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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 코로나19가 던진 질문: 코로나19의 심리적 영향과 교회의 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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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6-25 ㅣ No.1211

[경향 돋보기 - 코로나19가 던진 질문] 코로나19의 심리적 영향과 교회의 대책

 

 

평소와 다른 스트레스 상황이 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사태 파악을 하려고 한다. 사태가 파악되지 않으면 불안이 급증하면서 혼란에 빠지는데 그것은 ‘통제력의 상실’ 때문이다. 이번 코로나19는 매우 갑작스럽게 다가왔으며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서, 정부와 방역 당국은 물론 일반 시민에게도 극심한 불안과 공포를 초래하였다. 강력하고 갑작스러운 스트레스, 이를 트라우마라고도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사람의 심리는 과각성 상태가 된다. 그러면서 사고 기능의 저하 또는 ‘셧다운’으로 동결 반응, 곧 얼음 상태가 되곤 한다.

 

이때 사회적으로는 질서가 무너지고 정부의 통제력이 붕괴하며, 폭력 사태에 따른 쇼크가 우리의 일상을 파괴한다. 다행히 우리 정부와 방역 당국은 매우 훌륭하게 대처했으며 시민 또한 매우 성숙한 태도를 전 세계에 보여 주었다.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이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겠지만, 이번 코로나19는 몇 가지 점에서 특별한 스트레스 상황을 유발시킨다. 첫째, 현대 과학으로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공포를 주었다. 둘째, 대인 접촉을 피해야 하는 상황이 일상적인 삶의 ‘셧다운’을 겪게 했다. 심지어 교회 공동체의 전례마저 멈춰 세우는 위력을 발휘했다. 이렇듯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통제력의 상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을 공포와 무력감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다.

 

 

통제력을 회복하려면

 

중요한 것은 가능한 한 빨리 ‘통제력을 회복하는 일’이다. 인간은 아무리 큰 재난에 직면하여도 사태가 파악되면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수용할 것은 수용하면서 해결책을 찾는다. 따라서 ‘사태의 명료함’이 통제력 회복에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가짜 뉴스나 재난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행태는 사람의 생명을 두고 벌이는 매우 위험한 장난이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명확하고 객관적이며 신속한 정보의 공유다. 어설픈 설명으로 안심시키려는 행위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으며 지나치게 불안을 조장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함께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도 ‘곁’에 누군가 함께한다면 용기를 낼 수 있고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다. 곁을 읽은 현대인에게 교회 공동체는 의미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서로 함께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모든 행위는 재난 상황에서 매우 훌륭한 대응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코로나19와 같은 재난 상황에서 특히 돌보이야 할 대상은 노약자와 어린이, 그리고 경제적 약자와 심리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이다. 노약자와 어린이는 평소에도 돌봄의 대상이지만, 이러한 재난 상황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경제적 약자들에게도 치명적일 수 있다. 심리적으로 취약한 사람들 또한 강력한 스트레스에 쉽게 무너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기에는 무엇보다 ‘공감 능력’이 절실하다. 이번 사태로 정부에서 재난 지원금을 준다고 했을 때 많은 시민이 자기 지원금을 기부하거나 서로 자신의 마스크를 양보하는 행위야말로 공감 능력을 보여 주는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라 하겠다.

 

 

교회의 대응

 

이번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교회 전례의 중단은 사제들에게도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신자들 또한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어떤 기준이나 안내가 없어 ‘신앙적 혼란’(?)이 초래되었다. 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 통제력 상실을 초래하는 것처럼 기존의 내적 신앙 질서가 혼들리면서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방역 당국의 협조 아래 교회도 재빠른 대처와 지침을 내려 협조한 점은 매우 합리적이고 객관적 태도였다. 그러나 전례 중반, 사목 공백에 대한 설명과 안내가 충분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특히 사제 중심과 성사 중심이라는 가톨릭 교회의 특성이 코로나19와 같은 재난 상황에서 취약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평소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이제는 의문시된다.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생겨나면서 지금까지 의심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교회의 권위에 의지하며, 교회가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자들의 마음이 미세하게나마 흔들리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신자들을 위해서라도 좀 더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과학적일 필요가 있다.

 

사제에 대한 신자들의 기대는 일방적이라고 할 만큼 크다. 평소 이기적이며 독립적인 사람도 재난과 같은 상황에는 사제에게 의지한다. 이런 현상은 사목자에게 도전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앞으로 이와 같은 재난 상황은 5-6년을 주기로 반복된다고 한다.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많은 학자가 이번 코로나19로 말미암아 기존 질서는 크게 변화될 것이라고 한다. 교회는 미래 사회를 어떻게 예측하고 대비해야 하는가?

 

 

미래 사회를 대비하는 교회

 

이 지면에서 모든 문제를 다룰 수 없겠지만,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교회의 진실성 강화다. 이번 코로나19를 통해 얻은 통찰은 ‘투명하고 성숙한 민주 사회’가 방역에도 강력했다는 점이다.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많은 사람이 불안에 빠지고 극심한 혼란을 겪을 때, 대사회적인 ‘진실한 목소리’, ‘정의로운 시민 의식’의 모습을 교회가 적극적으로 보여 준다면 신자들에게는 물론 복음화에도 의미 있지 않을까? 혼란의 시기에 정의롭고 진실한 목소리는 사람들 내면에 통제력을 회복시켜 주며 연대 의식을 강화해 줄 것이다.

 

둘째, 반복될 재난 상황에 대비한 공동체성 강화다. 이번 위기 동안 악마가 “코로나19로 교회를 폐쇄했다.”고 자랑하자 하느님께서는 “나는 코로나19로 모든 가정을 교회로 만들었다.”고 하셨다는 재미난 이야기가 떠돌았다. 사제의 손으로 축성된 성체가 가정으로 잘 배달되고 가족이 모여 부모의 주례로 ‘미사 없는 영성체’를 할 수는 없을까? 가능한 방법을 찾아서 평소에 시행해 봄으로써 재난 상황을 대비할 수 있지 않을까? 평소 유대감이 강한 공동체는 위기 상황에 더 강해지고, 평소에 친밀감이 두터운 가족은 강한 탄력성을 발휘할 것이다.

 

셋째, 소통을 위한 현대 문명의 이기를 지혜롭게 활용한다. 이번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신자들은 미사가 그립고, 사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해 허전하고, 행여 민폐가 뵐까 염려되어 신자들끼리 다가가지도 못하는 새로운 형태의 고립을 경험했다. 이러한 고립은 불안과 공포가 고조될 때 치명적이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누군가 나와 함께하고 있다고 느낄 때 그 이상의 힘과 용기를 낼 수 있다. 소공동체 조직망과 소셜 미디어를 활용함으로써 여러 대안을 만든다면,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상황에서도 심리적으로 유대감과 연대 의식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교회는 강력한 조직망을 갖춘 공동체이기에, 이러한 유대감과 친밀감 확보를 위한 여러 대안을 평소 사목에 잘 접목한다면, 재난과 같은 상황에도 탄력적인 공동체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위기는 늘 새로운 것을 준다. 당연시 여겼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고 믿었던 것들이 더는 믿음을 주지 못하기도 한다. 사회에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듯이 우리의 내면에도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 언제나 그렇게 반복되었던, 그래서 지루하고 재미없게 느껴졌던 일상은 곁을 잃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안전을 위해 모든 것이 멈추어 선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다시 바라보고 삶에 대하여 새로운 묵상을 하게 될 것이다.

 

이때 교회의 사목적 배려와 가르침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새로운 주제에 대해 묵상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교회는 든든한 동반자가 될 수 있고 우리 삶의 토대로서 역할을 할 것이다.

 

사람에게 통찰력은 통제력의 확보와 연결된다.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사고, 객관적이며 개방적인 사고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유능함을 발휘한다. 우리는 평소에 건전하고 건강한 사고, 현실적이며 합리적으로 정서를 조절하는 능력을 잘 키움으로써 위기 상황에 잘 대처하는 통찰력을 키울 수 있다. ‘새로 나는 일상’, ‘깨어 있는 삶’을 사는 것이 통찰력과 얼마나 깊은 관련이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도전이자 축복

 

코로나19 사태 뒤 사람들은 더욱 교회를 찾을지 모른다. 갑작스러운 재난을 경험한 사람들은 불확실성에 대한 더 큰 두려움으로 신에게 귀의할 여지가 어느 때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들의 욕구는 현실적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신을 열망할지도 모른다. 교계제도나 교의나 신학보다는 그들의 불안을 덜어 줄 수 있는 신뢰할 만한 무언가를 더 중요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래서 새로운 종교운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 신앙이 아니어도 끼리끼리 모여 자신들의 안전을 스스로 확보하려는 시도가 유행처럼 번질지도 모른다. 영성보다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에서 더 큰 매력을 느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교회에는 도전이 될 수 있지만, 변화의 축복이 될 수도 있다. 코로나 이후의 교회가 신자들의 영적 갈증을 채워 주는 진정한 동반자로 거듭나기를 희망한다.

 

* 김정민 라자로 – 전주교구 신부. 교구 상담사목센터 센터장이며, 가톨릭상담심리학회 전주교구 대표를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20년 6월호, 김정민 라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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