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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별별 이야기: 만남을 피하는 사람과 겉으로 만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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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20 ㅣ No.1018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44) 만남을 피하는 사람과 겉으로 만나는 사람 (상)

 

 

베로니카 자매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두렵다. 사람들을 만나면 기분이 좋은 경험보다는 대부분 부정적 감정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베로니카는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점심을 먹게 되었다. 서로 무엇을 먹을지 의견을 모으고 있는 과정에서 베로니카는 모처럼 회초밥을 먹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의견이 어떤지 알 수가 없어서 일단 자신은 아무거나 괜찮다고 의례적인 말로 얼버무렸다. 마침내 친구들은 서로 이걸 먹자 저걸 먹자 하다가 어느새 중국집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마지막 결정 과정에서 자신에게 한 번 더 의사를 묻지 않고 말이다. 자신이 아무거나 괜찮다고 말한 것은 친구들을 배려해서 서로 좋은 쪽으로 의견을 모으자는 말이었는데 친구들은 정말 그런 줄 알고 최종 결정에서 자신을 배제하고 말았던 것이다. 자신을 무시하고 존중하지 않는 친구들이라는 생각에 베로니카는 더 이상 그들과 점심을 같이 할 수 없었다. 결국, 갑자기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베로니카는 그 자리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베로니카는 왜 자신만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괴로워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이기적인지, 그리고 왜 사람들은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람을 오히려 배척하고 무시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이 모양이니 세상 사람들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에 베로니카는 쉽게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베로니카는 결국 사람들에게서 오는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되도록 사람을 만나지 않는 성격을 갖게 되었다.

 

스테파노 형제는 업계에서 마당발로 통한다. 스테파노는 주변인들이 자신을 대단하게 평가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자신 있게 사람들을 만나고 스스로 대인관계가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집안 식구들과는 관계가 좋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사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가족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자의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아이들과 시간을 좀 내달라며 대화를 청하는 아내에게 화가 난 스테파노는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면서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다. 결국, 이혼 위기에 처한 스테파노 형제는 도무지 가족들은 자신에게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면서 고통을 호소했다.

 

베로니카처럼 어떤 사람은 외부 사람을 만나면 쉽게 지치고 에너지가 고갈되지만, 스테파노처럼 어떤 사람은 외부 사람을 만나야 활력이 넘치고 에너지가 충전된다. 베로니카는 소수의 사람과 깊이 있는 친밀감을 추구하지만 여러 사람이 모인 곳은 불편해 했다. 반면 스테파노는 다수의 사람과 다양한 관계를 맺을 때 즐거움을 느끼지만, 가족과 같은 주변 사람들하고 있으면 별 재미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부분 사람은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자신과 타인의 관계에 적절한 균형을 맞추고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이런 두 극단에 속하는 사람을 찾아보는 것 역시 그리 어렵지 않다. 일반화의 오류를 경계하면서 베로니카와 스테파노의 경우를 우리는 부적응한 인간관계 유형의 두 가지 유형, 즉 회피형과 피상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회피형은 대인관계를 피하고 고립시키는 유형으로서 관계에 대한 욕구와 동기가 적고 관계의 폭이 제한적이다.

 

반면 피상형은 겉으로 보기에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친구가 많은 것처럼 보이나 실속이 없고 마음을 깊이 터놓는 사람도 없다. 친밀한 관계를 오히려 부담스럽게 생각할 뿐 아니라 친해지면 자신이 없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사람들을 가까이하면서도 속마음은 주지 않는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0월 18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45) 만남을 피하는 사람과 겉으로 만나는 사람 (중)

 

 

베로니카와 같이 대인관계를 피하고 싶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들은 선천적으로 민감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전체 인구의 15~20% 정도가 타고난 민감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적인 대인관계 스트레스를 억압함으로써 대외적으로는 문제가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가족이나 친밀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억압된 스트레스가 터져 나와 오히려 갈등이 발생하기 쉽다.

 

선천적인 민감성을 지닌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삶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자신의 민감성으로부터 오는 고통을 어떻게 감내하고 조절해야 하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하지만 자신의 민감성은 자연히 사람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피하고 싶은 욕구로 이어진다. 따라서 베로니카와 같이 대인관계를 벗어나고 싶은 ‘회피형’ 성격은 또다시 두 갈래의 유형으로 변화해 간다. 첫 번째 유형은 사람과의 만남을 별 볼 일 없는 일로 치부하는 ‘경시형’이고, 두 번째 유형은 사람과의 만남에 두려움을 갖는 ‘불안형’이다.

 

경시형은 관계에 대한 의미를 크게 부여하지 않으면서 혼자 외로움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고독을 즐긴다. 타인의 의견을 듣기보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함으로써 점차로 타인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자연적으로 삶의 허무함을 체험한다. “인간은 어차피 혼자다” “인간관계를 위해 쓰는 시간과 노력이 의미 없다” “세상에는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비관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사람과의 만남 자체를 경시하면서 회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의미 있는 인간관계를 경험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불행한 인간관계를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불안형은 관계에 대한 욕구도 높고 그 가치도 인정하지만 만남을 통해 생겨나는 상처에 대한 두려움으로 스스로 고립된 생활을 한다. 대인공포증을 겪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 유형에 속하게 되는데 자신감과 자존감의 결핍이 중요한 원인으로 등장한다. 타인으로부터 비판받기 어렵고 타인에 의해 쉽게 상처를 받기 때문에 “세상에 나처럼 바보 같은 인간을 좋아해 줄 사람이 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스스로 사람들로부터 벗어난다.

 

베로니카는 친구들과 헤어지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외롭고 쓸쓸한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만일 경시형이라면, 베로니카는 점심 메뉴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이기적이었던 친구들에게 또다시 인간에 대한 실망을 경험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베로니카가 불안형에 해당한다면 자신이 친구들의 결정에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혹은 점심 메뉴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아무도 그렇게 느끼지 않는데 자신만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이 친구들에게 드러날까 두려워서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고 볼 수 있다.

 

사람과의 만남이 원만하지 못하면 자연히 하느님과의 만남도 어려워진다. 대인관계에서 상처를 받았을 때, 그 원인을 타인에게 전가하면 경시형 회피가 생겨나고, 그 원인을 자신의 문제로 돌리면 불안형 회피가 발생한다. 경시형 회피는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의미를 경시할 수 있다. 사람에게서 참된 만남을 체험하지 못했기에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불안형 회피는 하느님 앞에 겸손되이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다. 늘 부족하고 죄인인 자신이 하느님 앞에 나타난다는 것이 마치 사람들 앞에 서는 것과 같은 불안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0월 25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46) 만남을 피하는 사람과 겉으로 만나는 사람 (하)

 

 

그렇다면, 회피형 베로니카와 달리 피상형 스테파노의 모습은 어떨까? 폭넓은 대인관계를 즐기는 사람 중 스테파노와 같이 가족이나 주변인들의 불만을 듣는 경우가 있다면 자신이 사회적 감수성이 낮은 사람은 아닌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 감수성이 낮은 경우 폭넓은 인간관계는 피상적으로 전락할 수 있다. 사회적 민감성이 부족한 상태에서 피상적 인간관계를 즐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사회적 민감성이 떨어지면 자연히 자기 중심성이 높아져 자신이 친밀한 정서적 접촉을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대인관계의 회피형을 경시형과 불안형으로 나누었듯이, 겉보기에는 인간관계가 원만해 보여도 깊게 마음을 터놓거나 속마음을 주지 않는 피상형은 ‘실리형’과 ‘유희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실리형은 성취지향적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데 현실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만 대인관계를 한다. 이들은 “나한테 조금이라도 이득이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게 현명한 일이야!” 라고 말한다. 반면 유희형은 무겁고 진지한 대화는 피하고 가볍고 재미있는 농담만을 좋아한다. “사람들과 골치 아픈 이야기를 할 필요 있어? 즐겁자고 만나는 거지!” 라고 말하면서 오직 놀이와 유흥에만 관심을 가진다.

 

만일 실리형이라면, 스테파노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친밀하게 대화하는 시간보다 다른 사람들과 비즈니스 관계를 넓히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회에서 도움이 될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사귀는 것이 집안에서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보다 훨씬 더 유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테파노의 피상적인 대인관계가 유희형에 가깝다면,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의미 있는 대화와 소통 혹은 진실하고 친밀한 만남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스테파노의 아내와 자녀들은 아버지의 이런 태도를 자신들에 대한 거부감으로 받아들이기에 결국 가정에 위기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피상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이들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기가 어렵다. 종교를 사회적인 만남의 도구로 삼는 실리적 입장의 신앙생활은 자연히 내적인 기도와 묵상보다는 외적인 활동을 중요시하게 된다. 활동은 열심히 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신앙인, 성당에 나가 신자들을 만나는 데는 시간을 할애하지만, 정작 감실에 계시는 예수님과 시간을 낼 여유가 없는 사람들일 수 있다. 반면 피상적인 관계가 유희형인 사람들도 내적인 하느님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교회나 성당에서 드리는 예배나 미사가 지루하거나 재미없다고 느낄 때, 혹은 신자들과의 만남이 유쾌하거나 즐겁지 않을 때 스스로 냉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신앙 안에서 사람들과 깊은 인격적 만남을 가지지 못한다면, 하느님과의 만남 역시 방해를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대인관계를 회피하는 베로니카(회피형)와 외적인 관계만을 중시하는 스테파노(피상형)는 모두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며 친밀한 관계를 맺기 어려운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그 결과 두 사람 모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할 수도 없었고 더 나아가 인격적인 만남을 생각해 볼 수도 없었다. 하느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기 이전에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먼저 진실하고 친밀한 관계를 회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할 수 없다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1요한 4, 20).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1월 1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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