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1일 (일)
(백)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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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의롭게 살려고 애쓰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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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8-02 ㅣ No.1462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의롭게 살려고 애쓰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 시대

 

날은 덥고 코로나 사태는 여전히 수습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조금씩 지쳐가고 무감각해져 갑니다. 사람들은 지금 당장 내 앞에서 벌어지는 것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습니다. 코로나 감염자가 세계적으로 천만 명이 넘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텔레비전 영상을 통해 시청하는 우리에게는 그 모든 것이 그저 숫자와 구경의 대상으로 비칠 뿐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우리는 실시간으로 타지역의 감염 상황과 소식을 알게 되지만, 그것들은 그저 가상의(virtual) 일들로 여겨집니다. 즉, 구체적 실감으로 잘 다가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실상보다 영상과 가상에 더 익숙합니다. 실제 모습과 실제 상황들이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영상과 가상의 모습과 상황으로 변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일들에 생각보다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 시대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더 이기적인 존재로 만들고 있습니다.

 

 

감정과 욕망의 시대

 

사람은 생각하는(사유하는) 동물입니다. 역사 안에서 사람들은 오랫동안 생각과 사유를 강조해왔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였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시대는 달라졌습니다. “나도 감정이 있다 고로 나는 나다.” “나는 욕망한다 고로 무엇보다 내 욕망이 중요하다.”입니다. 생각과 사유보다 감정과 욕망을 중요시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생각과 사유보다 감정과 욕망은 더 충돌적이고 이기적인 경향을 지닙니다. 내 감정과 내 욕망이 중요합니다. 타인의 감정과 타인의 욕망은 고려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경쟁과 충돌의 대상일 뿐입니다.

 

감정과 욕망은 본능적이고 충동적이고 일차적입니다. 생각과 사유는 시간의 여유가 필요하고 이차적입니다. 타인의 사정과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하기 위해서는 생각과 사유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현대의 문명은 점점 생각과 사유를 위한 시간 여유를 잘 허용하지 않습니다. 설혹 시간의 여유(여가 또는 휴가)가 주어진다 해도 사람들은 그 시간을 감정의 충족과 욕망의 쾌락을 위한 물질의 시간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여가 시간마저도 사유하고 성찰하는 정신의 시간으로 사용하기보다는 감정과 욕망을 향유하는 물질의 시간으로 사용합니다. 물론 감정을 공유하는 공감의 능력이 때때로 타인을 배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지만 감정의 변덕스러움은 금방 자기의 감정에만 충실하게 합니다. 감정과 욕망의 시대는 우리를 점점 더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의로움에 대한 갈망

 

오늘의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의 감정과 욕망마저도 획일화하고 이기적 쾌락을 지향하는 모습으로 통제하고 조절합니다. 우리의 생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을 소중히 살피고, 우리의 욕망을 건강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사회 안에는 분노와 혐오의 감정과 물질과 쾌락의 욕망만 가득한 것 같습니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감정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올바르고 건강한 욕망은 점점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오늘날 사회의 전체적 풍경은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 어딘가에 “열렬히 정의를 바라고 의로움 갈망하는 사람들이”(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77항) 있을 것입니다. 세상 구석구석에는 정의를 지향하고 의롭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교회와 신앙인은 무엇보다 의로움을 갈망하는 공동체와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상 속의 정의

 

오늘의 한국 사회와 정치의 장에서 자주 듣는 말이 정의와 공정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사회 안에서 정의와 공정이라는 말은 그 참뜻을 잃어버리고 그저 이데올로기적 선전구호처럼 여겨집니다. 모든 이의 정의가 아니라 자기들만의 정의, 모든 사람에 대한 공정이 아니라 자기들만을 위한 공정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또 자본주의와 물질주의 사회 안에서 정의는 자주 왜곡되고 조작됩니다.

 

“세상의 정의는 가끔 사소한 이해관계로 훼손되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조작되고는 합니다. 우리는 세상 정의가 얼마나 쉽게 부패의 수렁에 빠지는지, ‘오는 것이 있어야 가는 것이 있다.’는 일상의 정치에 얼마나 쉽게 얽혀 드는지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거래가 됩니다.”(78항) 경쟁과 정쟁에서 이긴 사람들이 모든 것을 독식하고 있습니다. 이 승자 독식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참된 정의를 위한 투쟁을 포기하고 승자들의 대열에 편승하기를 선택합니다.”(78항) 소수의 승자가 많은 것을 누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나고 배척되는 오늘의 사회 안에서 참된 정의를 실현하고 실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자주 목격합니다.

 

 

신앙의 정의

 

거룩함으로 불리움 받은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신앙의 정의는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는 것입니다.(79항) “참된 정의는 사람들이 각자 내리는 결정에서 의로울 때에 그들 삶 안에서 이루어지고, 가난한 이들과 약한 이들을 위한 공정을 추구하는 가운데 드러납니다.”(79항)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 정의란 개별적 차원에서 보면, 신앙인들이 각자의 삶에서 내리는 모든 결정들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또한 공동체적(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가난한 이들과 약한 이들을 위한 공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결국, 정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모든 신앙인들이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행하는 선택과 결정이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주교님들이 교회와 사회 안에서 하는 선택과 결정들이 정말 의로운 것인지, 오늘날 본당 사제들이 본당에서 하는 선택과 결정들이 정말 의로운 것인지, 끊임없이 묻고 성찰해야 합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자신들의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행하는 그 많은 선택과 결정들이 과연 하느님 뜻에 부합하는 의로운 모습인지, 끊임없이 묻고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행하는, 정치적 선택과 결정, 경제적 선택과 결정, 사회적 선택과 결정, 문화적 선택과 결정들이 정말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끝없이 질문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택과 결정들이 이념과 배제의 방식으로, 자본주의적이고 물질적인 방식으로, 혐오와 차별의 방식으로, 소비주의적이고 쾌락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는지, 묻고 또 묻고, 성찰하고 또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저 종교의 영역에서만, 교회 안에서만 작동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성찰해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와 신앙인들이 “가난한 이들과 약한 이들을 위한 공정을 추구”하고 있는지, 늘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기 어려운 세상과 시대를 살고 있다고, 혼자의 힘으로 감내하기는 너무 힘든 세속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고 변명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역설적으로, 의로움을 갈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 거룩한 일일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8월호, 정희완 사도요한 신부(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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