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3일 (목)
(녹)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가톨릭 교리

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인의 정화(연옥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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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11-12 ㅣ No.6400

[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인의 정화(연옥 교리)

 

 

어렸을 적, 농구를 하다가 친구의 거친 파울로 얼굴에 큰 상처가 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친구는 사과하지 않았고, 저는 그 일로 오랫동안 마음이 아팠습니다. 얼굴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며 아물었지만, ‘왜 사과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과 속상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험은 ‘연옥’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는 종종 연옥을 지옥도 천국도 아닌 중간 어딘가로 막연히 생각하거나, 불 속에서 벌을 받는 두려운 곳으로 떠올리곤 하지요. 초기에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연옥을 ‘불로 정화되는 장소’로 설명했으며, 단테의 《신곡》에서도 그러한 이미지를 ‘불로 정화되는 물리적 공간’으로 그려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전해 주는 연옥의 참된 의미는 훨씬 더 깊고 따뜻합니다.

 

‘연옥’을 이해하려면 먼저 ‘은유’라는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은유는 그리스어 메타포(metaphor)에서 온 말로, ‘meta’(너머)와 ‘phor’(옮김)의 합성어입니다. 말 그대로 저 ‘너머로 옮긴다’는 뜻이지요. 즉, 은유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통해 하느님의 신비로 건너가게 하는 다리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실 때 ‘혼인 잔치’라는 은유를 사용하시자, 우리는 그 안에서 기쁨, 환대, 사랑, 친밀함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 것처럼 말이지요.

 

연옥을 설명할 때도 ‘불’이라는 은유적 표현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그 불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두려운 불이 아니라, ‘성령의 불’, 곧 ‘사랑의 불’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로 죄는 사라졌지만, 그 죄가 남긴 흔적들, 왜곡된 관계, 아픈 기억, 상처 입은 내면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습니다. 마치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낡은 옷을 벗는 것처럼, 남아 있는 불순물들은 사랑의 불 안에서 정화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은유는 단순히 장식적인 언어가 아닙니다.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의 의미를 드러내고, 그 의미를 통해 세상을 구원의 언어로 변화시키는 통로입니다. 즉 신앙의 은유는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닙니다. 따라서 연옥도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변화이며 하느님 사랑의 품 안에서 일어나는 따뜻한 포옹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삶 속에는 그때 그 친구처럼 사과하지 않았던 일, 끝내 다가서지 못한 마음의 엇갈림 그리고 전하지 못한 진심들이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연옥은 그런 미완의 상처, 우리가 다 해소하지 못한 아픔과 불완전함마저도 하느님께서 끝내 안아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연옥을 두려운 곳이 아니라,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사랑의 기다림, 정화의 은총의 자리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품 안에서 마침내 온전히 사랑받는 존재로 정화될 것입니다.

 

[2025년 11월 9일(다해)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평신도 주일) 서울주보 5면, 전인걸 요한보스코 신부(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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