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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15: 을사추조 적발 사건의 막전막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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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8-23 ㅣ No.1282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15) 을사추조 적발 사건의 막전막후


김범우만 가두고 사대부 집안 자제 모두 무죄 방면한 까닭은

 

 

1785년 봄 명례방(현 명동)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이벽, 이승훈, 정약전·정약종·정약용 삼형제 및 권일신 등은 종교 집회를 가졌다. 그러나 형조관리에게 발각돼 체포되었는데 그 중 유일하게 중인 신분이었던 김범우만 감옥에 갇혀 형벌과 고문의 여독으로 1786년 사망했다. 그림은 탁희성 작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공적집회도’로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이상한 집회 현장

 

1785년 3월, 명례방 추조 적발 사건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 보자.

 

명례방 집회 적발 현장에서 정작 당황한 것은 형조의 포졸들이었다. 얼굴에 분까지 바른 양반가의 자제들이 푸른 두건을 쓴 채, 푸른 제건(祭巾)을 한 키 큰 사내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있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십자가가 놓였고, 벽에는 이상한 서양 사내의 화상이 걸려 있었다. 포졸들은 노름판인 줄 알고 덮쳤다가 싸한 현장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도리어 허둥댔다.

 

뭐지? 막상 방안의 사내들은 침착했다. 수십 명의 사람을 줄줄이 묶어 체포하고, 현장의 이상한 물건들을 압수한 뒤 보고가 올라갔다. 이제 막 형조판서로 부임했던 김화진(金華鎭, 1728~1803)은 이 일로 몹시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실로 미묘한 타이밍에 난처한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붙들려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한다 하는 남인 명문가의 자손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평생 처음 포승줄에 묶여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실제 검거도 있었고,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었음에도 사건 발생 당시에는 공식적으로 남은 기록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김화진이 형조판서에 임명된 날짜는 「정조실록」에 1785년 2월 29일로 나온다. 그러니까 추조 적발 사건은 그의 임명 이후인 3월에 발생했다. 또 이들이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에 날짜를 정해 주일을 지켰다는 기록이 홍유한의 경우와 주어사 모임 이후 천주교 모임을 말할 때마다 반복해서 나온다. 당시 명례방 집회 또한 1784년 연말부터 한 달에 네 번씩 정해진 날짜에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명례방 집회 날짜는 3월 7일, 3월 14일, 3월 21일, 3월 28일 중 하나였을 텐데, 추조에 적발된 날은 정황상 3월 14일과 21일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3월 7일은 너무 빠르고, 3월 28일은 너무 늦다.

 

김화진은 당시 58세로, 일반적으로는 노론 온건파로 알려졌지만, 황윤석의 「이재난고(頤齋亂藁)」에는 소론으로 나온다. 이조ㆍ호조ㆍ병조ㆍ예조판서를 두루 거쳤고 오늘로 치면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 판윤까지 지낸 노련한 정객이었다. 그런 그가 명례방 추조 적발 사건을 쉬쉬하면서, 사태를 덮기에 급급했던 것은 실로 의외다. 이것이 김화진의 개인 판단이기는 어렵다. 그냥 터뜨리기에는 이 사건이 지닌 폭발력이 너무 컸다. 한순간에 조정을 격랑 속으로 빠뜨릴 수 있는 문제임이 분명했다.

 

 

3월에 발생한 「정감록」 역모 사건의 여파

 

김화진이 형조판서에 제수된 1785년 2월 29일에, 실록에는 “숙장문(肅章門)에서 김이용(金履鏞)과 이율(李瑮)과 양형(梁衡)을 친국하다”로 역모 사건 취조의 공식 개시를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 김화진이 형조판서에 제수된 날 역모 사건의 취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임금이 김화진에게 이 사건의 총괄 처리를 맡겼다는 뜻이다.

 

이날 터진 것은 이른바 문양해(文洋海)의 「정감록」 역모 사건으로 불리는 변고였다. 이 사건은 「정감록」 신앙과 관계되어 왕조의 아킬레스건을 깊숙이 찔렀다. 3년 전인 1782년에도 문인방(文仁邦)에 의한 「정감록」 역모 사건이 조선을 뒤흔들었다. 이번 또한 그때와 비슷하게 팔도에서 일제히 기병해서 한양으로 쳐들어와 조선을 접수해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역모 계획이었다.

 

문양해 등이 중심이 된 지리산 하동(河東) 일원의 신흥 종교 집단과 서북 지역의 술사(術士) 주형채(朱炯采), 정조 초년 한때 최고의 권력자였던 홍국영의 사촌 동생 홍복영(洪福榮), 밀고자 김이용 등이 복잡하게 얽힌 사건이어서, 자칫 국기(國基)를 뒤흔들 민감한 사안으로 번질 기세였다. 조정이 긴장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들의 배후로 지목된 이현성(李玄晟)이란 인물은 나이가 250살인데, ‘도처결(都處決)’이란 것을 지니고 다니면서, 군사를 일으킬 방향을 지시하고, 권력을 탐하는 자를 자객이나 범을 보내 죽인다고 했다. 500년 된 사슴과 400년 된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녹정(鹿精)과 웅정(熊精)의 존재도 등장했다. 녹정은 별호를 청경 노수(淸鏡老壽) 또는 백운 거사(白雲居士)라 했고, 웅정은 청오 거사(靑烏居士)라 불렀다. 녹정은 얼굴이 길고 머리털이 희었으며, 웅정은 낯빛이 흐리고 머리털은 검었다고 했다.

 

녹정은 “동국(東國)은 말기에 셋으로 갈라져 100여 년간 싸우다가 비로소 하나로 통합된다. 통일할 사람은 정가(鄭哥) 성을 가진 사람이고, 그 싸움은 나주(羅州)에서 먼저 일어난다. 유가(劉哥), 이가(李哥), 구가(具哥) 성을 가진 세 사람이 거사하여 반정(反正)할 텐데, 거사 시기는 을사년 7, 8월이 아니면 병오년 정월이나 2월이다”라고 말했다. 모두 문양해의 서면 공초에서 나온 말이었다.

 

여기에 더해 제주 섬에 있다는 진인이나, 미래를 예언하는 향악선생(香嶽先生)이란 별호를 지닌 일양자(一陽子) 김정(金鼎), 하동 영원사(靈源寺) 승려 혜준(慧俊) 같은 정체가 모호한 존재들이 잇달아 등장해서 풍문을 한껏 부풀렸다. 3월 16일 기사에는 마침내 비결서인 「정감록」과 「진정비결(眞淨秘訣)」의 내용까지 등장했다. 3월 26일에는 을사년 3월에 역모가 일어난다는 의미를 담은 ‘을용(乙龍)’이란 두 글자가 관련자 대질 심문 자리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취조의 결과만 두고 보면 당시 역모의 정황은 전국 규모였다. 영흥과 통천, 고성과 광양, 태안, 당진, 면천, 공산, 한산, 황주, 봉산, 곽산, 안변 등 전국 각지에 거점을 두고, 자기들끼리 대도독이니 유장(儒將)이니 하면서 거점별 조직책의 이름까지 다 나온 상황이었다.

 

긴장한 조정에서는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부산 동래와 묘향산, 남원 지리산까지 수색하는 소동을 벌였다. 이현성의 근거지라는 지리산 선원촌(仙苑村)을 찾기 위해 선전관(宣傳官) 이윤춘(李潤春)을 비밀리에 파견했고, 평안도관찰사 정민시(鄭民始)는 묘향산 일대를 여러 차례 수색한 뒤 조정에 보고서를 보내왔다.

 

조정은 이 풍문의 실체를 잡기 위해 3월 한 달 내내 온통 총력전을 펼쳤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모 사건이 그렇듯 서로 물고 물리는 취조의 과정에서 연루자만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손에 잡히는 실상은 없었다. 이 역옥은 3월 29일 주모자인 문양해와 홍복영을 처형하고, 관련자를 귀양 보냄으로써 정확히 한 달 만에 서둘러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의 의미를 처음으로 주목한 백승종 교수는 그의 책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푸른역사, 2006)에서 이 사건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듬해 사건 수사에 간여했던 포도대장 구선복(具善復)과 그의 조카 구명겸(具明謙)이 사건 관련자로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고, 정조가 이듬해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하게 된 것도 이 사건의 여파라고 보았다. 남은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 않은 채로 조정은 서둘러 이 문제를 덮었던 것이다. 그만큼 「정감록」은 언제라도 민중의 소요를 일으킬 수 있는 뇌관이었다.

 

 

형조로 끌려간 그들은 어찌 되었나?

 

공교롭게도 명례방 추조 적발 사건은 문양해 「정감록」 역모 사건이 한창 확대일로로 치닫던 와중에 벌어졌다. 그런 점에서 보면 어쩌면 그들은 운이 몹시 좋았거나 대단히 나빴다. 조정은 역모의 관련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상황에서, 전혀 다른 심각한 문제 하나를 더 얹을 여력이 없었다. 이것은 운이 좋았다. 역옥(逆獄)이 다른 데로 불똥이 튀어 번지면,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 점은 몹시 불리했다.

 

처음에는 현장에 있던 수십 명이 모두 끌려갔다. 꽤 소란스런 광경이었을 법한데, 이 장면에 대한 묘사가 어디에도 없다. 「벽위편」에는 “판서 김화진이 사대부가의 자제들이 또한 잘못 들어가게 된 것을 애석히 여겨, 알아듣게 타이르고는 내보내 주었다. 다만 김범우만 가두었다(判書金華鎭惜其士夫子弟, 亦爲誤入, 開諭出送, 只囚範禹).”라고 처리 과정을 간결하게 적었다. 잡혀 온 집회 참석자들을 심문한 김화진은 먼저 이들이 명망 있는 사대부가의 자제들임을 확인했다. 그 뒤 이들을 잘 타일러 무죄 방면했다는 것이었다. 장소 제공자였던 김범우만 감옥에 가두는 것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하지만 김화진의 뜻과 달리 사태는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숨을 죽이고 근신해야 마땅할 당사자들이, 압수해간 예수 성상과 십자가 및 책자를 돌려달라고 집단으로 형조까지 항의 방문을 했던 것이다. 예상을 벗어난 이들의 행보에 가뜩이나 역모 사건 처리로 골치가 아프던 김화진은 인상을 더 찌푸렸다. 단지 이것뿐이었을까? 여기에는 깊이 따져 봐야 할 행간이 더 있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8월 23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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