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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29: 초기 교회의 성화와 성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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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2-07 ㅣ No.1321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29) 초기 교회의 성화와 성물


순교자 모발이나 피가 묻은 나무 조각을 성물로 몸에 지니다

 

 

1925년 파리에서 간행된 「조선과 프랑스인 순교자」에 수록된 삽화. 형장에 효수된 천주교인의 머리를 그린 것으로 그 옆에 나무 목패가 함께 걸려있다.

 

 

봉물짐에 숨겨온 성화와 성물

 

1784년에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귀국한 뒤 얼마 못 가서 조선 천주교회에는 1000명에 달하는 신자가 생겨났다. 신앙의 열기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앞서 「송담유록」에서 명례방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압수품 중에서 성화 상본이 든 작은 주머니가 사람마다 나왔고, 충청도에서는 신자들이 저마다 상본과 편경 등을 작은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는 기록을 살핀 바 있다.

 

한편 이승훈은 1789년 말, 윤유일을 통해 북경 천주당의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지은 몇 가지 독성죄(瀆聖罪)를 고백했다. 그중 세 번째 질문 중에 “북경에서 귀국할 때 저는 상본을 외교인들에게 맡겼다가 그 후 다시 돌려받았습니다. 그것은 독성죄가 아닙니까?”라고 한 내용이 있다. 국경 검색에 걸릴까 봐 지녀온 성물을 외교인의 손에 맡겼다가 되찾았는데, 이것이 신성 모독이 아니냐고 물은 것이다. 질문이 너무 순진해서 미소가 지어진다.

 

이 질문은 몇 가지 사실을 일깨워준다. 1784년 봄, 이승훈은 귀국할 때 천주당에서 받거나 자신이 구입한 많은 서학 관련 서적을 가져왔다. 여기에 더해 십자가와 상본, 그리고 성인 메달과 묵주 등의 성물도 듬뿍 받아와서, 신자들에게 나눠주었다. 명례방 집회 당시 저마다 성화 상본을 지녔다고 한다면, 당시 그가 가져온 물건의 부피가 만만치 않았을 테고, 이는 정상적인 국경 심문에 당연히 걸릴 수밖에 없는 물품들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이승훈은 어떻게 무사히 반입할 수 있었을까? 위 편지에서 이승훈은 외교인들에게 맡겼다가 다시 돌려받았다고 썼다. 아마도 수색에 예외가 되는 국왕에게 가는 봉물짐 속에 이 물건들을 숨겨왔을 테고, 그것은 서장관의 직분에 있던 아버지 이동욱 윗선의 양해와 지시가 있거나, 해당 실무 담당자와의 뒷거래가 있어야만 가능할 일이었다.

 

귀국 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신자들에게서 상본과 성물에 대한 요청이 빗발쳤고, 여기에 부응하려면 제작이 불가능한 편경 같은 성인 메달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집회 때 내걸 예수상이나 십자가와 묵주 같은 것은 점차 자체 제작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고 본다.

 

이글에서는 「사학징의」에 부록으로 수록된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요화사서소화기(妖畵邪書燒火記)」 중에서 책자와 문서류를 제외한 물품을 살펴 당시 전례에 소용된 성화와 성물에 대해 알아보겠다.

 

먼저 흥미로운 것은 한신애의 집에서 압수한 물품 중 도상판(圖像板)의 존재다. 도상판은 성상을 새긴 판목인 듯하고, 여기에 먹물을 묻혀 찍어낸 뒤 채색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신유년의 순교자 송재기(宋再紀)의 직업이 각수(刻手)였다고 밝힌 「사학징의」 속 공초 기록과 묘하게 겹쳐진다. 크기에 대한 설명이 없지만, 미사 전례를 드릴 때 벽 뒤에 붙여놓는 제법 큰 성화를 찍는 원본 틀로 보인다. 또 정광수의 집에서 나온 물품 중에 요화초(妖畵草) 1장이 있다. 성화를 직접 그린 초본으로, 복제를 위한 범본(範本)으로 보관된 것일 듯하다.

 

묵주 형태에 성인 메달이 달린 초기 교회의 성물. 다산영성연구소 제공.

 

 

두발과 나무 조각이 든 주머니

 

이밖에 성화 관련 물품은 한신애의 집에서 나온 도상족자 3개와 윤현의 집에서 압수된 요상족자(妖像簇子) 3개, 그것을 담아둔 요화갑(妖畵匣) 4개, 그리고 김희인의 집에서 나온 요화족자(妖畵簇子) 3개가 더 있다. 족자는 마족(魔簇) 또는 요족(妖簇)으로도 불렀다. 윤현과 김희영의 족자 중에는 여상(女像)이 하나씩 포함되었다. 성모 마리아의 화상이었을 것이다. 조금 큰 크기의 상본을 족자로 표구해 예배 장소에 펼쳐 거는 용도였을 것이다. 목인판(木印板)도 있으나 인문(印文)이 새겨진 것인지 성상을 찍어내는 인판(印板)인지 가늠키 어렵다.

 

눈길을 끄는 것은 유난히 많은 작은 주머니들이다. 새끼 꼬듯 엮어 짠 승낭(繩囊)과 진홍빛의 폭넓은 수낭(繡囊), 이밖에 백목각낭(白木角囊), 대목낭(大木囊) 외에 소소낭(小小囊), 색소낭(色小囊), 소소수낭(小小繡囊) 등 명칭과 종류가 다양하다. 이 주머니들은 앞선 글에서 보았듯 상본이나 편경을 넣어두고 호신부(護身符)처럼 몸에 차고 다니던 용도였다. 상본만 든 경우와 편경을 넣은 경우는 모양이 달랐던 것 같다. 성두(盛斗)로도 불린 주머니는, 편경을 솜으로 싸서 채워 넣은 모양이 가득 채운[盛] 됫박[斗] 같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던 듯하다. 조혜의의 공초 속에 사학하는 사람들이 몸 주변에 의례 차고 다니던 것들이라고 쓴 물건이 바로 이것이다.

 

한신애 집에서 나온 작은 주머니 6개 중에, 두발과 나무 조각 및 잡분말 등이 들어 있는 것이 있었다. 이 또한 앞서 보았듯 사학으로 사형당한 사람의 두발과 그들이 목이 잘릴 당시 목 아래에 고였던 목침의 도막이었다. 목침은 왜 받쳤나? 희광이의 칼날이 목을 자르고 나서 땅바닥을 찍어 칼날을 상하게 할까 염려해서였다. 굳이 붉은 천으로 주머니를 만든 것은 순교자의 보혈(寶血)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정섭의 집에서 나온 작은 주머니에서도 작은 나무 조각과 머리카락이 함께 들어있었다.

 

순교자의 두발이나 그들의 피가 묻은 나무 조각 등을 주머니에 담아 몸에 지님으로써 그들의 순교 영성이 자신과 일체화되고, 자신을 지켜주기를 꿈꾸었다. 한편으로 이들 주머니 속 물건들은 단순하게 상징적 소지에 그치지 않고, 기적을 만드는 성물(聖物)이 되기도 했다.

 

 

주머니 속 물건의 용도

 

조선 교회는 윤지충 순교 이후 북경 밀사 편에 윤지충의 선혈을 적신 수건을 여러 장 가져갔다. 이때의 사정은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자세하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1년 11월 13일 오후 3시에 형장에서 목이 잘렸다. 관부에서는 천주교인들이 공포에 질리도록 사형당한 시신을 현장에 그대로 두었다.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러도 좋다는 허락은 형이 집행된 지 9일 만에야 떨어졌다.

 

시신을 거두려고 형장을 찾은 친지들은 크게 놀랐다. 겨울이라지만 9일 동안 야외에 방치되었던 시신은 조금도 부패하지 않았고, 피부 또한 혈색을 띠고 있는 데다 경직 없이 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희광이가 목을 자를 때 머리를 얹었던 나무토막과 판결문이 적힌 명패에는 묽고 신선한 피가 전혀 응고되지 않은 채 방금 흘린 것처럼 흥건했다. 그해 겨울은 추위가 유난히 매서워 그릇에 담은 물이 얼 정도였으므로 그들의 놀라움은 점점 커져만 갔다. 어떤 이는 이같은 기적에 감동하여 입교하기까지 했다.

 

교인들은 기쁨으로 눈물을 흘리며 천주께 찬미를 올렸다. 그들은 많은 손수건을 가져와 두 순교자의 피를 적셨다. 그중의 몇 조각은 이같은 사정과 함께 북경 주교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의사마저 손을 놓아 죽음만 기다리던 어떤 환자는 피에 젖은 명패를 담갔던 물을 마시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밖에 죽어가던 여러 사람이 피가 묻은 손수건을 만지는 것만으로 병이 말끔히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작은 주머니 속에 들었던 물건들은 이렇게 해서 치유의 기적을 가져오는 거룩한 신앙의 징표가 되었다.

 

신유박해 때 사형당한 정섭(鄭涉)의 공초에도 이 주머니가 등장한다. 심문관의 질문 속에 “네 베개갑 안에서 나온 염주와 네가 ’흑진(黑珍)‘이라 부르는 이른바 성혈(聖血)을 담은 주머니”에 관한 내용이 있다. 정섭은 묵주를 베개 안에 넣어두고 그것을 베고 잤다. 또 성혈을 흑진이라 불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피가 오래되어 검은색으로 변한 것을 흑진, 즉 검은 보배로 불렀다. 정섭의 주머니 속 머리카락과 나무 조각에도 검은 보배가 묻어 있었다.

 

정섭의 공초는 이랬다. “압수된 염주는 재작년 여름에 제 아들이 천연두를 앓을 당시, 약 마시기가 어려울 때 잠시 가지고 놀던 물건입니다. 과거 기름장수 여인이 주었던 것으로, 여태 베개갑 안에 있었습니다. 두발과 자잘한 나무 조각이 담긴 주머니는 갑인년((1794) 12월에 제 아들이 복학증(腹症)으로 위독했는데 양근 사는 윤유일이 마침 땔감 값을 받으러 저의 집에 왔다가 제 아들이 병이 위중한 것을 보고, 자기 몸에 지녔던 이 물건을 꺼내주며 말했습니다. ‘어린아이의 학질 증세는 이 약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마시게 했는데, 끝내 효험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이 기록은 주머니 속에 든 머리카락과 나무 조각의 실체와 용도를 잘 보여준다. 초기 신자들은 순교자의 보혈과 두발, 그리고 그 보혈이 묻은 나무 조각들을 잘게 쪼개 작은 주머니에 담아 몸에 지니거나 베개 속에 넣어두었고, 중병이 든 환자에게 이것을 담근 물을 마시게 하거나, 손을 대게 하는 것만으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이밖에 편경(片鏡), 요경(妖鏡), 또는 마경(魔鏡)이라 불린 성인 메달과 미사를 드릴 때 벽장 가운데 예수상을 그린 족자를 걸고, 족자 위쪽에 장식용 장막으로 드리웠던 금수홍앙장(綿紬紅仰帳)이나 목홍금수앙장(木紅綿紬仰帳), 자적장(紫的帳) 따위의 물건들이 압수 품목 중에 더 들어 있었다. 목자목납요상(木字木妖像)도 궁금한 물건 중 하나다. 짐작건대 나무 목자 모양으로 된 나무 틀 한가운데, 주석 합금 재질로 된 성상(聖像)이 박혀있는 스탠드형 물건인 듯하다. 벽에 거는 족자 대신으로 탁자 위에 세워놓고 예배를 드릴 때 썼던 것으로 보인다. 납요상(妖像) 또한 편경이 아니라 조금 큰 형태의 성상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2월 6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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