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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신학ㅣ사회사목

[문화사목] 영화: 어느 대리 살인의 기록, 집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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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10 ㅣ No.1237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 어느 대리 살인의 기록, ‘집행자’

 

 

사회 이슈를 다룬 영화는 사안의 여러 국면과 쟁점을 압축해 보여주는 기능을 합니다. 특정 사안과 관련된 다양한 사건이 현실의 한 인물에게 집중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영화는 다양한 사례를 큰 줄거리 안에 유기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관객들이 주제를 입체적으로 숙고하도록 안내합니다.

 

10월 10일 세계 사형 폐지의 날을 앞두고, 2009년 천주교 시사회에서 접한 영화 ‘집행자’를 다시 보았습니다. 흉악 사건이 알려질 때마다 제기되는 사형 집행 주장을 교도관의 관점에서 비판한 작품입니다.

 

신입 교도관 오재경은 상관 배종호에게서 재소자들을 통제할 폭력의 논리를, 최고참 김 교위에게서 인간에 대한 존중을 배웁니다. 교도관 생활에 적응할 즈음, 연쇄 살인범 장용두가 등장하고 여론이 격앙되면서 사형 집행 명령이 내려집니다. 집행자로 지명된 재경은 이 사실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김 교위는 착잡한 마음을 달래려 찾아간 옛 동료에게서 냉대를 받습니다.

 

형 집행 장면은 이 제도의 모순을 웅변합니다. 장용두는 “난 이제 못 죽이지만 너희들은 계속 또 죽이겠지!”라며 집행자들을 저주합니다. 죽은 이는 손쉽게 잊히고 산 이는 계속 고통받는 모순을 지적한 대사입니다. 교도관들은 집행 장치의 오작동으로 숨이 끊기지 않은 사형수를 처리하려다 손에 피를 묻힙니다. 누구보다 냉정하고 잔혹했던 배종호는 환각에 시달리다 병원으로 후송되고, 사형수들의 흔적을 지우는 일은 오재경의 몫이 됩니다. 신입교도관 배종호의 순박했던 모습을 회상하며, 그의 폭력성이 조직 안에서 형성되었고, 대물림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더 눈여겨볼 설정은 살인을 명령받은 상태에서 태아 살해를 암묵적으로 사주하게 된 오재경의 처지입니다. 미래가 불투명한 연인의 임신에 대한 당혹감과 형(刑) 집행에 대한 부담으로 그녀와의 대화를 회피한 그의 태도는 낙태를 부추기는 압력이 되고 맙니다. 집행한 그날 밤, 아이를 포기하지 말자고 속죄하듯 애원하는 그에게 돌아온 것은 자신의 피붙이를 죽였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지금도 흉악 범죄가 보도될 때마다 쇄도하는 사형 집행 요구에는 상선벌악의 정의에 대한 열망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형이 집행되던 과거의 우리나라에도, 사형을 집행하는 현재의 다른 나라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 중범죄자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택해야 할 것은 무고한 공직자들에게 대리 살인을 행하라는 무책임한 아우성이 아니라, 범죄의 원인과 맥락을 책임 있게 기억하고 규명하며 해소하라는 요구입니다.

 

[2020년 10월 11일 연중 제28주일 수원주보 5면, 김은영 크리스티나(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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