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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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수도원 이야기: 체코 프라하 스트라호프 수도원 - 프레몽트레회와 노르베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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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8-31 ㅣ No.653

[수도원 이야기 – 체코 프라하 스트라호프 수도원] 프레몽트레회와 노르베르트

 

 

경남 합천으로 여행하는 사립이라면 누구나 방문하는 곳이 있다. 해인사다. 그곳에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이 있기 때문이다. 체코 프라하로 여행하는 사람도 꼭 방문하는 곳이 있다. 스트라호프 수도원(Strahovsky klaster)이다. 그곳에 그리스도교 고서 필사본과 목판본 등 10만여 권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트라호프 수도원 내부.

 

 

수도원 개혁과 오늘의 교회

 

중세 수도자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교회도 없었다. 희생정신으로 무장한 그들은 극단적일 정도로 그리스도교 신앙 원칙에 충실했다. 이 ‘정예’ 그리스도인의 수는 수십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난, 청빈, 순명…. 수도자들은 무소유를 지향했다. 식사도 소박했다. 유럽이니 고기 종류를 많이 먹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다. 단식 기간이 아닐 때도 식사는 흔히 버터와 잼을 바른 과자나 식빵에 우유를 곁들인 게 전부였다.

 

또한 이들에게는 침묵이 중요했다. 대침묵 시간에는 말뿐 아니라 사소한 손짓도 금지되었다. 작은 몸짓 하나도 침묵을 거스르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꼭 필요한 말이나 중요한 일이 있다면 글로 써서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도 있다. 이들은 이렇게 침묵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미하며 밤낮으로 공동 기도를 바쳤다. 또 이들은 수도원 규율에 순명함으로써 독선과 아집을 내려놓았고 어려운 이웃에게 봉사했다.

 

나아가 수도자들의 삶은 노동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데 일조했다. 중세 귀족은 전쟁과 사냥 이외의 육체노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도원에 들어간 귀족 출신 수도자들은 생계를 위한 육체노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유럽 사회의 노동관이 변화하는 데 수도원도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수도 생활도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모든 수도원이 정도만을 걷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몇몇 수도원에서는 일탈 행위가 생겨났다. 가난이 재물로, 비움이 채움으로 변질되는 현상이 일부 일어났다. 이에 따라 프랑스 남동부 클뤼니를 비롯하여 유럽 전역에 걸친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을 수도원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스트라호프 수도원에서는 이러한 개혁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한데, 이곳의 수도회가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코 프라하 카를교의 성 노르베르토 석상(가운데).

 

 

스트라호프 수도원과 프레몽트레회

 

수도원은 프라하성과 걸어서 10분 거리에 위치한다. 중세로의 시간 여행에 대한 기대로 두근거려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촬영지이기도 한 이곳은 1140년 보헤미아의 왕 블라디슬라프 1세가 세웠다.

 

안으로 들어서자 중세 수도자들의 삶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본관 1층 바로크 양식의 성모 마리아 성당을 둘러본 뒤, 회랑을 거쳐 2층으로 올라가면 엄청난 규모의 도서관을 만날 수 있다. 도서관은 크게 ‘철학의 방’과 ‘신학의 방’으로 나뉘는데, 철학의 방은 14미터 높이 2층 벽면을 4만 2,000여 권의 책으로 채웠다. 천장의 화려한 프레스코화도 도서관의 품격을 높여 준다. 신학의 방으로 통하는 복도 막다른 곳에서는 책 표지에 보석이 박힌 희귀 사본도 볼 수 있다. 도서관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그런데 스트라호프 수도원에서 도서관만 보고 온다면 묵상거리 하나를 놓치는 셈이다. 이곳에는 유명한 성인 한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바로 산텐의 노르베르토 성인(1080-1134년)이다. 설교가였던 노르베르토는 여러 지방을 다니며 교회 쇄신을 촉구하고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고 한다. 성인은 1120년 프랑스 랑 인근에 백의의 규율 의전 수도회, ‘프레몽트레회’(Chanoines Reguliers de Premontre)를 설립했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유럽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이름이다.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를 한국의 원효대사, 의상대사에 비유할 수 있다면, 노르베르토는 사명대사라고 보면 된다. 성체와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남달랐던 노르베르토는 그만큼 유럽 사회에서 크게 공경받는 성인이다.

 

그의 소망은 축성생활과 사목 활동을 병행하는 수도원 설립이었다. 엄격한 가난을 실천한 그는 세 가지 형태의 수도원을 세우는데, 각각 귀족 여인과 동정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천주의 모친 성모 수도원, 요한에게 봉헌한 남자 수도원,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봉헌한 수녀원이었다. 놀랍게도 이 세 수도원의 장상은 성모 수도원의 원장 수녀였다. 남성 위주의 중세 사회에서 여성 원장이 세 수도원 신부(신부, 수사 포함)을 지도한 것이다.

 

프레몽트레회를 비롯한 다양한 규율 의전 수도회들의 전례는 장중하고 엄격했다. 성직매매와 재산 증식을 엄격히 금했고, 가난하게 살기로 서원하고 공동생활을 하며 정결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들 공동체 생활의 터전은 주교좌 성당이나 본당의 부속 건물이었다.

 

아울러 유럽의 병원 역사를 보면, 이러한 규칙을 따른 재속 사제들이 병원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그네나 순례객들이 머물도록 교통의 요지나 사제관 곁에 구호소를 세웠고, 이곳에서 사제와 평신도들이 환자들에게 봉사하였다. 병원, 수도원이나 십자군을 계기로 생긴 기사 수도회도 그 원천에는 바로 이런 공동생활을 영위한 규율 의전 사제들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스트라호프 수도원에 모셔진 성 노르베르토의 유해.

 

 

우여곡절 끝에 모신 성인의 유해

 

노르베르토 성인은 독일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로 지내다 선종하여 그곳에 묻혔는데, 종교개혁 이후 문제가 생겼다. 성인의 묘가 있는 곳이 훗날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시기를 거치며 개신교 지역이 되자 유해 훼손 우려가 제기된 것이다. 이에 노르베르토의 개혁 정신을 따랐던 스트라호프 수도원이 세기가 바뀌는 동안 적극적으로 유해 송환 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개신교 측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전쟁을 치르고서야 1627년 간신히 수도원으로 유해를 모셔 올 수 있었다.

 

수도원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그 침묵을 벗 삼아 성인의 유해 앞에서 한참 동안 머물렀다. 멀리서 수도복을 입은 한 수도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 최의영 안드레아 – 교황청립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CFIC) 동아시아 준관구장.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교 수도자 신학대학원(클라렛티아눔)을 졸업했다.

 

[경향잡지, 2020년 8월호, 글 ‧ 사진 최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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