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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해방 후 한센인 관련 사회사업: 천주교계의 활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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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8-21 ㅣ No.1279

해방 후 한센인 관련 사회사업

- 천주교계의 활동을 중심으로 -

 

 

1. 들어가며

 

세속화된 사회에서 교회는 사회적 타자에 대해 어떤 역할을 하는가?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제도화되었을 때의 효과는 무엇인가? 한국은 상대적으로 사회적 복지 체계가 취약한 사회이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 보장이 취약하기에 민간 사회사업단체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타자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행하고 있는 대표적인 집단인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특히 근대적 국가 사회가 형성된 이후 대표적인 사회적 타자 집단으로 규정되어 관리되어온 한센인과 천주교와의 관계를 고찰해 교회 사회사업의 역할과 한센인들에 대한 영향 관계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교회의 사회사업은 사회적 타자 집단에 대해 영혼의 구원이라는 차원은 물론, 생존의 근거까지 마련해주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본 연구는 한센인들에게 천주교의 사회사업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사회사업이란 사랑의 실천이라는 선한 의도로 시작이 되기는 하지만, 사회사업 시행자와 수혜자 사이의 불균등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는 그것이 대등한 관계로 인식되지 않고 일종의 위계질서적 감각을 형성하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외부 커뮤니티 및 사회와의 관계가 단절된 이들에게 종교를 매개로 한 네트워크와 자원은 한센인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실질적으로 사회로의 참여가 배제된 상황에서 한센인들이 접근 가능한 거의 유일한 외부로의 통로 혹은 관계는 교회를 통한 것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적 타자에 대한 교회의 개입과 실천은 보다 면밀한 주의가 요구되는 측면이 있다.

 

 

2. 기존 연구 검토

 

한국의 한센관련 사회사업에 대해서는 대개 천주교나 교회의 사업을 통시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우선 천주교의 역할에 대해서는 최시룡, 장정란, 박문수 등의 연구1)와 《성 라자로마을 50년사》, 《천주교 구라사》등 한센인 관련 기관의 기념사들이 있다. 구라 사업에 종사한 여러 성직자, 수도자, 전문가 등과 사업 자체에 대한 연구와 기록은 존재하지만 한센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다소 부족한 실정이다. 반면 산청 성심원의 기념사인 《예수 성심의 마을》은 충실한 구술 기록을 통해 한센인의 역할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한국 한센인에 대한 논의로는 정근식의 연구가 있다.2) 정근식은 한센인과 선교사와의 관계에 대해 논의하며, 한센인과 그리스도교의 관계에 대해 구성주의적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 한센병 자체의 질병적인 성격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교리와의 관련성으로 인해 한센인에 대한 사업 자체가 강화되고 강조되었다는 논의이다. 이는 미국의 인류학자 구소의 관점을 채택한 것으로, 한센병에 대한 사회문화적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정근식은 이외에도 한센인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구술사 자료집을 편찬했으며, 국가인권위원회의 한센인 인권실태조사를 실시했다.

 

구소3)는 나병4)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것은 성경에서 강조하는 도덕률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질병이 한 사회에서 도드라지게 되는 것은 단순히 질병 자체의 물리적인 창궐로 인해서가 아니라 문화적 요인이 작동하는데, 사회가 추구하는 도덕적 가치관과 연동되어 그것의 타자로서 등장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20세기 나병에 대한 스티그마화는 20세기에 나병의 증가로 인해서가 아니라 사회도덕적인 맥락에서 발현된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병은 도덕적인 나태와 무능력과 연관되는 것으로 인식되던 질병이었다.

 

한센병 자체에 대한 사회문화적인 구성주의적 관점뿐 아니라, 외원 단체 및 선교사의 역할에 대하여 문화제국주의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연구도 있다. 대표적으로 모블로5)는 다미안 신부의 신화화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를 했다. 다미안 신부에 대한 성화와 신화화 뒤에는 당시 하와이의 칼라우파파에서 거주하고 삶을 위해 투쟁하고 있던 한센인들에 대한 타자화가 작동하고 있다고 연구는 지적한다. 다미안 신부에 대한 시각은 시대를 따라 변화하며, 마찬가지로 하와이인들에 대한 시각도 같이 변화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의존적인 어린이에 대한 부모와 같은 관계로 고정되어 있었다. 비도덕적이고 성적으로 문란하며, 규율화되지 않은 원주민 출신의 나환자를 구원하는 도덕적인 그리스도교인 다미안 신부라는 관계에 대한 강조의 이면에는 하와이 나환자들의 자발적 투쟁과 역할이 배제되었다고 연구자는 주장한다.

 

기존 연구들을 살펴보면 그리스도교 선교사에 의해 행해졌던 한센인/나환자에 대한 사회사업과 자선사업들이 그리스도교적 교리를 보다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으며 그 과정에서 한센인들에 대한 타자화가 가속화되었다는 주장들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종교 단체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구라사업이 한센인들의 타자화를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그런 효과만 발생시킨 것은 아니다. 물론 교회의 교리와 연관되어 어떤 타자성이 의도치 않게 부각이 되거나, 그리스도교 교리의 증거로서 역할하는 경우6)도 있다. 하지만 사회적 타자와 교회의 관계는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역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교회는 한센인들의 삶에 다양한 차원에서 영향을 미쳤다.

 

 

3. 한센인 위치짓기

 

본 연구는 한센인을 한국 사회의 대표적이고 역사적인 사회적 타자 집단으로 바라보고 있다. 타자에 대한 이론적인 논의는 다양하지만, 본 연구는 사회적 타자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첫 번째로,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자들7)이다. 사회적인 공론 공간에서 자신들을 대변하여 의사 소통을 해내거나 자신의 권익을 위해 투쟁할 힘이 미약하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권력의 언어에 의해 규정이 되며 자신들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없다. 두 번째로, 사회적으로 형성된 편견/차별적 인식은 이들의 삶에 강한 규정력을 갖는다. 권력의 언어를 가진 이들에 의해 규정된 지식체계와 재현들이 이들에 대한 인식을 결정짓는다. 세 번째로, 이들은 사회에서 격리되어 폐쇄된 공동체에서 살아간다. 사회적 타자들은 교육, 직업, 결혼 등 사회화를 결정짓는 주요한 과정에서 배제되어 한정된 물질적 ‧ 문화적 자원을 가지고 살아간다. 또한 자원을 습득하는 통로 역시 한정되어 있다. 다음에서는 위에 규정된 한센인의 타자적 성격과 한국에서 한센인8)이 위치지워진 구체적 역사 과정과 대비하여 논의하겠다.

 

1) 공식적 격리정책의 폐지

 

1958년 11월 도쿄에서 열린 WHO위원회는 “강제 격리를 만장일치로 거부한다. 나환자 수용소는 입원이 필요한 아주 전염성이 심하거나 회복기의 환자를 치료할 수 있으며, 또한 외과적인 수술환자의 회복이나 전문적인 재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기관으로 재편해야만 한다”9)고 결의했다. 이런 세계적 조류와 발맞추어 일제시대 이후 강력하게 실시되던 한센인 격리정책은 공식적으로는 폐지가 되고, 사회 속에서의 치료, 사회 복귀를 위해 정착사업 등 여러 장치가 시도되었다. 1961년 WHO의 나병 고문관 트랩맨 박사가 방한해서, 20만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기로 합의한 후, 정착시범사업이 시작되었다. 1963년에는 전염병 예방법에서 나병환자 격리 규정을 폐기하여, 법적인 격리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공식적 격리의 폐지 이후에도, ‘강송’이란 제도가 존속되어 부랑 한센인 등을 단속해 소록도로 강제송환을 했다. 이런 제도는 198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부랑인이 아니고, 양성환자가 아닌 경우에도 ‘강송’으로 소록도에 보내지기도 했다. 법적 격리정책의 폐지 이후에도 한센인에 대한 준공식적 격리가 지속된 셈이다.

 

2) 사회적 격리의 존속과 심화

 

법적인 격리가 폐지되었다고 해서 한센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격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해방 후 전쟁기에는 한센인에 대한 집단 학살10)로까지 등장했던 한센인에 대한 편견, 두려움, 차별은 사회 속에 지속적으로 존재해 갈등의 국면에서는 여러 사건으로 폭발했다.

 

과거 한센인들에게 덧씌워진 대표적인 이미지는 전염성이 강한 질병, 치료불가능한 병, 아이를 유기해서 식인하는 집단 등이었다. ‘문둥이’, ‘나병환자’라 불리던 이들은 어린아이를 유괴에 식인한다는 인식이 있어서 인근 공동체에서 어린이가 실종이 되면 모든 책임을 한센인에게 돌려 폭력적 사태가 벌어지는 경우도 빈번했다. 이런 경향은 1991년의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에까지 이어져 인근의 정착촌 주민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한편으로는 한센병이 강한 전염력을 가지고 있으며 치료불가능한 병이라 인식되어, 일반인들은 한센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고 차별했다. 소위 음성 나환자, 즉 완치된 한센인의 경우에는 외상이 남아 있는 경우에도 영원히 한센인이라 낙인이 찍혀 차별을 받았다.

 

극심한 사회적 차별과 편견으로 인해 한센인들의 일반사회로의 사회복귀는 무척 어려웠다. 교육과정11)에부터 배제되었으며, 취업 및 결혼12) 등 사회화의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왔다. 시설에 수용되어 있던 한센인들은 정착촌 사업 실시 이후 독자적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지역에서 정착을 시작할 경우에는 인근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 심한 경우에는 방화․구타․폭력 등이 발생했다. 정착촌 초기에는 인근 지역 주민들이 “죽창을 들고 입주를 반대하고 다툼이 대단했다. 주변 동네 사람들의 자녀들 결혼 문제까지도 어려워진다고 했다.” “초창기에 인근 주민들이 환우들을 해산시키려고 의용소방대와 함께 밤중에 쳐들어와 움막에 불을 지르고 환우들을 폭행하여 강제 해산시키려고 시도했다.”13)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정착을 한 경우에도 한센인들에 대한 차별은 그들의 자손들에게까지도 지속되었다. ‘미감아’라는 차별적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 자손들은 아직 병에 걸리지 않은 이들이라 인식되며 잠재적 감염자로 인식되었다. 1970년대에는 한센인 자녀의 초등학교 입학을 거부하는 사건이 빈번히 발생했다.

 

○○마을이 형성되고 주위의 환자들이 모여 인구수가 140명 정도 되니, 학교에 입학할 아이들이 있어 학교에 보내려 하니 인근 학부형들이 대창을 준비하여 막아 아이들을 학교에도 보내지 못했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여 우리 마을 주민들과 학부형들과 상당기간 싸움을 하면서 지금은 폐교가 된 ○○학교와의 싸움 중 우리 마을 주민들은 상당수가 학부형들한테 맞아 부상을 당하고 학교 유리창이 전부 부서지는 와중에 1964년에 분교를 세우기로 하고, 1968년에 분교가 완공되었다. 1998년에 폐교가 되어 초등학교는 분교에서 걱정 없이 공부를 하였지만 중학교부터는 같은 반 학생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면서 제대로 다니지도 못하고 중퇴하는 학생들이 많았다.14)

 

위의 사례에서 잘 드러나듯 한센인과 그의 가족들은 사회와 격리된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미감아’ 차별문제15)나 학살문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타 사회적 공동체와의 관계는 격리되어 있었으며, 그 경계선을 넘어오는 시점에서는 그들의 목숨은 위험에 처하기까지 했다. 1963년의 전염병 예방법 개정 이후 한센인에 대한 격리조항은 사라졌지만 사회적 수준에서의 차별과 격리는 사라지지 않고 심화되었다.

 

사회에서 격리되어 폐쇄되고 고립된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한센인들은, 외부에 의한 폭력뿐 아니라 한센인 사회의 내부의 폭력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었다. 물자를 둘러싼 한센인들간의 다툼이 발생해 사망에까지 이르는 사건이 종종 있었으며, 집단 내부의 구타와 린치가 존재함에도, 다른 곳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지속적으로 폭력에 노출16)된 채 살아왔다.

 

 

4. 천주교계 구라단체와 외국인 구라사업가


1) 구라단체의 활동

 

이런 사회적 차별과 실질적 격리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천주교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고찰에 앞서, 우선 나사업과 관련된 단체와 대표적인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겠다. 천주교의 구라 사업은 초기에는 외원 단체 및 외국인 전문 의료인 중심으로 펼쳐졌으나 차차 한국인 중심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원조는 WHO의 공식적인 원조 이외에도 민간 원조의 형태로 다양히 이루어졌다. 국가 차원의 대표적인 외국인 원조 사업으로는 1961년 9월 WHO와 UNICEF와 한국 정부 사이에서 한센병 관리 사업에 대한 협정을 체결하고, 최초로 나병 고문관인 트랩맨씨가 방한해 활동한 사례가 있다. WHO의 원조 지원으로 1963년에는 월성군 주민검진 표본조사 및 정착 시범 사업 등을 실시했으며, 관련 전문 요원 양성 및 육성 등에 기여했다.17) 1950년대에는 일본 식민주의의 격리 정책이 해방 이후 폐지가 된 후, 국가는 나관리에 대한 적극적 정책을 세우지 못하고, 도시의 부랑 한센인들을 ‘검거’해 소록도로 강송을 보내는 정도의 소극적 정책을 취했었다. 그러나 WHO 및 원조 단체의 지원으로 적극적인 질병 정책과 사회 복귀 정책을 시행하게 된 것이다. WHO의 지원 이외에도 여러 민간 단체18)의 기여가 컸는데, 뒤에서 언급될 천주교계 민간 단체 이외에도 영국구라회 및 대한나협회 등이 존재했다.

 

(1) 천주교 구라회

 

천주교 구라회는 1956년에 창설되어 필리핀 의사 1명과 한국인 의사 4명이 서울, 충남 강경, 충북 옥천, 경남 고성 등에서 상주하며 나환자와 일반 영세민 환자들을 진료했다. 순회 진료는 정기적으로 실시되었고, 구호도 겸했다. 진료 장소는 성당 마당 및 공소를 이용했다.19) 천주교 구라회는 스위니(J. Sweeny, 徐) 신부의 주도로 창설되었는데, 메리놀 외방전교회, 미국 자선단체, 미국인 독지가, 그리고 미국 가톨릭 구제위원회20) 등의 지원을 받아 나환자들을 구제하는데 힘썼다. 한국의 이동 진료 모델은 필리핀의 모델을 기본으로 했으며21), 이동 진료의 시작은 공식적인 격리정책을 폐지하는 것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었다.

 

(2) 가톨릭 나사업 연합회

 

1967년 전국에 산재하여 같은 목적으로 구라 사업을 하고 있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상호 유기적인 협조 아래 구라 사업을 함으로써 함께 연구하고 서로 정보를 교환함으로써 중복된 구호를 없애고 공동으로 정부나 나협회 등 유관 기관과의 협조 등을 목적으로 가톨릭 나사업 연합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연합회의 회원 단체는 8개 기관으로 서울의 가톨릭만성병연구소와 서울천주교구라회가 있고 경기도 시흥의 성 라자로원, 대구의 파티마병원과 경북 칠곡가톨릭피부과의원, 영주시의 다미안의원, 경남 산청의 성심인애원, 전북의 이리성모병원이 회원기관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조직된 가톨릭 나사업 연합회는 기본 사업으로 ① 나병계몽사업 ② 의료사업 ③ 교육사업 ④ 자립사업 ⑤ 불구환자 수용보호사업 ⑥ 후원회 육성사업 등을 벌이고 있다. 나사업의 활동은 초기에는 외국인 성직자 중심으로 이루어지다가 점차 한국인 성직자․의사들의 주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현재는 이동진료와 해외 한센인 관련 지원 사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22) 대표적으로 1989년의 인도의 부랑 나환우 수용시설 건립지원, 1990년의 에티오피아와 마다가스카르, 1991년에는 방글라데시, 1992년에는 방글라데시와 알바니아, 1993년에는 수단, 1994년에는 르완다, 1995년에는 앙골라와 중국을 지원했으며, 사업 영역을 세계적으로 확장하고 있다.23)

 

(3) 서독구라협회

 

독일의 민간 원조 단체로 1958년 창설되었다. 독일 출신의 한센병 전문가인 페론 박사의 헌신적인 봉사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서독구라협회는 피원조지에서 나병 관리사업이 일반 보건사업과 통합 운영되도록 유도해서, 그 나라의 나병 문제가 빠른 시일 안에 해결될 수 있기 위해 일부만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서독구라협회는 1964년 한국에 스틴들 씨를 파견해 한국의 실정을 살피게 했다. 한국 나사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1966년부터 한국에 대한 지원을 실시했다. 서독구라협회는 자체의 프로젝트를 진행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정부와 종교기관이 나병을 관리할 수 있도록 도왔다. 현금 지원과 이동 진료를 지원하며 의료 관련자들에 대한 교육과 월급을 주며 지방에서의 이동 진료를 돕고 있다.24) 서독구라협회는 세계적인 나병인권운동가인 라울 훌레로의 자서전 《서로 사랑하라》를 번역 출간하는 것을 지원하는 등 인식 개선 사업에도 기여했다.

 

(4) 벨기에 다미안 재단

 

다미안 재단은 1964년 벨기에에서 성립되었다. 다미안 재단의 관계자는 1966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으며, 소록도 병원에서 외과 사업을 실시했으며 이동 진료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다미안 재단은 한국에 전문 간호인력을 파견하기도 했다. 다미안 재단의 헌신적인 활동과 한센병자 들에 대한 격의 없는 태도로 인해, 한국인 의료 관계자들이 일상생활에서 한센병과 한센병자에 대한 차별적 인식과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외에도 마리스타 교육수사회, 메리놀 수녀회, 골롬반 수녀회, 성모 영보 수녀회, 성 베네딕도 수녀회,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 등이 전국 각지에서 한센인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25) 프로테스탄트계 외원 단체로는 영국구라회, 미국구라선교회가 한국에서 활동을 했다. 영국구라회는 대구에서 사업을 펼쳤으며 미국구라선교회는 여수 애양원을 지원했다.

 

민간 원조 단체는 아니지만 주목해야할 기관으로 가톨릭한센병연구소가 있다. 가톨릭한센병연구소는 만성병연구소의 후신인데, 만성병연구소는 나병환자 치료에 있어서 재가 환자 치료에 중점을 두었다. 1961년 만성병연구소라는 명칭으로 한센병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재가 한센인에 대한 치료 사업도 시행하게 되었다.26) 현재 한국에는 한센병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연구소는 가톨릭한센병연구소와 한국한센복지협회 산하의 연구소 등 두 개소가 있다. 전문적 의료 연구 기관의 존재는 한센 관련 사업을 실시하는 데 있어, 시혜적 자선주의나 박애주의가 아닌 보다 전문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지원 단체 이외에도 천주교에서는 한센인 요양 시설27)을 운영해왔다. 대표적인 시설로는 안양의 성 라자로마을과 산청의 성심원이 있다.

 

(5) 성 라자로마을

 

성 라자로마을은 1948년에 세워진 인천 간석동의 동인요양소에서 출발했다. 가톨릭 구제회(NCWC)의 책임자인 캐롤(G. Carroll, 安) 몬시뇰의 지원을 받아 1951년 현재 성 라자로마을이 위치한 안양 지역으로 이사 오게 되었다. 초기에는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지원을 받아 시설이 운영되었다. 여러 차례 원장 신부가 바뀌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이경재 신부의 부임 이후 점차 한센인을 위한 시설과 설비 등이 자리잡아갔다. 또한 1955년에는 세계적인 구라사업가인 스위니 신부가 성 라자로요양소에 입주를 했다. 스위니 신부는 미국 코네티컷 출신으로 중국 광동성에서 선교사 활동을 했는데, 중국 광동성에서 나요양소를 설립하며 구라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1953년 중국의 공산화 과정에서 추방되었으며, 그 후 1955년 캐롤 몬시뇰의 요청을 받아 한국에 내한하게 되었다. 스위니 신부는 다미안 듀톤상을 수상하기도 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구라사업가였다. 이후 이경재 신부가 재부임한 후 국내외의 후원회를 조직해 성 라자로마을 돕기회를 활성화했으며, 이런 지원을 토대로 성 라자로마을을 현대화하고 전문적인 요양 기관으로 발전시켜 갔다. ‘그대 있음에’라는 자선 음악회는 대표적인 자선 음악회로 자리를 잡아갔으며, 성 라자로마을 설립 40주년을 맞아 수익금을 성라자로마을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중국, 베트남, 필리핀, 인도, 몽골, 루마니아, 러시아 등의 나환자 요양원과 정착촌, 나병 연구 기관 등에 지원하기 시작했다.28) 성 라자로마을에는 현재 한센인 병력자가 약 40여 명 거주하고 있다. 한센인 하면 성 라자로마을이 떠오를 정도로, 성 라자로마을의 대사회적인 활동은 활발했으며 기부 문화가 척박한 한국에 기부 문화의 씨앗을 뿌리는 데에도 기여했다.

 

(6) 산청 성심원

 

프란치스코회는 진주의 구생원 출신의 환자들을 중심으로 한 1959년 산청 성심원을 설립했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출신인 주 콘스탄시오 신부가 도움을 주었다. 미국의 가톨릭 구제회는 6․25 전쟁 후 미국 정부로부터 잉여 농산물을 가톨릭교회를 통해서 가난한 이들에게 배분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했는데, 진주 지역에서는 주 콘스탄시오 신부에게 이런 권한이 주어졌다.29) 환자들의 노력과 프란치스코회의 지원으로 성심원은 차차 자리를 잡아갔다. 1970년에는 이탈리아관구 소속의 관리 체계에서 한국관구의 창설로 인해 한국관구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성심원은 체계적인 양로 ‧ 의료 ‧ 복지 시설로 발전했으며 현재는 200여 명의 한센병 병력자가 거주하고 있다. 현재 성심원은 의료적인 면에서나 문화적인 면에서 한센인 요양 시설 중 가장 선진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성심원은 천주교계 사회사업의 여러 장점을 보여주는 시설이다. 개별 교회 중심의 프로테스탄트 사회사업의 경우 자금과 전문성의 측면에서 모두 열악해, 시설 운영자들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우도 있고 전체 조직의 감사기능이 부재해 다소 시설이 부패의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다. 반면 성심원과 같이 수도회 소속의 사회사업의 경우, 더 넓은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자금과 전문성을 확보하기가 보다 용이하고, 한편 수도회, 교구, 지방자치단체의 삼각관계로 이어지는 관리 감독 체계하에서 보다 투명하고 효율적인 운영을 할 수 있게 된다.

 

2) 외국인 구라사업가

 

(1) 스위니 신부

 

1895년 미국에서 출생하여, 1920년 메리놀 외방전교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21년에는 한국, 중국, 만주 등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1945년에는 중국에서 구라 사업을, 1956년에는 천주교 구라회를 창설했다. 스위니 신부는 1955년 한국에 다시 왔는데 “동양의 조그마한 나라 한국의 나환자들은 세계 어느 나라의 나환자들보다도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의 얕은 지식과 부족한 능력이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한국에 가서 그들과 함께 살기로 하겠나이다”30)라고 한국 부임의 뜻을 밝혔다. 스위니 신부는 천주교 구라회의 이동 진료, 가톨릭만성병연구소의 창설에의 기여, 가톨릭 구제회의 원조 물자 공급 등 초창기 구라 활동의 초석을 쌓았다.

 

(2) 디오메테스 메텔스 수녀

 

1909년 독일에서 태어났으며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수녀원에 입회했다. 1937년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 왔다. 의사면허 및 개업 신청을 했으나 기각되어서, 제국대학에서 수습의 과정을 거친 후 국가고시를 치른 후 1940년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6․25전쟁 이후 남한에 와서 한센인 관련 의술 사업을 펼쳤으며, 환자촌을 인근 동네로부터 분리시키고 있는 개울에 다리를 놓는 사업을 주선했다.31)

 

(3) 엠마 프라이징거

 

오스트리아 출신의 엠마 프라이징거는 오스트리아 국립 간호대학교를 졸업하고 29세에 한국에 와서 대구의 한센인들을 돌보며 구라 사업을 시작했다. 가톨릭 피부과병원을 운영했으며, 재정 지원은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 서독구라협회 등에서 받았다. 프라이징거 원장의 활동은 단순히 치료에 그치지 않고 나환자에 대한 복합적인 사회복지사업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1972년부터 7억 2천여만 원을 지원해서 각 의료 기관이 이동진료반을 운영하도록 했으며, 나병 후유증으로 생긴 각종 기형환자 3,532명의 재활수술 의약품 지원사업 등을 했다. 교육 부문에 있어서 계몽을 위한 잡지 《복지》 발간, 극빈 나환자 자녀 교육 및 음성 나환자 직업 보도 등의 지원을 했다.32) 그녀는 나환자촌 자활대책 3개년 계획을 마련해 정착장 새마을운동을 실시했다. 1개년에는 가톨릭 산하 40개 정착장 실태 조사를 실시했으며, 각개 정착장의 환경 실태에 맞는 산업을 2년간 집중 지원했다. 이 사업을 위한 재정적 뒷받침은 서독구라협회가 담당했으며, 그녀는 지원이 여러 창구로 퍼져 있던 것을 모두 나사업 연합회를 통해서 하도록 단일화해서 정착장의 생활 격차를 평준화하게 했다.33) 엠마 프라이징거는 “이웃은 물론 가족들에게마저 외면당한 나환자들의 뼈아픈 서러움과 외로움을 달래주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습니다”34)라고 말하며 한센인들과 밀착된 생활을 공유하는 데 노력했다.

 

이외에도 성심원 창립에 기여한 주 콘스탄시오 신부, 정 시모네 신부 등 다수의 외국인 선교사, 성직자, 평신도 전문가 등이 한국의 구라 사업 영역에서 활동했다. 순수한 성직자인 경우도 있었으며, 의료적 전문지식을 지닌 이들이 한센 사업에 종사했다. 이들이 한센 사업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보면 다미안 신부의 자서전을 읽고 감동을 받아 사업을 하게 되었다는 경우가 많다. 한편 중국에서의 선교 및 구라 사업 경험자들이, 중국이 공산화된 후 한국에 오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의 헌신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시설 운영의 과정에서 한센인들과 충돌을 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는 한국과 서구의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한센인들의 특수한 사회적 위치로 인해, 이들 사회사업가들과의 갈등은 보다 증폭되기도 했다.

 

 

5. 외원 단체의 구라 사업과 한센인에 대한 영향

 

외원 단체와 외원 기관의 사회사업가들의 헌신적인 활동의 성과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외원 단체가 사회사업의 영역을 왜곡시킨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35) 즉 국가 정책화되어서 복지국가의 틀 속에서 체계적으로 발전해야 하고, 사회적 권리로 인식되어야 할 영역들이 개별 사회사업 단체, 특히 종교성을 띤 사회사업 단체의 활약으로 인해 자선과 시혜의 영역으로 왜곡되어 형성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자원이 빈약한 저개발된 국가의 경우 외부의 지원 없이 사회적 타자나 약자들에 대한 자원을 배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사회의 개발 수준이 낙후된 상황에서 의료적 자원, 교육적 자원을 소외된 계층에게까지 배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경우, 외원 단체36)의 역할은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더욱이 한센인과 같은 사회적 타자의 경우 자신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스스로 목소리37)를 내기가 무척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의 재정적 지원이라는 자원과 교파의 지원을 배경으로 한 외원 단체는 정책적인 측면, 사회적인 측면, 문화적인 측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한국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선 외원 단체의 경우 사업 진행에 대한 요구가 발생했을 경우, 한정된 국가 자원에 제한을 받지 않고 외원 단체의 본국 혹은 국제 기구에 요청해 재원을 배분 받아 사업을 독자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다. 이런 재정적 자원의 확보 말고도, 전문적 기술력과 다른 지역에서의 유사 사업 경험을 갖은 경우가 많기에 전문적 사업 실행을 펼칠 수 있다.

 

1) 외원 단체의 역할

 

외원 단체가 한센인 관련 사회사업과 한센인에 영향을 미친 것은 정책에의 기여, 해외 원조 물자의 배분, 사회문화적 인식에 대한 기여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정책에의 기여 측면에서는, 외국 원조단체는 개발도상국 국가에 대한 어느 정도의 개입을 원칙으로 하는가의 문제가 늘상 발생한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개별 국가의 일반 보건 체제에 대한 개입을 어떻게 설정하는가가 문제인데, 기존 국가체계 내의 기능을 확충하는 방식이 될 것인지, 기존의 공중 보건 의료시스템과 어느 정도 결합을 할 것인지에 대해 갈등하게 된다. 기존의 의료체계 속에서 외원 단체의 사업이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위치 지워질지가 중요한 고려사항이 된다. 그러나 한국에서 한센 관련 의료는 기존 의료체계 속에서 통합되었다기보다는 특수 의료로 분리되어 독자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세계보건기구는 한국의 나병관리사업을 돕기 위해 5년 동안 1년에 12,000달러의 원조를 제공하기로 결정했고, 이를 바탕으로 보건사회부는 보건기관에 산재되어 있는 나병관리기관을 조정하는 사업을 펼쳐 나관리 사업을 확충해 가고자 했다.38) 천주교의 이동 진료 사업은 1957년 처음 시행되었는데, 이는 미국 가톨릭 구제회 등의 외원 기관의 지원하에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소록도나 병원에 수용된 환자들을 제외하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환자들에게는 이렇다 할 치료 방법이 없었으며, 법적으로는 격리 수용 치료가 원칙이었다. 천주교 구라회는 필리핀 출신의 바가라위스 박사를 초청해서 나이동 진료반 운영을 맡겼다. 여기에 한국인 의사가 결합되어 전국의 거점 지역에서 나이동 진료사업을 실시하게 되었다. 바가라위스 박사는 스위니 신부의 초청으로 중국에서 나환자 진료를 했으며, 1952년에 중국에서 추방된 후에는 필리핀에서 나이동 진료사업을 실시했다. 나이동 진료사업은 가톨릭 구제회의 지원품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천주교 구라회의 나이동 진료 사업 설치 이후 다른 민간 구라단체들도 나이동 진료반을 설치했으며, 이후 강제 격리․수용적 한센병 정책에서 재가 치료 정책으로 전환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39) 이후 보건사회부와 한미재단의 공동 작업으로 경북 지방에서 한센인 역학 조사 실시 및 이동진료사업이 진행되었다. 나환자에 대한 재가 치료가 적극적으로 시행된 것은 1963년부터이다. 이는 나병이 불치병, 천형의 병이라 인식이 되었지만 현대의학과 의약품으로 완치할 수 있으며 나병의 전염력이 지극히 미약하다는데 근거한 것이다.40)

 

가톨릭계 이동 진료 사업과 1962년부터의 공식적 격리 정책의 해제, 국가 주도의 이동 진료 사업의 실시의 인과 관계를 뚜렷이 밝혀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1962년 국가에 의해 격리 정책이 해제되는 것은 국제 사회, WHO의 권고라는 요인도 있었겠지만, 국내에서 환자들을 격리에 의존하지 않고도 치료할 수 있는 시스템의 존재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외에도 다미안 재단 및 서독구라회의 의료사업 실시가 있었는데, 다미안 재단은 소록도에 의사를 파견해서 도왔다. 다미안 재단은 5년간 90만 달러의 예산을 들여 국립 소록도병원의 불구환자 수술에 착수하게 되었다. 다미안 재단의 보조를 받아 구라 사업을 실시하고자 했다. 의사와 전문 인력을 파견해 지원하는 것이다.41) 해외의 선진적인 의술과 자원을 바탕으로 국내의 자원만으로는 불가능한 의료 사업을 실시해갔다.

 

두 번째로는 원조 물자의 자원 배분이라는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미국 가톨릭 구제회의 미국 잉여 농산물 분배 및 각종 원조 물자의 분배 역할을 외원 단체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가톨릭 구제회는 밀가루, 의류 등 다양한 물자를 분배했다. 원조 중 현금 원조는 시설 투자 및 인적 자원 양성에 충당이 되고, 한센인의 생활 구호에 대해서는 현물 원조가 대부분이었다. 한센인 요양소 등에서 시설 투자나 토지 구입을 위해 현금이 필요하지만, 밀가루 등으로 현물 원조를 받은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경우에는 밀가루 등을 시장에 판매하는 방법으로 현금으로 마련했다. 소록도와 성심원 등 주요시설의 초기 설립 과정을 살펴보면 그런 사례42)가 많았다. 특히 오마도 사업의 시행 과정을 위해서는 천주교 구호물자의 기여가 매우 컸다.

 

그러나 이런 구호물자는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구호물자를 관리하는 쪽, 그것을 배분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은 갈등 관계에 설 수밖에 없게 된다. 한센인들과 인터뷰를 해보면 유독 ‘창고’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한다. ‘창고’를 지키던 이, ‘창고’에 붙잡혀 가서, ‘창고’에서 가루를 훔쳐다 팔다 처벌을 받은 경우 등등에 대한 언급을 한다. 구호 물자가 보관되어 있던 ‘창고’에 대한 열쇠를 가진 한센인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사이에서는 긴장 관계가 형성이 되고, ‘창고’에 대한 권한을 지닌 이들을 중심으로 권력관계가 형성이 되었다. 특히 소록도의 J원장이 증언하듯, 1960년대에는 한센인 시설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지극히 미미한 상황이었기에 물자를 제공하는 쪽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있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한센인 정착촌 및 보호 시설에서의 갈등 원인을 살펴보면 구호물자가 보관되어 있는 ‘창고’를 둘러싼 내용43)이 많았다. 1960년대 ‘창고’에 물자를 제공하는 쪽은 천주교 계통의 구호 단체가 다수를 차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정신의 양식만이 아니라, 육신의 빵을 제공하는 강력한 기관이었다. 말 그대로 살기 위해 신자가 되어가는 상황이 등장44)했다.

 

세 번째로는 사회문화적 인식에 미친 영향이 있다. 특히 외원 단체 및 외국인 구라사업가 및 봉사자들과 한국 한센인의 직접적 접촉을 통한 한센인에 대한 인식 개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정 종교계 단체는 아니지만 대표적인 외국 봉사단체로 워크캠프가 있었다. 워크캠프는 여러 국가의 학생 및 전문가들이 연합체를 구성해 1년에 한 달 남짓 한국 한센인 정착촌 등에서 노동 봉사활동을 펼치는 것이었다. 1967년에는 국제워크캠프는 한국, 일본, 중국, 태국 등 4개국의 남녀 대학생 72명이 참가해 경북 월성군 일대에서 실시되었다. 이들은 농기구를 들고 음성 나환자들과 같이 식사를 하며 정착촌 사업 지원 및 계몽 활동을 펼쳤다.45) 당시는 한센인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극심해, 한센인 정착촌이 동네에 생기거나 인근의 한센인 지역의 어린이들이 학교에 입학하는 경우, 지역의 반대와 저항이 심해서 무력 충돌까지도 빈번하게 발생할 때였다. 워크캠프와 같이 한센인들과 일상을 공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한센인들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70년에도 필리핀, 태국 등 9개국 대학생들로 짜인 워크캠프 회원 37명이 한센인 자활촌 에틴저 마을을 찾아 봉사 활동을 펼쳤다. 워크캠프의 가장 큰 목적중의 하나는 한센인 환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고치기 위해서, 미감아 공학 분규가 있었던 마을을 중심으로 장소를 정했다고 한다.46) 워크캠프의 구성원들이 한센인들과 같이 생활하며 작업을 하면서 한센병이 전염력이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일상생활에서의 접촉을 가시화함으로써 사회에서의 차별적 인식을 줄여나가고자 한 것이다.

 

다미안 재단의 의사들이 한국에 와서 수술을 할 경우 당시 소록도에서는 한센인들과 직원 사이에 접촉을 피하고 있을 때였다. 한센인들이 병원의 직원들과 대화할 때에는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에 서 있어야 한다는 등 생활을 분리시키는 규정들이 존속하고 있었다. 생활상의 격리가 철저히 있던 중, 다미안 재단의 의사들이 수술을 하면서 장갑을 끼지 않고, 환자들과의 접촉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모습이 소록도 병원의 의사들과 직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47)

 

소록도에서 환자들의 일상생활에서의 인식을 바꾼 중요한 계기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소록도 방문이었다. 소록도의 출입을 위해서는 배를 이용해야 하는데, 직원용 출입 선착장과 환자용 출입 선착장이 분리되어 있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은 대외적으로는 한센인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소록도 내부적으로는 소록도에 잔존하고 있던 차별의 흔적을 없애는 계기48)가 되기도 했다.

 

제도적 격리는 1962년에 법적으로 폐지가 되었어도 한센인들은 사회적 차별과 격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성직자들, 혹은 외국인 전문가들이 한센인들과 직접 접촉을 하며 거리감을 줄여가는 모습들은 한국인 한센 관련 종사자들과 일반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런 변화는 인식 제고를 위한 여러 홍보 사업보다도 더 큰 영향을 끼쳤는데, 외국인과 한국인의 문화적․인종적 격차가 오히려 한국인들에게, 한편으로는 동포애 혹은 민족주의적 감정을 촉발시키며, 한센인에 대한 거리감을 줄이게 하는데 기여를 했다.

 

이외에도 한센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위해 여러 가지 사업이 시행되었다. 세계 나병의 날과 발맞추어, 천주교에서는 구라주일을 선포했다. 이때 모아진 헌금은 천주교 구라회에서 사용하도록 했다. 구라주일에는 나병에 대한 강론을 한다거나 헌금을 한센인들을 위해 사용하게 해서 관심을 유도했다. 구라주일의 근거는 1954년 1월 1일 프랑스의 구라사업가인 라울훌레로49)가 제창하고 프랑스가 이를 채택하여 매년 1월의 마지막 일요일을 나환자를 돕기 위한 날로 정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천주교 구라회가 주축이 되어서 병에 대한 계몽을 목적으로 한 연극 ‘미련한 팔자대감’(이근삼 작, 김상열 연출)을 지원해 전국에서 96회의 순회공연을 했다. 공연은 초등학교, 중학교 운동장, 계곡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대형 진료차를 타고 다니며 공연을 했다고 했다. 총 관람객 수 25만 명이었다고 한다. 이 공연의 목표는 첫째로는 나병이 불치의 병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과 둘째로는 문화적으로 소외된 시골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본격적인 연극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83년에는 다미안 신부상을 제정해서 한센 관련 사회사업에서 공로가 많은 사람들에게 상을 수여했다. 다미안 신부상의 수상자 중에는 성 라자로마을 후원회 활동을 한 일본의 소설가 소노 아야코, 성 베네딕도회의 디오메테스 메텔스 수녀, 가톨릭 의대 만성병연구소장 최시룡 박사 등이 있었지만 제3회 이후 중단되었다.50)

 

천주교계 구라 사업의 역할은 의료 치료, 사회 개발, 인식 개선에 대한 사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천주교계의 한센 사업에서 의료와 인식 개선 사업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착촌 자활 사업의 측면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한 검토와 평가가 필요하다. 한센인들 사이에서 천주교계의 정착촌은 다소 경제적으로 가난한 곳이라는 인식51)이 존재하고 있다.

 

2) 한국인 및 한센인 중심적인 한센 구호 사업의 시작

 

한국 교회가 성장해가고 한국 국가의 경제력이 발전함에 따라 외국인 중심적인 원조 사업에서 한국인 중심적인 사회 사업으로 점차 전환해갔다. 천주교 구라회의 주요 업무담당자, 의사들이 한국인으로 꾸려지게 되었으며, 프란치스코회의 소속 관구도 이탈리아에서 한국으로 전환됨에 따라 한국인 신부와 수도자에 의해 성심원의 운영 주체가 변경되게 되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의 구라 사업에 헌신하고 재정적인 뒷받침을 해온 것은 우리 국민이라기보다 외국인에 의해서 추진되어 왔다는 것은 오늘날 한국 가톨릭 교인은 다시 한번 반성해야 할 중요한 문제점이라 하겠다.52)

 

김창석은 한국 가톨릭인이 구라 사업에 무관심했던 이유를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하며, 나병에 대한 계몽 활동이 없었음을 문제로 지적한다. 그나마 가톨릭 교회내의 여러 움직임과 구라주일의 존재 등으로 인해 인식이 향상되고 있지만, 한국인 신자들의 헌금을 통한 기여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외국의 신문에 한국인 나환자의 참상이 소개되는 모습에 대해 언급하며, 이런 문제를 외국인들에게 의지하며 스스로 해결해나가지 못하는 상황을 반성하고 있다. 향상된 국력과 동포애의 호소 때문인지 1970년대 후반부터는 한센인을 지원하기 위한 민간 후원 단체 등이 설립되어, 외국의 원조에 의지하지 않고 한센인들에 대한 지원이 가능하도록 재정 후원 운동 등이 시작되었다. 이런 지원 운동 중 가장 대외적으로 활발한 것은 성 라자로마을을 중심으로 한 성 라자로마을 돕기회 등이 있었다. 성 라자로마을 돕기회의 활동에는 한국내의 활동 뿐 아니라, 미국 교포들을 중심으로도 활발한 모금 활동이 펼쳐졌다.53)

 

성 라자로마을이 지난 7년 반 동안 크게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발전, 즉 외형으로 보이는 건물의 90퍼센트는 일본 ‧ 미국 ‧ 캐나다인들의 도움으로 된 것이요, 그것도 실은 그 나라에 가서 호소해서 얻어진 것들이다. 그래서 마을에 부임한 후 일본에 17번, 미국과 캐나다에 다섯 차례 드나들었다. 흔히들 말한다. 건설은 쉬어도 운영 관리가 문제라고. 그 나라들에선 건축비는 주었지만 운영관리비까지는 지원해주지 않았다.… 라자로의 식구들만 잘 살게끔 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80명이라도 어느 시기에 가서는 영원히 자립할 수 있게 해주자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다른 나라보고 우리나라를 방위해 달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라자로 식구를 영원히 돕자는 것도 아니고 완전 자립하자는 것을 보자는 것이다.54)

 

위의 글은 외원중심적인 사회사업기에서 한국인 중심의 사회사업기 전환기에 발생하는 고민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시설적인 면에서나 외형적인 면에서는 성장을 했지만, 그것에 대한 재정적이거나 인적 토대가 한국에 뿌리내리지 않아, 전환기에 많은 사업들이 축소되거나 질적인 저하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인 중심의 한센 관련 사회 사업은 자리를 잡아갔고, 이제는 해외에 사업을 원조하는 상황이 되었다.

 

더욱이 이에 그치지 않고 한센인들이 주체가 되어 해외의 한센인들을 돕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국내에서 한센인들이 물품을 모아 보내주는 원조뿐 아니라, 한센인들이 주축이 되어 사업 기금을 모집하고 전달하는 등 해외 한센인 돕기에 한센인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런 사례는 천주교 계통의 한센 단체보다 프로테스탄트 쪽의 한센 단체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1970년대 한국에서 행해진 여러 해외 원조 단체들의 활동이 기억에 남아 자신들도 이런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해 중국 길림성, 필리핀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다.55) 한센인들이 도움을 받는 대상에서 도움을 주는 쪽으로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역할을 모색하며 스스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사회에서 활동할 수 있는 역할을 만들어가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3) 한센인에 대한 영향

 

천주교가 한센인의 일상생활에 미친 영향은 다양하다. 우선 대표적으로 출산에 관한 문제를 들 수 있다. 소록도 등의 국립 요양 시설에서는 한센인이 임신을 할 경우 낙태를 요구하거나, 소록도에서 퇴소할 것을 요구했다. 병을 앓고 있고, 거기에 임신한 여성이 퇴소한 후 생계를 유지할 방법이 극히 드문 상황에서, 퇴소를 선택하기는 쉽지 않았다. 한센인 인권 실태 조사의 결과, 많은 수의 한센인들이 낙태를 선택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중 가톨릭 신자의 경우 가톨릭계 요양원이나 정착촌으로 이주를 해가는 경우56)도 있었다. 가톨릭의 종교 네트워크가 대안이 없는 이들에게 일종의 탈출구 기능을 했다. 이렇듯, 가톨릭의 생명 윤리 중시 사상은 국가의 폭력적인 한센인 단종 정책에 대해 보호막을 제공했다.

 

다른 한편, 한센인 자녀의 경우 앞에서 기술한 것처럼 사회복귀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경우, 가톨릭을 통한 네트워크는 입양의 통로로 활용되기도 했다. 한센인 자녀의 경우 한센병 환자의 자식이라는 오점에 양육시설에서 길러지는 고아라는 오점까지 더해져서, 한국에서 생활하기 힘들었다. 이들은 1970년대 성 라자로마을의 이경재 신부를 통해 미국에 입양57)이 되었으며, 이들 입양을 위해 미국 내에서 특별법까지 제정되었다고 한다. 한센인 자녀의 입양은 고통스러운 역사이지만, 당시 사회에서의 정상적인 삶이 가능하지 않은 사회적 타자 집단에게 희망적인 탈출구로 인식되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이전에는 도시 외곽에 존재하고 있던 한센인 정착촌이 새로이 택지로 개발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런 경우 한센인들은 택지 보상금을 받아 어디론가 이주해야 하는데, 재개발된 지역으로 다시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들은 보상금을 가지고 한센인 정착촌 혹은 노령자나 거동 불편자의 경우 한센 요양소를 찾게 된다. 그러나 가족들과의 관계가 대부분 단절되어 있고, 다른 사회적 연결망이 없는 한센인들의 경우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를 취하는 것은 교회를 통해서이거나, 교회와 관련된 단체들을 통해서이다. 최근 해체된 부산의 Y농장의 경우, 교파별로 정착촌을 찾아가거나, 노령자들의 경우 종교별 요양 시설에 입소해 생활하고 있다. 도시 개발로 인해 한센인들의 거주 환경이 다시 한 번 위협되고 있는 상황에서, 가족 공동체 및 지역 공동체로부터 유리된 한센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교회 공동체로 이를 통한 이주와 재정착이 발생한다.

 

 

6. 나가며

 

한센병에 감염된 이들이 병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스티그마화된 이후부터 이들은 종교에 많이 의지하게 된다. 개인의 신앙과 윤리뿐 아니라, 한센인의 사회적 관계 ‧ 위치 ‧ 활동 ‧ 생활 등에 종교의 영향력을 절대적이다. 구체적으로 종교계 사회사업 단체는 제도적 ‧ 사회적 ‧ 일상적인 차원에서 역할을 하고 있다. 당장 하나의 약, 한 톨의 식량이 아쉬운 이들에게 필요한 물자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 실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측면이 있기도 하지만,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다소 왜곡된 구조를 양산하기도 한다. 특히 외국의 선교 단체들이 제공하는 풍부한 물자의 경우, 한센인들의 생존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 자원의 배분을 둘러싼 권력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자원을 둘러싼 갈등은 발생하기 마련이며, 이 과정에서 종교계 단체는 의도치 않은 권력적 집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 일상적인 차원에서는 외국인 사회사업가들의 헌신적인 활동과 한센인에 대한 격의 없는 태도는 한국 내의 의료 전문가들과 일반인들의 인식과 태도를 바꾸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한센인들의 경우 도움을 받은 경험이,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해외 한센인들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주체화하는 데 바탕이 되기도 했다.

 

최근 종교의 사회사업 활동에 대한 여러 차원의 비판적 논의가 제기되고 있지만, 그 순기능 역시 부정할 수 없고 종교계 사회사업의 역할에 대해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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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시룡, 〈현대 한국 천주교회와 구라 사업의 전개〉, 《한국교회사논문집》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 장정란, 〈한국전쟁과 외국 가톨릭교회의 전재 복구 활동에 관한 연구〉,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1 ; 박문수, 〈가톨릭교회와 근대적 사회사업의 도입과 발전〉, 《한국 근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교회》(중), 가톨릭출판사, 2005.

 

2) 정근식, 〈‘식민지적 근대’와 신체의 정치〉, 《사회와 역사》 51, 한국사회사학회, 1997.

 

3) Gussow, z,, Leprosy, Racism and Public Health, Westview Press, 1989. p. 18.

 

4) 한센병 용어에 대한 문제가 있다. 과거에는 문둥병, 나병 등의 용어로 불렸으나, 현재는 이 용어들이 차별적이라는 함의가 있어, 한센병으로 개정해 부르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과거의 사건의 경우에는 ‘나병’, ‘나환자’라는 용어를 한센병이라는 용어와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한편, 성경 번역에서의 나환자, 나병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다. 레위기 등이나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나병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한센병과 동일하지 않다는 논의가 있다. 히브리어 tsara’at(심한 피부병, 곰팡이, 더러움)가 lepras로 라틴어로 번역이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의미가 고착되었다고 한다. Heller, Richard et all, “Mold ,“Tsara’at,Leviticus, and the history of a confusion.” Perspectives in Biology and Medicin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vol. 46, no. 4, 2003, pp. 588~591. 한편 일본에서는 성서 번역에서 차별적 용어를 시정하는 계기가 있어 나환자는 심한 피부병 환자로, “めくら”〔盲人〕는 시각장애인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5) Moblo, Pennie, “Blessed Damien of Moloka’i : the Critical Analysis of Contemporary Myth”, Ethnohistory, vol. 44, no. 4, pp. 691~726, 1997.

 

6) L씨(50대, 한센인, 남성)는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는 한센인이라는 용어가 있음에도 나병, 나환자, 문둥이라는 말을 목사들이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지적하며, 소록도나 여타 정착촌에서의 한센인 관련 목회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한센인에 대한 잘못된 스테레오타입을 더 강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목사들이 설교 도중 목사로서의 권위를 높이고 어떤 종교성을 입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한센인과의 접촉을 과장되게 말하거나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런 지적은 다른 장애인에게서도 등장하는데, 성경에 맹인, 소경이라는 용어가 지속되기에 시각장애인에 대한 시혜적이거나 불평등한 관점이 지속되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7) 스피박은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이들을 서벌턴(subaltern)이라 불렀다. 이들은 공식적이고 권력적인 언어체계 속에서 스스로 재현할 수 없는 이들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권력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하층민들은 스스로에 대해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8) 한센인의 등록자 실태 추이를 알려주는 표이다. 한센인의 수가 감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센인들이 노령화되며, 신환자 발생률이 극도로 저조하기에 한센인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한센복지협회는 2030년경에는 한센인 등록자 수가 4,100여 명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9) 라울 훌레로, 박찬부 역, 《서로 사랑하라》, 서독구라회 발행, 1980.

 

10) 《한센인 인권실태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6 ‧ 25전쟁 기간 동안에는 한센인 학살사건은 7여 건, 1959년의 비토리 학살사건 등이 있는데, 이들의 희생자는 수백 명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유랑하고 사회적 신분을 은폐하는 한센인 공동체의 특성상 정확한 희생자수와 명단 파악조차 힘든 실정이다. 본인은 위 조사 기간 동안 피해 한센인의 가족 및 학살사건 생존자 등을 면접할 기회가 다수 있었는데, 이들은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고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다. 나주의 K 할머니의 경우 오빠가 학살당했는데, 빨갱이라 불리며 학살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빠가 학살당한 것에 대한 억울함보다, 권력에 대한 두려움, 빨갱이로 탄압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과 당시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공포를 되살리게 해서 사건에 대해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직접 목격했다.

 

11) 《한센인 인권실태 조사》에 의하면, 조사대상 한센인(645명) 중 무학이 43.7%, 초등학교 졸업 혹은 중퇴가 37.4퍼센트였으며, 고졸 이상의 학력자는 불과 4.3%에 불과했다.

 

12) 결혼은 한센인 공동체 내에서 이루어진다. 소록도 등의 시설에서는 결혼에 대한 조건으로 정관수술 ‧ 단종수술을 1980년대 중반까지도 요구한 예를 확인했다.

 

13) 국가인권위원회, 《한센인 인권실태 조사》, 2005.

 

14) 국가인권위원회, 앞의 책, 2005, 92쪽.

 

15) 한센인 자녀에 대한 차별은 교육 과정에서만의 것이 아니었다. 한센인의 자녀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취업을 한 경우에도 불이익을 당하거나 해고를 당했다고 증언하는 사례를 조사 중 발견했다. 한센인, 한센인 가족은 신분적인 낙인처럼 대를 거쳐 이어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와 격리되어 고아원 등에서 수용이 되거나, 같이 살더라도 거주 교육의 면에서 차별을 겪어온 한센인 자녀들은 사회 복귀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현재 정착촌의 거주 인구 중 실제로 축산에 종사하는 이들은 한센인 1세라기보다는 2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6) 국가인권위원회, 앞의 책, 2005, 99쪽.

 

17) 한국 나관리협회, 《한국나병사》, 1988, 34쪽.

 

18) 민간단체의 역할 강화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다. 1950년대의 한센정책은 부랑자 검속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1963년부터 WHO의 지원을 받아 적극적인 사회 복귀나 신환자 색출사업, 이동진료사업을 펼치기는 하지만, 정부는 많은 역할을 종교계 민간단체와 대한 나관리협회와 같은 반민반관단체에 돌렸다. 보건소 등에서는 한센인에 대한 격리 및 색출 정책을 시행하고, 한센인을 강송하는 행위를 지속해갔다. 사회통제적 측면의 질병관리정책만을 국가가 담당한 채, 사회복귀, 의료치료 등 적극적인 복지 정책은 민간단체에 떠넘긴 상황이었다.

 

19) 최시룡, 앞의 글, 1984.

 

20) 미국 가톨릭 구제위원회(C.R.S. Catholic Relief Service)는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의 공식적인 해외 원조기관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각 세계의 난민 구호, 전쟁 희생자, 빈민 돕기 위한 단체로 1943년에 조직되었다. 한국에서는 1946년 처음으로 구호 사업을 실시했다. 주요 사업은 양곡사업, 의료사업, 사회경제개발사업, 지역사회개발사업 등에 대한 후원이었다. 특히 미국의 잉여 농산물과 자금이 한국에 투입이 되어 사회개발사업에 지원되기 시작했다(박문수, 앞의 글, 2005 ; 장정란, 앞의 글, 2001). 천주교계의 한센병 사업, 즉 이동 진료, 집단마을 구성, 외래 진료 등은 가톨릭 구제위원회에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대한 나관리협회, 앞의 책, 1988).

 

21) 성 라자로마을, 《성 라자로마을 50년사》, 2000.

 

22) 한국가톨릭나사업연합회, 《천주교 구라사》, 2000.

 

23) 《경향잡지》, 1997년 2월호. 

 

24) 카바 40년사 편찬위원회, 《외원 사회사업기관 활동사 : 외국 민간원조기관 한국연합회40년사》, 1995.

 

25) 《외원사회사업기관활동사 : 외국민간원조기관한국연합회40년사》, 카바 40년사편찬위원회, 1995.

 

26) 《후생일보》 1967. 2. 1.

 

27) 이런 시설들은 앞에서도 언급한 한센인 수의 감소로 인해 시설 전환에 대한 요구에 당 면하고 있다. 현재 노령화된 한센인에 대한 케어의 중요성 못지 않게, 점차로 시설을 다른 용도로 어떻게 전환할 것인지, 전환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는 천주교계 요양소 뿐만 아니라 소록도 등 대규모 한센인 요양 시설들의 당면 과제이다.

 

28) 성 라자로마을, 앞의 책, 2000.

 

29) 《예수 성심의 마을 : 성심원 40년사》, 산청성심원, 2000.

 

30) 《경향잡지》, 1970년 2월호.

 

31) 〈후생일보〉, 1973년 7월 29일자.

 

32) 〈대구매일신문〉, 1984년 4월 13일자.

 

33) 〈매일신문〉, 1973년 9월 2일자.

 

34) 〈신앙인의 삶, 소외된 무리의 어머니〉, 《경향잡지》, 1984년 1월호.

엠마 원장에 대해서, 한센인 K씨는 엠마 원장이 늘상 한센인들과 대화를 하려 했다며, 격의 없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기억했다.

 

35) 최원규, 〈외국 민간원조 단체의 활동과 한국 사회사업 발전에 미친 영향〉,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박사학위 논문, 1996.

 

36) 1960년대 ․ 1970년대 한국의 사회사업 발전에서는 외원 단체들이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카바(KAVA, Korean Association of Voluntary Agencies)라는 연합 단체를 결성해, 전문적이고 조직화된 외원 활동을 펼쳤다. 가입 단체는 교육 ‧ 보건 ‧ 사회복지 ‧ 구호 및 지역개발 프로그램에 종사하는 단체들이었다. 카바는 자원의 동원면이나 사업의 실행면에서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어서 ‘제2의 보사부’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최원규, 앞의 글).

 

37) 사회적 차별이 극심한 상황에서 한센인이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한 음성 환자의 경우 외상이 남았다는 이유로 교사 업무 수행이 불가하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있을 정도였다. 전염성이 없는 병력자였지만, 단지 외상의 존재 여부로 인해 직무에서 박탈당한 것이다(《한센인 인권실태 조사》). 이런 상황에서 한센인들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국가에 자신들의 권리 행사를 요구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지속적으로 부랑인, 잠재적 범죄자로 인식되어 국가의 통제 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38) 〈의사시보〉, 1961년 12월 4일자.

 

39) 한국가톨릭나사업연합회, 앞의 책, 2000.

 

40) 〈의사시보〉, 1963년 2월 14일자.

 

41) 〈의사시보〉, 1966년 4월 21일자.

 

42) 산청 성심원, 《예수 성심의 마을 : 성심원 40년사》, 2000.

성심원 토지 매입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현금이 없어서, 원조 물자로 받은 밀가루를 매매해 토지를 구입했다고 한다. 원조 물자로 토지를 구입한 사례는 성심원 이외에도 다른 정착촌의 설립 과정에서도 유사한 경우가 있다. 토지소유권이 천주교 재단이나 교구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토지소유권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잠재하고 있다.

 

43) 국가인권위원회, 앞의 책, 2005.

원내 분규로 인해 폭력사건, 살인사건까지 발생한 청애원의 경우, 설립초기 “선교사로부터 구호품 받고, 미국 CRS로부터 물자 받고”(K씨 증언) 청애원의 재산이 형성되었다. 1958년에는 창고의 물자를 둘러싸고 환자끼리 충돌이 벌어져서 최소 3인 이상이 사망했다.

 

44) 성심원 및 여타 천주교계 정착촌 설립의 초기 역사를 보면, 독자적으로 존재한 곳도 있지만 기존의 한센인 공동체에서 갈라져 나온 경우도 많다. 천주교를 믿어 한센인의 2/3가량이 믿고 있는 장로교 신자와 갈등을 발생해 분리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기존의 공동체에서 배제된 이들이 천주교를 믿어 새로운 사회적 자원을 획득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1953년, 내가 들어가기 전에 이미 구생원생끼리 감투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교회는 다 같은 교회인데 파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갈라져서 한 3년 정도 우리가 싸웠다. 싸울 때 우리 편의 일보는 사람인 P, K와 이야기를 했는데 저 사람들이 우리를 불신자로 취급하니 다른 종교를 잡아보고자 해서, 천주교를 잡기 위해 옥봉성당에 일보는 사람이 가서 외국인 신부님과 손을 잡았다”(산청 성심원, 앞의 책, 2000).

 

45) 〈영남일보〉, 1967년 8월 25일자.

 

46) 〈서울신문〉, 1970년 1월 28일자.

 

47) 국립 소록도병원, 《소록도 80년사》.

 

48) 소록도 K씨 인터뷰.

 

49) 라울 훌레로 씨는 제14회 나병의 날을 맞아, 나병은 그 전염병이 매우 미약함과 동시에 확실히 완치될 수 있는 질병인데도, 아직도 이 지구상에는 천만이나 되는 나환자가 치료도 도움도 못받은 채 버려지고 있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사랑을 표하라고 촉구하는 호소문을 작성했다(〈후생일보〉, 1967년 2월 1일자).

 

50) 성 라자로마을, 앞의 책, 2000.

 

51) 생활 수준을 정량적으로 평가할 만한 데이터가 없어서 객관적인 사실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천주교계 한센인 정착촌의 생활 수준이 다소 낙후되어 있는 것에 대한 추론을 해볼 수는 있는데, 정착촌 토지가 모두 개인 소유로 되어있는 프로테스탄트계 정착촌과 달리 천주교계에서는 토지가 교구나 재단 소유로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재산 관념과 재산 축적에 대한 노력이 그다지 활발하지 않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최근, 도시가 확장이 되면서 이전에는 교외 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한센인들의 정착촌이 도시로 편입되거나 새로운 택지로 개발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천주교계 재단이나 교구 소유로 되어 있는 정착촌 한센인의 경우와 여타 정착촌 한센인의 경우 생활 격차가 발생해 상대적 소외감이 발생할 수 있다.

 

52) 김창석, <신도들의 헌금이 나사업을 앞당긴다>, 《복지》 28호(1977. 12).

 

53) 성 라자로마을, 앞의 책, 2000.

 

54) 회보 《성 라자로마을》 제30호(1977. 7. 30). 

 

55) 이명남, 《절망을 이긴 세월: 한센 환자의 눈물겨운 인간승리》, 도서출판 한글, 2001.

 

56) 성심원의 L모씨 인터뷰.

 

57) “우리는 고통스럽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여기 있다면, 그들의 미래를 막아버리고, 우리는 짐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좋은 양부모에 가서 보통 사람들과 사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소원은 아이들이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New York Times, 1974. 4. 12).

 

[교회사 연구 제29집, 2007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주윤정(상지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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