감을 준다, 그리고 몇몇 곳에는 역주(譯註)가 필요한 부분도 있다. 한편, 번역본에는 원본에 없는 퀸란 몬시뇰에 관한 신문 기사와 편지, 30여 년간 그를 보필했던 전교회장 임숙녀의 ‘조 필립보 신부 회상’ 및 그 밖의 유관 참고문헌 등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1. 민간인 포로들의 국제 연합적 협력

 

《기나긴 겨울》은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억류되었다가 포로교환으로 송환된 사람들의 수용생활 기록이다. 그중에서도 이 책은 민간인 포로들이 겪은 일을 상세하게 보고하고 있다. 당시 민간인 포로들은 거의 축소판 국제연합 기구였다. 모두 74명이었던 민간인 포로들의 국적은 독일, 터키, 폴란드계 한국인, 미국, 프랑스, 벨기에, 아일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러시아, 유대인 등 10여 개국에 이르렀다. 그들의 종교도 가톨릭, 성공회, 구세군, 감리교 등 다양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교황대사, 사제, 수녀, 선교사, 외교관, 정치인, 기업인, 주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톨릭 선교사들의 소속도 파리 외방전교회, 메리놀회, 골롬반회, 가르멜수녀회, 샬르트 성 바오로 수녀회 등이었고, 성공회 수녀도 있었다. 즉 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국내에 있던 서양인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한국전쟁 전부터 옥사독에 구금되어 있던 독일인 수도자들은 이 그룹에서 제외되어 있지만 그들도 또한 무척 험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의 모국어는 각기 달랐고, 종교나 직업에서 공통된 요소를 찾을 수 없었다. 외교관으로부터 봉쇄수녀원의 수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특성을 가진 이들에게는 공통된 생활습관이나 사고방식이 없었다. 심지어 그들의 나이도 한 살짜리 아기부터 여든두 살 노인에 이르기까지 큰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지독하게 배가 고팠다. 또한 겨울이면 날씨도 지독하게 추워서 밤에는 추위 때문에 잠을 못 잤고 낮에는 추위에 몸이 둔해졌다. 그들은 이를 비롯한 각종 해충에 시달렸다. 그 민간인 포로들은 너무나 잘 아는 똑같은 사람들과 너무나 오랫동안 함께 감금되어 있었다. 그들의 수용소는 인간이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시험하는 무대 같았다. 그런데 이들 민간인 포로들은 제대로 살아 내며, 인간애를 보였다. 자신들이 처해 있던 그 특이한 상황은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들은 이 상황을 만든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다. 이 책은 그런 모습을 담담하게 그렸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특성은 우리로 하여금 당시의 사람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이들을 하나로 결집시킨 사건이 ‘죽음의 행진’이었다. 1950년 10월 31일부터 11월 9일까지 800명이 넘는 인원이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북한에서 여름옷을 입고 신발도 없이 만포에서 하창리까지 160km를 행진했다. 뒤처지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 그들은 후일 이 행진을 ‘죽음의 행진’이라고 표현했다.

 

10월 31일이 밝자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수용소 책임자는 그들에게 군대 행렬로 행진해 가라고 했다. 저자는 그들 그룹을 군대식 대열로 힘차게 행진하기를 명령하는 ‘호랑이’가 악한인가 바보인가를 자문했다. 비틀거리는 80대 노인인 우 신부, 연약하고 나이 많은 베아트릭스 원장 수녀, 침대에서 떨어져 절룩거리는 메리 클레어 수녀, 폐병에 걸린 떼레스 원장 수녀, 팔에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들…. 통역을 맡고 있던 구세군의 로드 부장은 수용소장에게 일행 중 많은 사람들이 군인처럼 군대의 보행속도로 행진할 수 없으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시도가 된다고 말했다. 이에 수용소장은 말했다. “그러면 죽을 때까지 행진시키시오. 이것은 군령(軍令)이오”

 

포로들은 약한 사람들이 가능한 한 건강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방식으로 대열을 지었다. 예를 들면,비에모 신부는 퀸란 몬시뇰과 뷜토 신부 사이에 있었다. 가르멜 수녀들 중에서 가장 튼튼한 베르나데뜨 수녀는 장님인 마리 마들렌 수녀의 팔을 잡았다. 로렌스 젤러스와 넬 다이어는 메리 클레어 수녀를 도왔다. 캐너번 신부와 크로스비 조 신부는 병석에서 일어나 줄을 선 가르멜 수녀회 장상 떼레스 원장 수녀를 책임졌다.

 

호송병들은 속도를 내도록 재촉했다. 호송병들은 “빨리, 빨리”라고 쉼 없이 외쳐댔다. 포로들에게는 그 소리 자체가 고문이었다. 호송병들을 양치기 개처럼 앞뒤로 쫓아다니며 낙오자가 생기면 고함을 질렀다. 포로들은 주저앉으려는 동료를 끌고 가기에 안간힘을 다했다. 시간이 갈수록 운반해 줘야 할 사람은 더욱더 늘어났고, 그들을 운반해 줄만한 사람들의 수는 꾸준히 줄어들었다.

 

민간인 포로의 처지는 정말 어려웠다. 하지만 미군 포로들은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들의 반장은 “더 튼튼한 사람들을 뒤로 보내라”라고 계속 고함치고 있었다. 민간인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아직 걸을 수 있는 약한 사람들은 동료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많은 미군 포로들이 전혀 걸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들은 송두리째 운반해 주어야 했다. 게다가 요구되는 보행속도가 너무 빨랐고 휴식을 위해 멈추는 경우는 무척이나 드물었다. 환자를 운반하는 담가를 든 4인조 팀도 교대하지 않고는 환자 한 사람을 10분이나 15분 이상 운반할 수 없었다.

 

호랑이는 이와 같은 보조를 계속 강요했지만, 아무도 낙오시키지 말라는 그의 명령에 복종하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지친 사람들은 밤이 되어 멈추면 한데서 자기도 했다. 미군들 중에는 자신도 반쯤 얼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얼어 죽게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때로는 꼭 붙어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꾸벅꾸벅 졸다가 깨어보니 시체를 껴안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다. 날마다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호송병들은 낙오자를 그 자리에서 총으로 쏘았다. 민간인 포로들은 탈진해서 길가에 앉아 있는 미군 병사 한 명을 지나쳤고 이어 또 한 명을 지나갔다. 각 병사 옆에는 호송병이 서 있었다. 그리고 민간인들이 지나가자 뒤에서 두 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탈진하여 도로 옆에 쓰러져 누워서 운명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나갔다.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는 민간인 포로들은 그들 옆을 될 수 있는 대로 가까이 그리고 가능한 한 천천히 지나가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관한 말을 몇 마디 했다. 어떤 사람들은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불쌍한 청년은 그저 멍청하게 쳐다보면서 담배가 있느냐고 물었다. 한 청년은 그를 굽어보고 서 있는 호송병을 크고 반짝이는 두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한 청년은 길가에서 죽음을 기다리면서 군가 ‘God Bless America’(하느님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를 불렀다. 흰 눈 위에는 핏자국들이 선명했다.

 

미군 포로는 1950년에 총 756명이었는데 약 1년 후 292명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이 행진에서 베아트릭스 원장 수녀도 낙오되어 총살당해 주께 갔다. 나이가 76세이고 거의 50년 동안 한국에서 고아들과 가난한 사람을 돌보던 수녀는 1950년 11월, 길 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죽음의 행진’은 이 열흘을 일컫는다. 그러나 체포된 사람들은 체포된 직후부터 내내 자유를 억압당하고 이유 없이 죽음 앞에 직면해야 했다. 그래서 독자들은 포로생활 전체를 죽음의 행진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 책은 ‘죽음의 행진’을 체험한 사람들의 체포부터 수용, 송환까지를 세세히 기록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한국전쟁이 진행되던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에 대응하여 자신의 세계를 지키려던 사람들을 눈에 그릴 수 있다.

 

 

2. 책보다 드라마틱한 크로스비 조 신부의 생애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인 크로스비 조 신부의 생애는 그의 책보다도 더 드라마틱하다. 그는 한국에 세 번 선교사로 입국했다. 그리고 두 번 체포되어 옥살이와 수용소 생활을 했다. 그는 세 번 같은 본당에 파견되었다. 그는 우리 민족의 극심한 격동기를 온몸에 실으며 살았다.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도 인터넷에 많이 올라 있다.

 

사람들은 그가 선종한 다음에도 그를 기억한다. 춘천 교구에서는 선종 10주년, 탄신 100주년 기념 미사를 드렸다. 2008년 필립 축일에는 겟세마니 피정의 집에 조 신부의 흉상 제막식을 했다.

 

저자의 사람됨은 한 가지 에피소드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는 북한에서 송환되어 귀국했다가 다시 홍천 본당에 부임했다. 그가 다시 입국했던 그해 1955년 12월 겨울도 무척 추웠다. 6시 새벽 미사를 드릴 때면 복사는 미사에 쓰일 물을 가슴에 품고 있다가 꺼내서 썼다. 잠시만 있어도 물이 얼었기 때문이다. 성당의 난방이 문제였다. 조 신부는 12월 초 원주의 미군 부대에서 중고 온풍기를 한대 얻었다. 그것은 비행기 기계가 얼지 않게 하는 기구였다. 그는 온풍기를 성당 지하실에 설치하고, 원래 휘발유를 쓰던 장치를 석유를 넣도록 고쳤다.

 

성탄을 앞둔 12월 20일. 조 신부는 온풍기의 가동을 시험하려고 기계 가까이에 가서 불을 붙였다.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강한 불길이 뿜어져 나와 신부는 얼굴 전체와 양손에 큰 화상을 입었다. 그는 춘천 성 골롬반 의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입원했다. 그는 온 얼굴을 붕대로 싸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조 신부는 간호하는 수녀에게 24일 성탄 자정 미사를 본당에 가서 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수녀는 그의 부상이 심했기 때문에 펄쩍 뛰었다. 그러나 24일, 신부는 붕대를 풀고 병원을 몰래 빠져나와 터미널에서 홍천행 버스를 탔다. 그리고 미사를 올렸다. 이러한 조 신부는 홍수나 자연재해를 무릅쓰고도 공소 미사를 거행했고 병자성사에 임했다. 그는 신자 여부를 따지지 않고 성실하게 다가가는 신부였다.

 

조 신부의 본명은 필립 크로스비로 선교사를 배출하기 힘든 가정 출신이었다. 그는 데이비드 크로스비와 이따 크로스비 사이에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데이비드는 청년 시절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그러다가 데이비드는 가톨릭 신자인 한 아가씨를 만나 결혼하고자 했으나 종교 때문에 헤어졌고, 그 마을을 떠났다. 그로부터 2년 후 데이비드는 두 번째 청혼을 했고 결혼을 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결혼생활 10년 만에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필립은 그 후 6년 만에 어머니도 잃었다. 필립이 열다섯 살이고 막내 여동생은 여섯 살이었다. 그는 바로 아래 남동생을 농장으로 보내 거기서 일하며 야간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다른 네 동생은 친척, 대모 등에게 양육을 부탁했다. 그리고 자신은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했다.

 

필립은 1939년 24명의 사제와 함께 아일랜드에서 서품을 받고, 조선 선교사로 파견됐다. 조 신부는 서품 후 고향 오스트레일리아에 들렀다가 1940년 부임지인 춘천 지목구에 도착했다. 그는 홍천 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다른 외국인 신부들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포로교환으로 석방되어 오스트레일리아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임시 본당 사목을 맡았다.

 

1947년 그는 광복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사목지로 주교좌성당인 죽림동 본당 대신에 어려운 홍천 본당을 택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전쟁 초기에 공산군에게 체포됐다. 조 신부는 1953년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 본국으로 송환되었지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홍천 본당 주임이 되었다. 강원도 여러 지역을 사목하고 은퇴한 후에는 세상의 평화와 죄인들의 보속을 위한 ‘겟세마니 피정의 집’을 세웠다.

 

그러나 조 신부는 차츰 병이 악화되었다. 평생 남을 돕고 자신은 헤어진 내의를 입고 살던 그에게는 자신의 치료비가 남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신자들에게 부담이 되는 걸 염려하여. 1998년 “내 영혼의 반을 한국에 두고 떠납니다.”라며 영구 귀국했다. 그는 크로스비라는 이름보다 조선희로 산 세월이 더 길다. 그래서 그는 한국을 제1의 고향이라고 했다.

 

태평양전쟁 발발로 젊은 조 신부가 감옥에 갇혔을 때였다. 12월 8일경, 옷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그는 감옥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때 옆방에 있던 교구장 퀸란 신부가 자신의 외투를 벗어 보냈다. 하지만 그는 이를 돌려보냈다. 그런데 옆방에서 퀸란 신부가 ‘보좌신부가 교구장의 말을 안 듣는다.’며 호통을 쳤다. 조 신부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교구장의 옷을 입었다. 그리고 그도 그렇게 살았다. 조 신부는 2005년 90세를 일기로 본국인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선종했다.

 

《기나긴 겨울》은 그가 한국에서 내내 활동을 하고 돌아간 뒤에, 그것도 그의 사후에 번역되었다. 저자는 이 책을 저술한 이후에는 북에서의 포로생활에 대해 잘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가정에서 출발하여 두 번의 옥살이를 거치면서 굳힌 선교사의 삶을 살아냈다. 순교자와 함께 생활한 사람, 동료를 순교자로 바친 사람이 어떻게 달리 살겠는가?

 

 

3. 《기나긴 겨울》의 진실성과 사료적 가치

 

우선 우리는 책의 진실성을 말할 수 있다. 크로스비 조 신부는 《기나긴 겨울》을 깊은 의도를 가지고 집필했다. 조 신부는 수용소 생활이 좀 여유가 생긴 1952년 겨울부터 책의 원본을 썼다. 그는 언젠가는 자유세계로 풀려나 이 책을 친구들에게 바치려고 했다. 친구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었고 또 그들의 마음속에 자신이 있을 거라는 확신으로 지탱할 수 있었던 날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러나 수용소 안은 종이와 연필이 귀했다. 그는 밤늦게까지 작업했다. 그는 작업이 끝나자 만약에 대비하여 사본을 만들어 동료에게 맡겼다. 그러나 석방되어 나올 때 두 원고 모두 몰수당했다. 조 신부는 석방된 후 기억에 각인된 이야기를 다시 종이에 옮겼다. 시간이 지났지만 당시 수용소 안에서 작업했던 내용을 그대로 복원했다.

 

또한 이 책은 30년 후에 저자가 다시 한 번 검토할 기회가 있었다. 원서는 그의 생존 시 이미 절판되었다. 그러자 메리놀회의 스틸프(De Porres Stilp) 수사 등 몇 사람이 책 재판을 고집했다. 조 신부는 한정판으로 찍기로 하고 동의했다. 그러면서 그는 2쇄 머리말에 번(J. Byrne, 方溢恩 ; 1888~1950) 주교 35주기를 기념했다.

 

조 신부는 두 번째 서문에서 “나는 하느님이 진실임을 믿고 있다. 객관적인 하느님이 계시는 것과 똑같이 객관적인 사실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나는 생각하고 글을 쓰고 말을 하면서 언제나 그 객관적인 진실과 함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라고 했다. 그는 항간에 떠돌던 1950년에 남한이 북한을 먼저 침공했기 때문에 북한이 그것을 격퇴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는 북침설의 주장을 단호히 거부했다. 이 두 서문을 통해 우리는 저자가 매우 진지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저자는 본래 자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친구들에게 그들의 기도에 대한 의지와 보답으로 책을 저술했다. 그리고 그는 30년 후에도 자신의 서술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또 기억에 의한 저술로서는 상당히 정확한 편이다.

 

북한에서의 포로생활 기록인 In Enemy Hands를 지은 Zellers는 그가 자신의 저서를 쓰는데 조 신부 책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나긴 겨울》에서 나오는 1951년 압록강 폭격 날짜가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의 기록과 비교하면 하루가 다르다고 지적했다. 이와 같이 조 신부의 책은 세세한 사실에 있어서는 좀 더 검토할 필요가 있으나, 매우 성실하게 작성된 책이다.

 

다음으로 주목할 점은 조 신부의 시야이다. 그는 전체 상황을 종합적으로 보았다. 그는 자신을 절제하고 사건을 객관화시켜 냉정하게 서술해 놓았다. 그래서 이글은 감동적이며 동시에 사료적 가치가 높다. 실제로 죽음의 행진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책이 출간되었다. R.A. Lane, Ambassador in chains : the life of Bishop Patrick James Byrne (1888~1950) : apostolic delegate to the Republic of Korea(1955, New york) ; P.J. Kenedy, 박준영 역, 《기억의 돋보기》, 1994 ; P. Coyos, Ma captivite en Coree du Nord(Paris, 1955) ; Bernard Grasset, 이혜지 등 역, 《죽음의 행진에서 아버지의 집으로》(분도출판사, 1983) ; 서울 성모영보 갈멜 수도원, 《갈멜 수녀들의 북한납치기》(경향잡지사, 1954) ;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엮음, 《동토에서 하늘까지》(바오로뜨락, 2009) ; Eujenie, Trois ans de captivite d'une Soeur de Saint-Paul dans le Nord-Coreen(Paris, 1953) ;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출판부, 《한수녀가 겪은 3년간의 북한 포로기》(1985) 등이 있다.

 

그리고 미군 그룹에서 나온 책도 있다. Phillip Deane, I Was a Captive in Korea(Tokyo, Charle E. Tuttle, 1953)와 I should Have Died(London, Hamish Hamilton, 1976), Larry Zellers, In Enemy Hands : A proisoner in North Korea(The University of Kentucky, 1991)도 있다. 한편 베네딕도 회원들의 수용소 생활기록도 출간되었고, 최근까지 출판이 이어지고 있으나 그것은 이 행진과는 다른 사건이다.

 

이 여러 책들 중에서 마치 신문기자가 사건에 관한 기사를 쓰듯이 자세히 묘사한 책으로는 《기나긴 겨울》이 가장 월등하다고 하겠다. 다른 사람들이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회고록이나 특정 전투 및 저자의 활약, 특정 그룹에 치우쳐 있었다면, 이 책은 종합적이다.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인간들의 공통적인 태도를 이해하게 한다.

 

또한 그의 책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들에 대한 숭고한 증언이다. 우리는 한국전쟁 순교자를 많이 모시고 있다. 그중에서 ‘죽음의 행진’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저자는 이곳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생애 자체에 눈길을 보내고 있다.

 

예를 들면, 82세의 병자 비에모 우 신부는 죽음의 행진에서 퀸란 몬시뇰과 조 신부의 부축을 받았다. 그들은 용감한 노인 친구를 위해 마지막 남은 힘을 다 바치려고 했다. 그들은 쉬려고 했지만 호송병은 계속 몰아붙였다. 부축자들은 큰 소리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고 노인도 숨을 돌릴 수 있을 때 기도에 참여했다.

 

잠시 후 우 신부는 발뒤꿈치가 아프다고 했다. 조 신부가 그의 신을 벗기는 동안 퀸란 몬시놀이 그를 붙잡아 주었다. 양말에 뒤꿈치가 없었고, 발뒤꿈치에는 살갗이 없었다. 신 안엔 피가 끈적끈적했다. 그들은 베로 패드를 만들어 넣어주고 늙은 역전의 용사에게 다시 걸어보라고 촉구할 수밖에 없었다. 우 신부는 이제 계속해서 까무러치고 있었다. 그러나 부축자들은 감시병에게 몰리면서 그 불쌍한 노인을 반은 끌고 반은 운반하면서 계속해서 갔다. 그러다가 그들은 드디어 어느 농가에 도착했고 거기서 호송병이 좀 쉬도록 했다. 이어 곧 그들은 떠나게 되었지만 우 신부는 일어서지 못했다. 그래도 가야 했다. 우 신부는 병인박해로 교회가 폐허가 된 곳에 들어와서 한국교회를 재건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그는 그렇게 동료들에게 매달려서 죽음의 행진을 다 걷고 중강진에 도착해서 선종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번 주교, 퀸란 주교, 성공회의 쿠퍼 주교 등 모든 구성원의 생활태도에 대한 세밀한 증언이다. 이곳에 끌려온 사람들은 뽑혀서 왔는가 싶을 정도로 자발적이고 협동적이며 창조적이었다. 교황대사, 교구장들은 괜히 자리에 있는 게 아님을 절감하도록 솔선수범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선량했고, 그들의 교양과 지식이 이 상황을 견디게 했다.

 

미군 포로들은 이 민간인 포로들의 지구력을 보고 놀랐다. 젊은 환자 포로들을 운반해가던 미군들은 민간인 노인들이 어떻게 아직도 걸을 수 있는지 묻기도 했다. 민간인 일행의 노인들 중 상당수는 약해진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거절하며 계속 걸었다. 이 책은 이 위대한 순간들을 세심히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큰 가치는 20세기 우리나라에 와서 살았던 외국인들에 대한 관심을 일으켜 준다. 당시 한국에서 생활하다가 피난을 가지 못해 공산군에 체포된 서양인들이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몰렸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그들이 인간애로 뭉쳤음을 보여준다. 조 신부는 그들 개개인의 이름을 쓰고 그들의 인생경력을 밝혀 놓았다. 그들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추방당했다가 해방된 한국에 다시 들어왔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자리를 잡아갈 때 또다시 한국전쟁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 책은 이 점을 주목하게 했다. 이제 우리는 한국전쟁을 논할 때 가톨릭 신자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끝으로 이 책은 당시 ‘죽음의 행진’에 참여한 사람들의 공동 기록으로 간주해야 한다. 옥사독에 수용된 사람들은 감옥에서 지은 글을 서로 나누어 외웠다가 석방되어 시집을 펴냈다. 조 신부도 수용소에서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들은 함께 살기도 했지만 글도 함께 남겼다. 이 책의 보너스는 모든 상황과 인간성에 대한 뛰어난 묘사력이다.

 

 

4. 평생을 선교에 바친 선교사와 신념에 찬 공산당원 :  21세기에 던져진 질문

 

《기나긴 겨울》의 내용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공산당원과 선교사의 만남이라 하겠다. 이 책은 신념에 차서 내세를 믿지 않는 공산당원과 내세를 걸고 오늘을 사는 신부가 마주치며 3년 가까이 지내는 이야기이다. 이 두 그룹 사이에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조 신부와 그 동료들은 몇 개월 동안 여러 번 신문을 받았다. 공산당원은 처음 몇 달은 선교사를 한국으로 보낸 사람과 파견한 이유를 밝히는데 주력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아무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내세에서 얻을 수 있을 행복한 삶에 대한 소식을 전파하려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 신부는 현세의 번영을 위한 신조를 전파하기 위해 자신을 불태우며 생명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조 신부와 북한 장교들 사이에는 자유에 대한 개념도 크게 달랐다. 공산주의자들도 자유를 허락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 신부가 생각하는 자유를 개인에게 허용하면 공산정권은 공산주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공산주의자와 선교사의 차이는 신의 인정, 내세에 대한 확신과 그에 이르는 방법이다.

 

이 책에서 가톨릭 신앙이 극한 상황에서 지켜지고 있는 모습은 감격스럽다. 가톨릭 신자는 전체 일행의 3분의 l을 차지했다. 그들은 공통언어인 라틴어를 사용하여 묵주기도를 바치고 성가를 불렀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수용되어 있는 동안 사제들에게 미사를 봉헌할 어떤 편의도 허용해 준 적이 없었다. 이점에서 공산당은 2차 세계대전 때의 일본인들보다 더 심했다.

 

성직자들은 뷜토 오 신부가 체포될 때 당시에 사용하던 성무일도를 주머니 속에 넣어 갖고 있었다. 매 맞으면서도 지킨 그 유일한 기도서가 수용소에 있는 모든 사제들의 손에 온종일 전달되었다. 그 외 감리교 선교사 한 명이 가지고 온 신약성서와 수녀 중 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프랑스어 기도서가 그들이 소유한 전부였다.

 

민간인 포로들이 미군 포로들과 처음 마주치던 날 네 명의 포로가 동료의 시신을 담요에 싸서 운반하고 있었다. 그들은 시신을 내려놓고 무덤을 팠다. 그때 병사 한 명이 골짜기를 건너서 민간인 포로에게 왔다. 그는 죽은 사람이 가톨릭 신자였는데, 가톨릭 사제가 장례식 기도를 해달라고 했다. 물론 호송병의 허락을 얻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결국은 퀸란 몬시뇰이 죽은 병사에게 마지막 의식을 베풀었다.

 

이와 같은 일은 종종 일어났다. 포로들이 행진하는 동안이었다. 정오가 지난 어느 시점에 민간인 포로 그룹은 한 마을을 지나서 멈추었다. 간수들이 일단의 사람들에게 마을에서 음식을 가져오도록 했다. 몇 사람이 뽑혀서 도로 위에 줄을 섰다. 그 곁에 미군 포로 한 그룹이 정렬했다. 그중에 한 사람이 크로스비 조 신부에게 속삭였다. 자신은 로스라고 부르는 중위이며 가톨릭 신자라고 소개하고, 고해성사를 받고 싶어 하는 신자가 많다고 했다. 조 신부는 호송병을 피해서 번 주교에게 이를 전했다. 번 주교는 행진이 다시 시작될 때 자신이 사죄경을 염해줄 터이니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공동 고해성사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했다. 조 신부는 기회를 보아 로스 중위에게 주교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는 공산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 속에서 지켜지는 신앙 행위였다. 800여 명 포로 중에 어떻게 가톨릭 신자만 있었겠는가? 우리의 자료가 가톨릭 사제에게서 왔기 때문이지 이런 일은 다른 종교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포로들 자신은 이 상황에서 신앙을 의지했다.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에게는 그들의 존재 자체가 종교에 대한 설명이었을 것이다.

 

북한군이 서울로 다가오고 있을 때, 번 주교는 남아서 공산군을 맞이할 것인가 남쪽으로 이동할 것인가 선택해야 했다. 그의 관심은 어느 쪽이 교회에 잘 봉사할 수 있는 곳인가에 있었다. 그는 공산당에 짓밟힌 교회가 자신의 도움이 더 필요로 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결과적으로, 공산당 치하에서 교회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려던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대로, 그 결정은 그의 자유를 구속했고 생명을 앗아갔다. 그러나 그가 포로들과 북한군에게 끼친 영향은 그의 원(願)보다 컸는지도 모른다.

 

끝으로 이 책을 덮으면서 우리는 한국전쟁이 우리 민족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온 전쟁인가를 묻게 된다. 아울러 우리는 왜 한국전쟁의 특성을 좀 더 천착하지 않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번역자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이 책이 공산당의 폭력과 박해에 대한 반감을 조성하여, 남과 북이 어렵게 조성해 가고 있는 화해와 협력 무드에 찬물을 끼얹을까 염려했다.

 

그러나 공산당원이 동족이라 하더라도 그들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을 기억하지 않을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던 상황과 사건을 제대로 파악해야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전쟁은 통일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빌미로 너무나 급속히 진행되었다. 그래서 북한군은 외국 국적 민간인들을 포로로 체포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대우할지를 몰랐다. 그들이 포로를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미군이 반격에 나선 7월부터였다. 그들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쪽으로 몰리면서는 갈팡질팡했다. 호송병들은 포로들을 어디로 인솔해 가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이 건물 저 건물로 헤매고 돌아다녔다. 북쪽으로 이동한 후에는 빈집이나 빈 학교 건물을 이용했다. 포로들이 새로 배정받은 곳을 어느 정도 살만하게 손질해 놓으면 그들은 또 옮겨가야 했다. 어렵게 목욕시설을 마련해 놓은 직후에 이동 명령을 받았고, 오븐을 만들어 처음으로 빵을 구워낸 바로 다음날 떠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전선이 교착되고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완화되어 갔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통일이라는 숭고한 명분만을 내세우다 적절한 준비 없이 전쟁 상황이 전개된다면 한국전쟁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평화의 중요함을 역설해준다. 또한 이 책은 우리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게 한다. 남이건 북이건 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인간성에 대한 범죄들을 반성해야만 한다. 그것은 과거의 과오들을 증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해를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쓰러진 사람이나 쓰러뜨린 사람이나 모두를 하느님 마음으로 보고 있다. 또 포로들은 종교와 신분, 나이를 넘어 서로 협조하고 있는 인간애를 보였다. 이 비극 속에 빛났던 이 같은 희망을 우리는 얼마나 찾고 가꾸었는가? 20세기 한국의 격동기를 몸으로 막아선 한 선교사의 포로생활을 담고 있는 《기나긴 겨울》은 21세기 한국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질문하게 하고 또 그것에 답하고 있다.

 

[교회사 연구 제49, 2016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정숙(영남대학교 문과대학 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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