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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이기경의 척사 활동과 공서파 형성에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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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8-19 ㅣ No.1274

이기경의 척사 활동과 공서파 형성에 끼친 영향

 

 

1. 머리말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正祖 시대는 천주교회가 형성되고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시대이다. 특히 1791년의1) 珍山事件은 조상 숭배 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제사에 대한 당시 조선의 관점과 천주교 신자와의 시각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면서 본격적인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고, 이어 지배층의 판도까지 바뀌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리고 이러한 점으로 인하여 천주교회사와 정치사 분야에서는 이 사건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하여 왔다.2) 그 중에서도 당시 正祖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南人에 대한 연구가 중점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천주교회사 측에서는 남인 내 신앙의 확산과 탄압 쪽에 초점을 맞춰 연구를 진행하였고, 정치사 측에서는 남인 내 蔡濟恭 일파(親西派)와 洪仁浩 일파(攻西派)의3) 대립을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기존의 18세기 후반 朝鮮 사회에 대한 연구는 친서파에 집중되는 한계가 있다. 이와 더불어 천주교회사 연구자들은 護敎論的인 관점으로 주제에 접근하여, 친서파와 공서파를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또한 정치사적인 연구는 정조와 남인 관계를 밝히려는 다양한 연구를 진행시키기는 하였으나, 이때 남인의 범위를 채제공 계열로 한정함으로써 남인 전체를 연구하였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뿐만 아니라 유교와 천주교(西學) 충돌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제사와 같은 전례문제에 대해서도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볼 때4), 기존 연구의 좁은 폭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남인 가운데 친서파를 공격하였던 공서파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존 연구의 대부분은 친서파와 공서파가 정치적으로 얽혀 있었고, 그로 인하여 친서파 인물들이 직 · 간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었던 진산사건을 공서파에서 공론화시켰다는 것에만 연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즉 당시 공서파가 친서파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천주교에 대한 공서파의 견해가 당대에 통용되던 일반적인 견해였다는 점이다. 조선과 같은 유교 국가에서의 ‘廢祭焚主’ 사건은 국가 기반을 흔드는 국가적 차원의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친서파에서는 공서파가 진산사건을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진산사건이 국가 기반을 흔드는 사건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점 또한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적인 반격은 커녕, 진산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것만을 주장하며 자신들을 방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잠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러한 복잡한 시대 상황을 균형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친서파의 견해뿐만 아니라, 공서파의 斥邪論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공서파 가운데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李基慶에 대하여 알아보면서 당시 형성되었던 척사론 및 공서파의 활동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5) 이기경은 진산사건 때부터 척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1801년 辛酉迫害 이후에는 현재 천주교회사 연구에서 중요 史料로 이용하는 《闢衛編》을 편찬한 인물이다. 특히 유년 시절 친서파의 丁若鏞 · 李承薰 등과 친분을 맺었으나, 천주교 관련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그들과 멀어지고 洪樂安 등과 함께 공서파의 주축 인물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특이성이 발견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기경은 1791년 홍낙안과 함께 진산사건을 공론화시키고 공서파를 결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에 이 글에서는 이기경의 척사관이 형성되는 과정과 공서파 형성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기경이 직접 작성한 문집이 반드시 필요하겠으나, 그가 작성하였다고 알려진 《瘠菴遺稿》와 《瘠菴漫筆》의 시문집 등은 현재 전해지지 않아6) 직접적인 인용이 불가능하다. 다만 홍이섭의 연구 중에 《척암유고》와 《척암만필》을 인용한 부분이 있으므로 재인용하도록 하겠으며, 아울러 姜浚欽이 작성한 〈弘文館校理李公墓誌銘〉과 이재기의 《訥菴記略》7) 및 관찬 사료 등을 이용하여 이기경에게 접근하도록 하겠다.

 

 

2. 이기경의 척사관 형성


(1) 이기경의 생애

 

이기경은 持平을 지낸 李齊顯과 東萊 鄭氏 鄭彦賓의 딸 사이에서 1756년(英祖 32) 차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자는 休吉이고 호는 瘠菴이었으며, 본관은 全州로 潭陽君派 順川君系였다. 증조부는 進士 출신의 李震一이고, 조부는 司諫을 지낸 李鳳齡이었으며, 坡平 尹氏 尹東壁의8) 딸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으나, 큰아들 李廷泰는 큰 집의 양자로 갔다. 그리고 《國朝榜目》에 따르면 이기경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21살이 되던 1777년(正祖 원년)에 李基慶은 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789년 式年文科에 급제하면서 공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承文院을 시작으로 講製文臣 · 司憲府監察 · 禮曹正郞 등의 관직을 역임하다가, 1791년 珍山事件에 연루되어 공서파로서는 유일하게 함경도 경원부로 유배를 갔다. 1794년 해배된 이기경은 이듬해 司憲府持平을 거쳐 兵曹正郞 · 司諫院正言 · 吏曹佐郞 · 弘文館校理 · 司諫院獻納 · 司憲府掌令 · 司憲府執義 등을 역임하던 가운데, 1804년 대왕대비 김씨(貞純王后)의 수렴청정에 반대하다가 함경도 端川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해배되었으나, 같은 해 대역부도죄로 국문을 당하던 중 사망한 權裕와 연관이 있다는 주장에 의해 雲山으로 유배를 당하였고, 1809년 해배되었다. 그리고 1819년(純祖 19년) 6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묘지는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있으며, 碑銘에는 ‘果川盤浦先墓’라고 되어 있다.9)

 

畿湖 南人 출신인 이기경은 젊은 시절 정약용 · 이승훈 등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던 것으로 보아 채제공 계열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0) 채제공 일파는 채제공의 庶子와 정약용의 庶妹가 혼인을 하고, 이승훈과 정약용의 누이가 혼인을 하는 등 혼인 관계를 바탕으로 매우 공고하게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기경은 이들과 어떠한 혼인 관계도 맺고 있지 않았다.11) 채제공 계열과 적대 관계에 있던 홍인호 계열의 사람들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아들 李廷謙은 睦萬中의 손녀, 즉 睦仁圭의 딸과 결혼을 하였고, 딸은 姜浚欽의 아들로 吏曹判書를 지낸 姜時永과 혼인을 하였다. 또한 강준흠이 이기경의 묘지명을 작성하고, 이기경이 홍낙안의 묘지명을 작성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이들의 긴밀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이기경이 젊은 시절과 중년 이후 가깝게 지낸 이들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기경의 정치적 성향이 채제공 계열에서 홍인호 계열로 이동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약용과 이승훈 등이 친서파로 분류되는 반면, 목만중을 비롯한 목인규와 강준흠은 대표적인 공서파로 꼽히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기경이 교류하던 인물들이 친서파에서 공서파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이기경의 정치적 성향이 서학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2) 친서파와의 교류 및 서학서 입문

 

기호 남인 출신인 이기경은 젊은 시절 정약용 · 이승훈 등과 가깝게 지내며 교류하였다. 이것은 1787년(정조 11)에 泮會事件이12) 발생하였을 당시, 이기경과 홍낙안, 그리고 이기경과 정약용이 주고받은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A-1 : …평소에 모두 친밀한 사람들이라 지금 차마 갑자기 크게 벌려서 거사를 할 수 없소…나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다시 상의하여 그들을 이끌어내고 힘써 말리는 것이 좋을 것 같소.…13)

 

A-2 : 형과 절친한 자는 제도 역시 같이 情誼가 좋으니, 내가 어찌 사사로이 미워 그렇게 하겠소?14)

 

B-1 : 다만 한 말씀을 형에게 드리노니, 형의 입으로 정약용을 끊는 것과 弟의 입으로 이기경을 끊는 것은 반회 두 글자에 불과하니, 만일 감동을 입어서 즐김이 전날과 같게 한다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소.15)

 

B-2 : …내가 말하기를 “丁某 · 李某가 작년 서울 성균관에 있을 때에 공부를 빙자하고는 실은 다른 일을 하였으나 내가 심복하는 바가 아니었다”하였고, 또 “정모가 처음에는 호기의 습관으로 혹 그 책을 들추어 보았으나 근래에는 벗어났으므로 나의 交情이 그 전과 꼭 같다”하였소.…16)

 

홍낙안은 姜履元으로부터 반회사건에 대하여 들은 후, 이기경에게 사건의 전모를 알려 줄 것을 요청하였다.17) 그리고 그 전모를 알게 되자, 이기경에게 함께 斥邪의 상소를 올릴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기경은 이에 반대하며 사료 A-1의 내용을 담은 편지를 홍낙안에게 보냈다. 이기경의 입장에서는 반회사건과 관련된 이들이 예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인물들이므로, 다시 한 번 그들을 설득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홍낙안은 사료 A-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기경과 친한 인물들은 자신과도 친하다면서,18) 본인은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그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홍낙안은 자신도 그들과 친분이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 이전에 이기경과 그들이 매우 가까운 관계이므로 이기경이 망설일 수밖에 없는 입장임을 인정하고 있다. 즉 다른 이들도 인정할 만큼 이기경과 그들은 가까운 관계였던 것이다.

 

사료 B-1과 B-2는 이 무렵 정약용과 이기경이 주고받은 편지이다. 정약용은 사료 B-1에서 泮村에서의 일을 소문낸 것 때문에 둘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고 경고하였다. 이에 이기경은 자신이 반회사건에 대하여 어떻게 얘기하였는가를 적어 정약용에게 보냈다. 사료 B-2는 그 중 일부로 자신은 반회사건과 연루된 이들의 姓만 밝혔으며, 또 丁某는 한때의 호기심이었기 때문에, 본인은 여전히 그와 교류를 한다고 다른 이들에게 밝혔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이기경과 정약용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약용의 〈自撰墓誌銘〉에서도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정약용은 자주 이기경의 정자에 나가 함께 과거 공부를 하였다고 하면서 점차 사이가 멀어진 것은 1788년이라 밝히고 있다.19) 반회사건이 발생한 것이 1787년 겨울이므로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후 점차 사이가 멀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기경은 친서파로 분류되는 이들과 젊은 시절에 가깝게 지내면서 함께 서학서를 접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1791년 진산사건이 발생하자 이기경이 채제공에게 보낸 편지에서20) 이승훈과 함께 《天主實義》를 본 적이 있다고 밝히는 데서도 드러난다. 당시 이기경은 이승훈이 서학과 관련을 맺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함께 서학서를 접한 경험을 진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학서를 함께 접한 시기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기경이 서학서를 접한 것은 1787년 이전이 분명하다. 반회사건 당시 서학에 대한 견해가 이미 판이하게 달랐다는 점이 그것을 증명한다. 사료 C를 살펴보도록 하자.

 

C : 신이 원래 시작을 아뢰온다면 계묘년(1783) 겨울에 승훈이 중국에 들어갈 때에 신이 또한 전별차 나아갔는데 승훈이 말하기를 ‘내가 서양 서적을 구입하려고 하는데 재력이 부족하니 혹 서로 도울 길이 있겠는가?’ …갑진년(1784) 봄 승훈이 돌아왔을 때에는 신이 승훈을 미쳐 보지 못하였고 정약용이 신과 서로 만나서 먼저 승훈이 서양책을 구입해 온 것을 말하였습니다. 신이 약간 글자를 풀어볼 줄 아는 고로 그 글을 청해보았는데, 승훈도 서로 친하지 않은 것은 아니로되 오히려 정약용보다 더 절친하지 못하므로 약용이 《天主實義》와 《盛世芻蕘》 등등의 책을 신에게 보내와서, 신이 그 책들을 보게 되었는데 이후부터 약용을 대하면 의논하게 되어, 혹 그 허망하고 황탄한 것을 배척도 하고 혹 신기한 것은 인정도 한 것이 비일비재하였으나, 을사년(1785) 봄 사학금령이 내린 뒤로 승훈이 책을 불태웠다 하여서 모두 불태우고 남음이 없는 줄 알고 잊어버리고 있었더니, 정미년(1787) 10월에 승훈의 무리가 다시 천주학을 숭상한다는 소문이 귀가 따갑도록 들려오기에, 신이 마음속으로 가만히 의심하여 말하기를 ‘전날에 빌려다가 본 책은 그다지 혹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 이들이 이렇듯 함은 어쩐 일인가? 반드시 장차 그 글을 자세히 보아서 그 까닭을 시험하리라’ 하고 드디어 서양 책 빌리기를 승훈에게 청하였더니, 승훈이 말하기를 ‘그 교는 믿지 아니하고 다만 그 책만 보느냐?’ 신이 대답하기를 ‘좋아하고 배척함은 오직 본 후에 결정될 것이다, 책이나 빌려 달라’ 하였더니, 어떤 날 승훈이 謄本인 《眞道自證》 세 권을 팔소매에 넣고 해질 무렵에 왔었습니다.…21)

 

이 사료에 따르면 이기경은 이승훈이 연경에 다녀온 1784년 이후에 이승훈이 가져온 서학서들을 접하였고, 1785년 西學書籍 禁令이 있은 후에는 접하지 않다가, 1787년에 다시 서학서를 접하였다. 1785년 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곤경에 처했던 이승훈이 자신과 학문적 교류가 없던 사람들에게까지 서학서를 보여주었을 리는 없다.22) 즉 이것은 이기경과 이승훈의 학문적인 교류가 늦어도 1787년까지는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이 함께 서학서를 접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록 이 상소가 작성되던 진산사건 당시에는 이승훈이 서학과 관련되었다는 죄목으로 공초를 당하면서, 이기경과의 관계를 강력히 부정하고 있었다.23) 그러나 이것은 이승훈이 자신의 처지를 모면하기 위한 변명의 성격이 강하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이승훈의 공술을 들은 이기경이 사료 C를 제시하면서 이승훈과의 관계를 더 자세히 밝힐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기경의 서학서 입문에 대해서는 정약용의 기록에서도 찾아지는데, 정약용은 “이기경이 西敎 듣기를 즐겨하여 손수 한 권의 책을 베껴놓기까지 했다”고 전하고 있다.24) 그러나 더 자세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아, 이 당시 이기경이 베껴놓은 서학 서적이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기경이 젊은 시절 정약용 등과 가깝게 지냈으며, 서학을 비롯한 학문적 교류를 활발히 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정약용 · 이승훈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던 이기경은 그러나, 반회사건 이후 차츰 멀어졌다.25) 대신 홍낙안26) 등과 가깝게 지내기 시작하면서, 공서파로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791년 진산사건을 거치면서 이 유대는 더욱 공고해졌고, 斥邪의 뜻을 밝힌 강준흠 · 목만중 등과도 가까워졌다. 이러한 이들의 유대 관계는 ‘이기경-목만중’, ‘이기경강준흠’의 자손들이 혼인을 맺는 단계로까지 발전한다. 또한 강준흠이 이기경의 묘지명을 작성하고, 이기경이 홍낙안의 묘지명을 작성하였다는 사실 역시 이들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3) 척사관 형성의 사상적 배경

 

아버지를 일찍 여읜 이기경은, 季父인 李齊任으로부터 수학하였다.27) 이제임에 대해서는 특별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그의 사상적 성향 등에 관하여는 알 수 없다. 다만《南譜》에 성호 이익의 문인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제임으로부터 수학을 한 이기경 역시 자연스럽게 성호의 사상을 물려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안정복의 제자이자 1779년 무렵 정통 유학을 따르는 일군의 신진 사류를 이끌고 있었던 沈浟가28) 이기경의 고종사촌이었고, 정약용과 이기경이 함께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던 점 등으로 보아29) 그 역시 일반적인 남인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정약용 · 이승훈 등과 함께 서학서를 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기경이 이들과 다른 길을 걸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더 정확하게 말을 하자면 친서파들과 함께 서학서에 입문하였고 학문적인 교류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척사를 견지하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이기경이 다른 이들에 비하여 늦은 시기에 서학 서적을 접하였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18세기 초반 이미 다수의 서학서가 들어와 이들의 이전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신후담 · 안정복 등이 서학서를 읽고, 그에 대하여 논평하는 것을 보았을 때, 이기경만 1780년대 중반까지 서학서를 접하지 못하였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보다는 이기경이 척사관을 형성하도록 사상적으로 영향을 준 이들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대체적으로 기호 남인은 성호 이익의 사상을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1780년대 중반이 되면 順菴系와 鹿菴系의 분화가 뚜렷이 나타난다.30) 순암계가 斥邪를 강력히 주장하였던 반면, 녹암계는 실용 학문의 측면에서 서학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하였다. 순암계가 척사를 강력히 주장하게 된 계기는 을사추조적발사건 때문이었다. 즉 이전까지 서학은 단순히 학문의 차원이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종교화가 되어가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난 것이다.31) 유학자의 입장에서 천주교는 수용할 수 없는 교리를 분명히 담고 있었기 때문에 邪學으로 판단하기에 충분하였다. 게다가 천주교와 관련된 이들이 대부분 남인이었기 때문에, 노론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였다. 즉 어렵게 잡은 정권을 놓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기경이 수학하였던 이재임이 성호의 문인이기는 하였으나, 그가 순암계와 녹암계 가운데 어떠한 쪽에 가까웠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진산사건이 발생하기 한 해 전인 1790년에 안정복이 이기경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볼 때, 1790년을 전후로 하여 이기경은 순암계와 뜻이 맞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무렵 안정복은 전통 유학의 입장을 고수하는 이들과 가깝게 지내며, 녹암계 인물들을 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안정복이 이기경에게 척사의 폐해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바른 학문을 할 것을 당부하는 편지를 보냈으며,32) 《順菴先生文集》에 실린 〈答李注書休吉基慶書〉의 注에는 姜世靖의 이기경에 대한 短評을 실으면서 攻西學으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33) 즉 이기경이 원래 어떠한 계통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공직 생활을 시작할 무렵에는 순암계에 가까웠던 것이다.

 

다만 안정복으로부터 직접 수학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안정복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척사 활동을 정치적으로 쟁점화시키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안정복이 척사의 공론 조성에 앞장서며 척사의 사상적 바탕을 형성하였던 것에 비하여, 이기경을 중심으로 한 공서파들은 상소를 올리며 사건을 정치화시켰다. 즉 척사 활동을 이끄는 선봉장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34) 안정복 등이 서학을 배척하였던 것은 천주교를 邪學으로 판단하였고 천주교에 관련된 이들이 대부분 남인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문헌 등을 통하여 천주교가 邪學임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천주교 사건이 발생하면서 공서파는 이전의 이론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적인 척사 활동으로 발전시켰다.35)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호 남인 출신의 이기경은 젊은 시절 채제공 일파인 정약용 · 이승훈 등과 가깝게 지냈다. 그리고 이들과 학문적 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서학서를 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87년 반회사건이 발생한 이후 이들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졌는데, 이것은 이기경의 서학에 대한 사상이 정약용 · 이승훈 등과 달랐기 때문이다. 즉 이기경의 사상이 척사적인 성향을 띄면서, 이를 바탕으로 자신과 사상적 성향이 유사한 홍낙안 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진산사건이 발생하면서 이기경은 채제공 일파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고, 채제공 일파의 정치적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홍인호 일파의 인물들과 관계를 형성하며 척사 활동을 하였다.

 

 

3. 공서파 형성에 끼친 영향


(1) 반회사건(1787)에서의 척사 활동

 

이기경이 본격적으로 척사 활동을 하였던 것은 1791년 진산사건이 발생하면서 부터였다. 그러나 1787년 이기경이 반회사건을 직접 목격하면서, 이기경의 척사 활동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때 이기경의 척사관은 매우 온건하였다. 반회사건을 공론화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홍낙안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더 분명히 드러난다.

 

D-1 : 저들의 소굴이 이미 구성되었고, 사설이 이미 유포되었으니 나무라고 논쟁하고 권면하는 데 힘을 다하지 않으면, 형이 전날에 눈물을 흘리며 말하던 일이 모두 헛일로 돌아가고, 말한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오. 이런 경험에서 지금의 할 일은 오직 죄를 성토하되 대중이 합세하여 배척해야 될 것이오. 마침내 집안의 사람으로 어물어물해서는 안 될 것이오. 우리가 임금 앞에 모두 아뢰지 않는다면 비록 우리들이 입술이 타고 혀가 마르도록 떠들어도 모두 헛수고일 것이오.36)

 

D-2 : 또 다만 그 사학의 도만 공격하고 그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말이 명백해지지 않고 일이 결말이 안 날 것이오. 나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다시 상의하여 그들을 이끌어내고 힘써 말리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래도 어찌할 수 없을 때에 공격하든지 끊어 버리든지 하여도 또한 늦지 않을 것이오.37)

 

사료 D-1에서 홍낙안은 서학의 道뿐만이 아니라 서학을 하는 이들까지 당장 공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하여 사료 D-2에서 이기경은 다시 한 번 그들을 설득하자는 의견을 내고 있다. 그러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계속 서학을 한다면 그때에 공격을 하든지 끊어버리면 된다며 홍낙안을 달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홍낙안은 서학에 관련된 이들까지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히 펼친다.38) 이러한 상황을 봤을 때, 반회 사건이 발생할 당시만 하더라도 이기경이 서학에 관련된 이들을 공격하는 것에 반대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이기경이 서학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내용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E : 그 학문의 십계에는 임금 섬기는 일이 없고,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이 넷째 차례에 가서 있으니, 결코 선비가 볼 만한 것이 못된다. … 백련교의 부적물이 다시 오늘날에 생겨날까 두렵다. … 만일 불법을 좋아하지 아니한 것으로 부혁의 죄로 삼는다면 부적이 이를 때에 지옥의 한 자리는 내가 마땅히 달게 받으리라.39)

 

사료 E는 반회사건 당시 이기경이 정약용에게 보낸 편지로, 서학의 폐단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특히 이기경은 천주교의 십계명과 유교의 忠孝思想을 비교하고 있는데, 천주교의 십계명에서는 유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충효사상 가운데 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효에 대해서는 4번째의 가치로 여긴다고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점만 보더라도 서학은 유학을 아는 선비들로서는 접할 것이 못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기경은 서학 서적을 직접 베껴서 한 권 따로 갖고 있을 정도로 서학에 관심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정도의 관심을 갖고 있던 이기경이 십계명의 여러 계명 가운데서도 특히 충효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 서학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가장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어 백련교와 불교의 맥락에서 서학을 이해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서학이 백련교처럼 사람들을 홀릴까 겁이 난다고 하였으며, 佛法을 비난한 것이 죄가 된다면 지옥에라도 가겠다고 하고 있다. 유학자인 이기경이 지옥을 인정했을 리가 없다는 점에서, 지옥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불법 또한 인정할 수 없으며, 서학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의미이다. 즉 이기경은 서학을 백련교와 불교처럼 생각하고 있었으며, 아울러 사람들을 홀리거나 이성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지옥과 같은 개념을 만들어 내는 비이성적인 종교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다른 척사론자들과 비슷하였다.

 

그러나 서학의 도만 공격하고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 무조건적으로 공격하기보다는 사람들을 다시 설득해 보기를 주장하였다는 점은 이기경이 다른 공서파들과 달랐던 점이다. 특히 정치적 사건으로 쟁점화하기를 원했던 홍낙안과 비교하여 볼 때, 그 차이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반회사건이 발생하였던 무렵 이기경은 서학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교우와의 의리가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반회사건의 발생으로 공서파와 친서파는 분명하게 나뉘게 되었고, 이기경은 공서파에 편입되면서 척사활동을 이끌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홍낙안 등과 가깝게 지내면서 젊은 시절 친구였던 친서파의 정약용 · 이승훈 등과 점차 다른 노선을 걷게 되었다.

 

(2) 진산사건(1791) 무렵 척사 활동의 변화

 

반회사건이 발생한 4년 후인 1791년 조선은 진산사건을 경험한다. 결과적으로 진산사건은 조선에서 천주교도들의 처벌에 대한 前例가 되었으며, 이기경으로서는 이전과는 다른 척사 활동을 펼치고, 공서파 인물들과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조정에서 진산사건이 공론화된 것은 사건이 발생한 지 5개월이 지난 10월 16일 司憲府가40) 상소를 올려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였고, 10월 20일 大司諫 申耆의 상소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공론화되었다. 이때 사헌부에서 상소를 올리도록 척사파들을 결집시킨 사람이 바로 홍낙안이었다. 홍낙안은 진산사건에 대하여 알게 되자, 珍山郡守 申史源에게 그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어 9월 29일 채제공에게 ‘장서’를 보내어 진산사건 및 서학에 관련된 인물들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장서를 복사하여 다음날 유생들에게 통문과 함께 보내며 진산사건을 폭로하였고, 이를 계기로 진산사건은 공론화되기에 이르렀다.41)

 

이때까지 이기경의 활동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는 모친상을 당하여 休職 상태였으므로, 대외적인 활동을 자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홍낙안의 장서에 반회사건이 언급되면서 채제공이 사실 확인을 위하여 이기경을 심문하는 등 이기경 역시 조정에서 진산사건이 공론화되기 전부터 연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때 이기경은 반회사건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즉 반회사건 때에는 관련자들의 처벌을 반대하였지만, 진산사건 때에는 관련자들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진산사건이 공론화되기 직전인 10월 7일 채제공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처음으로 드러났다.

 

F : 합하께서는 이번 일을 가히 磨滅함으로써 덮어두시렵니까? 죄소인이 생각하건데 이것은 사람이냐 짐승이냐, 중국인이냐 오랑캐냐의 첫 번째 큰 관계를 (결정)짓는 것이오니, 만일 명백하지 않게 기준을 세우시면 비록 형장은 면한다 할지라도 다만 오랑캐이며 禽獸일 것입니다. … 죄소인이 심문받는 자리에서 말씀드리면서 단지 그 줄거리만 들려드렸으므로, 합하께서는 혹시 승훈을 조금이라도 용서할 가망이 있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는 자신이 진사(라는 것으)로서 원점을 거짓 핑계 삼아 그 부형을 속이면서, 널리 무리를 모아 邪說을 펴놓고 강론하였는데도 합하께서는 이런 것을 용서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 승훈이 본 것은 장차 그 교리를 널리 선포하여 천하를 바꾸어 놓은 다음에야 끝날 것인데 이것이 과연 꼭 같은 것입니까?42)

 

사료 F에서 이기경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이승훈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는 앞서 살펴본 사료 B-2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이기경의 변화는 진산사건이 공론화되어 윤지충 · 권상연 등의 처벌이 결정된 직후, 이기경이 정조에게 반회사건의 전모를 폭로한 상소에서도 잘 드러난다.43) 척사 활동만이 목적이었다면, 사건이 해결되고 있는 무렵에 다시 상소를 올릴 이유가 없었을 텐데, 굳이 이기경은 자신의 결백을 밝히겠다며 상소를 올린다. 그리고 이 상소에서 이기경은 반회사건의 전말 및 관련자들의 실명을 언급하는 동시에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서학과 그 폐단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사료 F와 이 상소를 연관하여 보았을 때, 이기경은 서학의 폐단을 언급하며 서학에 대하여 더 강력하게 대응하는 동시에 관련자들을 처벌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기경의 척사 활동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이자, 상소를 올린 직접적인 이유였던 것이다.

 

이 무렵 이기경은 여러 곳에서 비난을 받는 등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正祖는 11월 9일 더 이상 조정에서는 이 사건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으며,44) 이어 11월 13일 윤지충과 권상연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처럼 진산사건의 당사자들을 처벌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지으려는 정조에게 이기경은 오히려 반회사건을 들추어내면서 서학 문제를 다시 한 번 제기한 것이다. 이것은 서학의 중독성과 그 폐단을 밝히며, 강력하게 척사를 진행시킬 필요를 느낀 유학자로서의 판단 때문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는 서학과 관련된 이들 가운데 蔡濟恭 일파의 인물들이 많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를 이용하고자 하는 정치적 판단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서학 관련자들을 모두 밝혀내어 처벌함으로써 채제공 일파에게 타격을 주려고 하였던 것이다.45)

 

이러한 李基慶의 정치적 의도가 분명히 드러났기 때문에, 이기경은 진산사건이 공론화되는 과정에서부터 여러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기경의 이름이 조정에서 처음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10월 30일 홍낙안이 심문을 당한 직후였다. 홍낙안의 경우 채제공에게 ‘장서’를 보내고 유생들에게 통문을 돌렸기 때문에, 진산사건이 조정에서 공론화 된 직후부터 그에 대한 조사를 주장하는 상소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에 홍낙안은 승정원에서 심문을 당하였고,46) 그 가운데 반회사건의 목격자로 이기경을 언급함에 따라, 곧 이기경은 비변사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리고 이때 이기경은 “이승훈과 함께 서학서를 본 적이 있다” 정도의 진술을 하였다.47) 그러나 사흘 후인 11월 8일 이승훈은 이기경에 대하여 절대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 평가하며,48) 공식적으로 이기경을 비난하였다. 이러한 이승훈의 비난은 이기경이 서학 관련 인물로 이승훈을 지칭했다는 점에서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기경에 대한 비난은 이승훈에게서 그치지 않았다. 진산사건이 진행되면서 이기경과 홍낙안에게는 서학이 만연되었다는 근거를 제시하라는 여론의 압력과 함께 이기경 또한 서학서를 접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상소와 진술이 나오기 시작하였다.49) 老論의 宋翼孝도 11월 11일 이승훈의 부친 李東郁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리면서, 이기경에 대하여 “‘간간이 좋은 곳이 있다’고 하고 하여 겉으로는 배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보호하니 말의 뜻이 괴탄하고 비밀스러워 온전히 깊이 끊는 뜻이 없습니다”라고50) 평가하였다. 이에 정조는 이기경에 대하여 “가증스러워 바로 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라고 비난하였다.51)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11월 13일 상소를 이기경이 올린 다음 날, 이기경은 같은 공서파라 할 수 있는 홍인호에게서조차 비난을 받는다.52) 결국 이기경은 正祖에게 상소를 올린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경원부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진산사건을 통하여 이기경은 공서파로 분류되기 시작하였고, 아울러 공서파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는 이기경이 채제공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낙안과 화합하고 응하여 선비들을 일망타진하려 했다고 하는 것은 천주학을 하는 자들이 죄소인의 일생을 덮어버리려는 하나의 구실인데…”라고53) 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보면 당시 공서파에서 친서파를 공격하여 채제공 일파를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친서파를 공격하는 공서파의 활동에 대하여 단순한 척사 활동이 아닌 정치적 의도가 내포된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눌암기략》의 기록에도 “이기경 · 홍낙안 · 목만중 · 강준흠 등과 절교하지 않는 이들은 사흉팔적으로 몰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서 四凶은 이재기, 李遠揆, 成永愚, 睦仁圭이고, 八賊은 사흉에다가 趙重日, 尹益培, 崔照, 金鼎元을 포함한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이기경 · 홍낙안 · 목만중 · 강준흠 등이 같은 남인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남인 내에서는 이들과 절교를 하는 이들이 많았으며, 그들과 절교하지 않는 이들도 다른 이들로부터 절교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54) 특히 그동안 정권을 잡지 못하던 남인이 정권을 잡았는데, 공서파가 친서파를 공격함으로써 남인이 분화되었고, 결국 노론에게 정권을 빼앗기게 되었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즉 당시 남인 내에서도 공서파의 활동을 단순히 척사가 아닌 분명한 정치적 움직임으로 읽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공서파를 형성하고 있던 인물이 바로 홍인호였다. 진산사건에서 홍인호는 이기경과의 관련성을 부인하였지만, 그는 분명히 이기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던 인물이었다. 이기경이 유배를 떠난 다음 달 홍인호가 정조에게 올렸던 상소를 살펴보도록 하자.

 

G : 이기경은 초기에 진술한 말에 서로 틀린 데가 있다 했고, 그가 상소로 변론한 뜻을 써서 대신에게 고하고 이어서 글을 후원에서 올리는 사유를 낙안이 와서 전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기경이 진실로 스스로 변명한다면 다른 사람이 권고하고 말릴 수도 없는데 글을 후원에 올렸다는 일은 전에 듣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송익효의 상소에 대해 비답을 내리신데 대하여는 낙안이 또 와서 말하기를 “지금 기경이 상중에 있으므로 종당에 한 번도 폭로하지 못하였다”고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과연 실상이 매우 억울하다면 거상 중에 상소한 것도 또한 예가 없지 않다”고 일렀을 따름입니다.55)

 

사료 G에서 이기경은 자신을 경원부로 유배가게 한 그 상소에 대하여, 사전에 홍인호에게 올려도 괜찮을지를 물어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소를 올리기 전에도 홍낙안을 통하여 여러 차례 홍인호에게 의견을 묻고 있는 것 또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봤을 때, 비록 홍인호가 이기경의 상소를 직접 보지는 않았더라도 그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기경이 올린 상소는 반회사건 관련자들의 실명을 거론하고, 척사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상소였다. 당시 조선이 서학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을 하고 있을 때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이러한 중요한 상소를 이기경이 단독 판단으로 올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기경은 홍낙안을 거쳐 홍인호에게 의견을 물어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이기경과 홍낙안의 배후에 홍인호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의 관계는 1793년 이후의 행적을 살펴보면 더 잘 드러난다. 진산사건에 연루되어 공서파에서 유일하게 유배를 떠났던 이기경은 1794년 해배되었지만 인간 관계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56) 이러한 상황에서 이기경은 홍낙안과 더욱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홍인호 등과 급속도로 가까워지며 공서파의 세력을 넓혀 나갔다. 《訥菴記略》의 다음 내용을 살펴보자.

 

H : 홍낙안과 이기경이 곤궁해져 돌아갈 곳이 없게 되자, 계축년(1793) 후에 운백(홍인호)에게 돌아갔다. 양쪽의 궁함이 서로 들어맞은 것이다. 운백(홍인호) 부자는 이전까지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일도 척사한 것에 가까운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에 이르자, 모든 사람에게 추대되어 화심의 영수라고 하니 가소롭다.

 

사료 H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기경과 홍낙안은 진산사건 이후 홍인호와 급속도록 가까워진다. 홍인호는 이기경이 진산사건에서 정조에게 상소를 올리도록 조언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기경의 유배가 결정되자 오히려 이기경을 비난하였다.57)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홍인호와 이기경은 홍낙안을 중심으로 하여 진산사건 당시에도 연결되고 있었다. 게다가 활발한 斥邪 활동을 펼쳤던 이기경의 약력과 홍인호의 정치적 기반이라는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음으로써 가까운 사이로의 발전이 가능하였다. 특히 양쪽 모두 남인이면서도 채제공 계열과 정치적으로 대립 관계였다는 점에서 더욱 뜻이 잘 맞았다. 이 과정에서 홍인호는 공서파의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비록 진산사건으로 인하여 이기경은 유배를 떠나게 되었지만, 이로써 대표적인 공서파로 부각된다는 점에서 진산사건은 이기경에게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공서파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반회사건 당시 드러난 공서파와 친서파가 진산사건을 통하여 적극 대립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공서파와 친서파의 윤곽이 거의 드러났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물론 이때의 이기경이 공서파 형성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고 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젊은 이기경과 홍낙안의 배후에 정치가 홍인호가 있었고, 그를 통하여 공서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아울러 척사를 공개적으로 밝힌 목만중을 중심으로 젊은이들이 모이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이 겉으로 드러나게 되는 계기가 바로 진산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서파가 그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기경이 친서파로 분류된 인물들과 가까운 관계였고 아울러 반회사건을 목격하는 등 친서파에 대한 정보가 많아서 가능한 것이었다. 즉 이기경이 공서파 형성의 주도적 인물은 아니었지만, 공서파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4. 맺음말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기경은 당시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던 사건 등에 연루되어 여러 차례 유배 생활을 하였던 인물이다. 그 중 첫 번째 유배는 서학과 관련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기경이 친서파가 아닌 공서파였다는 점이다. 기호 남인 출신이었던 이기경은 반회사건을 직접 목격함으로써 서학 사건들과 연관을 맺기 시작하였고, 진산사건에서 강력한 척사를 주장하면서 올린 상소가 문제가 되어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진산사건은 이기경에게 전환점으로 작용하였다. 이전까지 서학을 포함하여 학문적 교류를 하며 가깝게 지내던 정약용 · 이승훈 등의 친서파 인물들과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홍낙안 · 강준흠 · 목만중 등과 공서파를 형성하며 척사 활동에 앞장서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진산사건으로 인하여 떠난 유배 생활 동안 〈尋眞曲〉 · 〈浪遊詞〉 등의 闢異歌辭를 작성하면서 척사 활동의 폭을 정치적인 면에서 시문학 작성으로까지 확대하였다.

 

그러나 그가 다른 공서파와 차이가 나는 점은 그의 척사 활동의 변화이다. 반회사건(1787)이 발생하였을 무렵에도 그는 서학의 도에 대하여 비난하고 있지만, 서학 관련자들을 처벌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강력하게 관련자 처벌을 주장하고 있는 홍낙안과 비교하였을 때 두드러진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4년 후에 발생한 진산사건에서는 홍낙안과 함께 서학 관련자들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며, 자신이 목격한 반회사건과 친서파와 함께 서학을 교류하였던 경험에 대하여 폭로한다. 즉 반회사건을 통하여 척사 활동과 관련을 맺은 이기경은 진산사건을 통하여 홍낙안과 강준흠, 목만중 등과 함께 공서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특히 이기경이 친서파와 가깝게 지내면서 경험하였던 서학은 척사파의 서학 문제 제기를 가능하게 하였고, 이 점에서 이기경은 공서파 형성의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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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이후 모든 날짜는 음력. 2) 진산사건을 비롯하여 18세기 후반 조선의 서학 수용과 그에 대한 반발에 관한 천주교회사와 정치사 분야의 연구는 다음과 같다. 李能和, 〈朝鮮基督敎及外交史〉, 學文閣, 1968 ; 금장태, 〈천주교의 전래와 서구사상의 수용〉, 《한국철학연구》 下, 동명사, 1978 ; 유봉학, 〈18세기 南人의 분열과 畿湖南人 學統의 성립〉, 《한신대논문집》, 1983 ; 朴光用, 〈英 · 正祖代 南人 세력의 정치적 위치와 西學政策〉, 《한국교회사논문집》 Ⅱ, 1985 ; 이태진,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 연구원, 1985 ; 李佑成, 〈韓國 儒學史上 退溪學派의 形成과 그 展開〉, 《韓國의 歷史上》, 창작과 비평사, 1986 ; 崔東熙, 《서학에 대한 한국 실학의 반응》,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 姜光植, 〈朝鮮朝 朋黨政治文化의 構造와 機能〉, 《정신문화연구》 13-4, 1990 ; 李成茂, 〈朝鮮後期 黨爭 硏究의 方向〉, 《朝鮮後期 黨爭의 綜合的 檢討》,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 車基眞, 〈조선후기 信西 信攻의 대립과 斥西論의 성격〉, 《교회와 역사》 191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 김준석, 〈조선후기 당쟁과 왕권론의 추이〉, 《조선후기 당쟁의 종합적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 박광용, 〈조선후기 당쟁과 정치 운영론의 변천〉, 《조선후기 당쟁의 종합적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 정만조, 〈조선시대 붕당론의 전개와 그 성격〉, 《조선후기 당쟁의 종합적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 車基眞, 〈18세기 기호남인의 척사론과 그 성격〉, 《창해 박병국 교수 정년기념 사학논총》, 1994 ; 車基眞, 〈星湖學派의 西學 認識과 斥邪論에 대한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 논문, 1995 ; 도널드 베이커, 김세운 역, 《조선후기 유교와 천주교의 대립》, 일조각, 1997 ; 송갑준, 〈천주교의 전래와 비판-성호학파를 중심으로〉, 《실학사상과 근대성》, 예문서원, 1998 ; 김진호, 〈정조 15년(1791) ‘장서사건’과 채제공〉, 서강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 안재순, 〈정조의 서학관〉, 《동양철학연구》 27, 2001 ; 이상호, 〈초기 서학의 전래와 유교적 대응〉, 《동양철학연구》 27, 동양철학연구소, 2001 ; 車基眞, 《조선후기의 서학과 척사론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등을 참고.

특이한 점은 천주교회사 연구와 정치사 연구를 분류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인데, 이는 천주교적인 사건이 정치적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3) 보통의 연구에서는 채제공 일파와 홍인호 일파라는 용어가 아니라, 親西派(혹은 信西派)와 攻西派, 蔡黨과 洪黨 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이 글에서는 채제공 일파의 대부분이 천주교와 직 ·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홍인호 일파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는 점에서, 서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친서파’, 그리고 서학과 관련을 맺는 사람을 공격한다는 의미로 ‘공서파’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겠다. 또한 정치적인 攻西 활동이 아닌 경우에는 ‘斥邪’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4) 전례에 관해서는 다음의 연구들이 있다. 姜燕熙, 〈조선후기 서학의 조상제사 문제〉, 《최석우 신부 화갑기념 한국 교회사 논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崔基福, 〈조선조에 있어서 천주교의 폐제훼주와 유교제례의 근본의미〉, 《최석우 신부 화갑기념 한국교회사 논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주명준, 〈유교전통사회의 조상숭배사상과 천주교의 대응-신해 진산사건을 중심으로〉, 《변태섭 박사 화갑기념 사학논총》, 삼영사, 1985 ; 崔基福, 〈조상제사 문제와 한국천주교회〉,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 崔基福, 〈유교의 제천의례와 가톨릭의 미사성제〉, 《동양철학연구》27, 2001.

 

5) 이기경에 대한 기존 연구로는 홍이섭, 〈《闢衛編》 纂集者 李基慶의 傳記資料-姜浚欽纂 〈弘文館校理李公墓誌銘〉의 소개〉, 《최현배 선생 환갑기념논집》, 사상계사, 1954 ; 홍이섭, 〈소위《闢衛編》의 형성에 대해서〉, 《인문과학》 4,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59가 있다.

 

6) 홍이섭, 〈소위 《闢衛編》의 형성에 대해서〉, 《인문과학》 4,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59에서는 《척암유집》을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 내용을 발췌하여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瘠菴遺稿》와 《瘠菴漫筆》의 소재를 확인할 수 없어서, 이 글에서는 홍이섭의 논문에서 재인용하도록 하겠다.

 

7) 《訥菴記略》은 《부산교회사보》 38~43호에 실린 내용을 인용하였음을 미리 밝힌다.

 

8) 《國朝榜目》에는 尹東壁으로 되어 있으나, 《南譜》의 波平 尹氏에는 尹東璧이라 되어 있다. 또한 《남보》의 이기경 기록에는 ‘벽’자가 정확히 나와 있지 않다. 이 글에서는 국가에서 직접 편찬한 《국조방목》을 따르기로 하겠다.

 

9) 홍이섭, 〈《闢衛編》 纂集者 李基慶의 傳記資料 - 姜浚欽纂 〈弘文館校理李公墓誌銘〉의 소개〉, 《최현배 선생 환갑기념논집》, 사상계사, 1954.

 

10) 丁若鏞 · 李承薰 등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11) 李基慶의 고종사촌이었던 沈浟의 아들 沈東亮이 이승훈의 딸과 혼인을 하였으나, 이기경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제외하였다. 다만 이 사실만으로도 이승훈과 이기경의 사이가 가까웠다는 것은 알 수 있다.

 

12) 1787년에 泮村 金石太의 집에서 李承薰 · 丁若鏞 · 姜履元 등이 모여 천주교 서적을 강습하던 것을 李基慶이 목격한 사건.

 

13) 李基慶 編, 〈진사 이기경의 답하는 편지〉, 《闢衛編》, 曙光社, 1978.

 

14) 李基慶 編, 〈홍진사의 두 번째 편지〉, 《闢衛編》.

 

15) 李基慶 編, 〈진사 정약용이 진사 이기경에게 보낸 편지〉, 《闢衛編》.

 

16) 李基慶 編, 〈이진사의 답하는 편지〉, 《闢衛編》.

 

17) 처음 반회사건을 발설한 사람은 이기경이 아닌 강이원이었다. 그리고 이를 들은 홍낙안이 이기경에게 전모를 알려 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이기경이 반회사건에 대하여 홍낙안에게 알려주었다(이기경 편, 〈진사 홍낙안이 진사 이기경에게 보내는 편지〉, 《闢衛編》).

 

18) 《正祖實錄》 정조 15년 10월 30일조.

 

19) 丁若鏞, 〈自撰墓誌銘〉.

 

20) 진산사건이 조정에서 공론화되기 직전, 홍낙안은 채제공에게 ‘長書’를 보내어 진산사건의 엄중한 처벌을 요구한다. 이때 반회사건이 거론되어 있었기 때문에 채제공이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이기경을 심문하였는데, 그 기록이 사실과 다르다며 이기경이 정정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낸다. 여기에서 거론되는 편지가 바로 이것이다.

 

21) 《正祖實錄》 정조 15년 11월 13일조.

 

22) 을사추조적발사건이 발생하자 이승훈의 아버지 李東郁은 집에 있는 모든 서학서를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이승훈은 벽이문과 벽이시를 지어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뜻을 주변에 알렸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훈이 가깝지 않은 이들에게 서학서를 빌려주었을 리가 없다.

 

23) 《正祖實錄》 정조 15년 11월 8일조.

 

24) 丁若鏞, 〈自撰墓誌銘〉.

 

25) 丁若鏞, 〈自撰墓誌銘〉.

 

26) 李基慶, 《瘠菴遺稿》(洪以燮, 〈소위 벽위편의 형성에 대하여〉, 《인문과학》제 4집, 1959에서 발췌).

 

27) 季父素隱先生齊 至誠訓誨 每施夏楚輒流涕(姜浚欽, 〈弘文館校理李公墓誌銘〉).

 

28) 정약용, 〈先仲氏墓誌銘〉, 《與猶堂全書》.

 

29) 丁若鏞, 〈自撰墓誌銘〉.

 

30) 차기진, 〈성호학파의 서학 인식과 척사론에 관한 연구〉, 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5, 211쪽.

 

31) 차기진, 《조선후기의 서학과 척사론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261쪽.

 

32) 〈答李注書休吉基慶書〉, 《順菴先生文集》 권 8.

 

33) 答李休吉 李基慶字, 以攻西學名者也, 官校理 (《順菴集》).

 

34) 이에 대하여 차기진은 기호남인 내에 순암계와 녹암계와는 상관 없이, 정치적 측면을 고려하여 목만중의 호를 따서 여와계를 새로 설정하였다. 이는 목만중이 이들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여와계에는 홍낙안 · 이기경 · 강세정 · 강준흠 · 성정진 · 성영우 · 목인규 등이 포함되었고, 순암계의 심유와 김원성 등이 그 뜻에 동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차기진, 앞의 글, 232쪽).

 

35) 이 사건은 서학을 단순히 학문적 차원이 아닌 종교로서 수용하는 이들이 있음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특히 서학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았던 남인 내에서는 서학의 종교화에 대한 우려를 표방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안정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이후 여러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1786년 채제공은 〈不衰軒記〉에서 서학을 배척하여야 함을 주장하고 동시에 안정복의 척사 노력을 높이 평가하였고, 1787년에는 李獻慶이 〈天學問答〉을 통하여 천주교 및 서구 학문을 비판하였다. 즉 남인 내에서 계속하여 서학이 종교로 변화해가는 과정에 심한 우려를 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36) 李基慶 編, 〈진사 홍낙안이 진사 이기경에게 보내는 편지〉, 《闢衛編》.

 

37) 李基慶 編, 〈진사 이기경의 답하는 편지〉, 《闢衛編》, 104쪽.

 

38) 李基慶 編, 〈홍진사의 두 번째 편지〉, 105쪽.

 

39) 李基慶 編, 〈이진사의 답하는 편지〉, 《闢衛編》.

 

40) 《正祖實錄》, 정조 15년 10월 16일조.

 

41) 김진호, 〈정조 15년(1791) ‘장서사건’과 채제공〉, 서강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42) 李基慶 編, 〈다시 좌상에게 올리는 글〉, 《벽위편》, 曙光社, 1978.

 

43) 《正祖實錄》, 정조 15년 11월 13일조.

 

44) 《正祖實錄》, 정조 15년 11월 13일조.

 

45) 李在璣, 《눌암기략》.

 

46) 《正祖實錄》, 정조 15년 11월 3일조. 이때 홍낙안의 심문을 담당하였던 사람은 洪仁浩였다.

 

47) 《正祖實錄》정조 15년 11월 5일조.

 

48) 각주 24번 참조.

 

49) 李在璣, 《訥菴記略》.

 

50) 《承政院日記》, 정조 15년 11월 11일조.

 

51) 《正祖實錄》, 정조 15년 11월 11일조.

 

52) 《正祖實錄》, 정조 15년 11월 14일조.

 

53) 李基慶 編, 〈이기경의 두 번째 편지〉, 《闢衛編》.

 

54) 李在璣, 《訥菴記略》 ; 물론 이들 스스로 자신들을 공서파로 인식하였는가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이재기의 경우 《눌암기략》에서 공서파로 분류된 이기경과 홍낙안 등에 대하여 강도 높은 비난을 하고 있는 동시에, 채제공 계열의 인물들 또한 비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만을 살펴본다면 이재기 등을 새로운 집단으로 파악하여야 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당대인들로부터 이들은 사흉팔적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들 모두 친서계를 공격하는 상소와 직 ·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55) 《正祖實錄》, 정조 15년 11월 14일조. 

 

56) 이기경은 1795년 2월 司憲府持平을 시작으로 다시 관직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이기경의 교우관계는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의 〈自撰墓誌銘〉에 따르면 “이기경이 풀려온 지 꽤 지나자 점차로 조정에 들어와 벼슬하게 되었는데 아는 친구로서 그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만이 홀로 옛날처럼 안부와 날씨를 물으며 평상시처럼 지냈다”고 전하고 있다.

 

57) 《정조실록》, 정조 15년 11월 14일조.

 

[교회사 연구 제30집, 2008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가람(서강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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