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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제44회 인권 주일(제15회 사회교리 주간) 주교회의 담화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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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회 인권 주일, 제15회 사회 교리 주간 담화 “나에게 마실 물을 다오”(요한 4,7)
오늘은 제44회 인권 주일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혐오와 차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실 혐오는 어느 시대에서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그 가혹함을 드러내었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윤리적 자기 성찰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로 인간 존엄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였고, 그 힘으로 혐오와 차별을 넘어 사랑과 일치의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심각한 혐오 현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치유된 사람에게 더 악한 일곱 영이 다시 들어가 처음보다 더 나쁜 상황이 되었다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처럼(루카 11,24-26 참조), 인종, 성별, 국적, 종교, 사회적 조건에 따른 혐오를 넘어(사목 헌장, 60항 참조), 이제는 젊은이와 노인 그리고 심지어 자녀와 부모 사이에서도 혐오가 일어나고 있습니다(「모든 형제들」[Fratelli Tutii], 18-19항 참조). 그리고 혐오는 갈수록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지고 있는 혐오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매우 우려할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위안부와 강제 동원 피해자, 간첩 조작 사건, 5·18 민주화 운동,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와 그 유가족을 향한 혐오가 자주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혐오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역사적 고통과 슬픔에 함께하는 이에게도 커다란 충격이며 모욕입니다. 혐오는 또한 이주민과 난민, 특정 국가와 종교, 성소수자와 장애인 등에 대해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이러한 혐오가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 집단화, 이념화, 세력화되어 맹목적인 신념으로 더욱 굳어질 위험에 놓여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2024년 기준 국내 체류 외국인이 265만 명가량 되며 사실상 다문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회의 발전과 성숙은 ‘다양성의 수용과 조화’에 있음에도, 이주민은 아직도 많은 이에게 우리 사회의 이질적 존재 또는 배척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집니다. 이주 노동자는 이미 우리 사회의 필수 구성원이 되었지만, 그들에 대한 우리의 포용력과 존중은 2024년 화성 아리셀 화재 참사가 일어난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기피하는 영역의 노동을 담당하고, 수출과 내수에 큰 역할을 하는 그들이지만, 우리 일자리를 빼앗고 엄청난 국부를 유출한다는 거짓 정보가 마치 진실인 양 퍼져 있습니다(『간추린 사회 교리』[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 297-298항 참조). 나아가 돈으로 그들의 노동과 인권과 생명을 모두 살 수 있다는 그릇된 정서가 굳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혐오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억압과 불평등, 소외 등 매우 복합적인 원인이 있지만, 특히 이주민 혐오의 중심에는 “두려움과 불안”(「모든 형제들」, 39항)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생존과 보호’라는 벽을 쌓아 자기 안에만 갇혀 있을 때, 이주민들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고 혐오와 배척의 방식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적 혐오는 동질 집단과 상호 공감으로 말미암아 조직화되어 마침내 사회적 약자를 거듭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여기에다 일부 정치, 경제, 언론, 종교 집단은 사익을 좇아 이러한 혐오를 부추깁니다(「모든 형제들」, 39-46항 참조).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을 경멸하거나, 인간 존엄성과 공동선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를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선의를 가진 모든 이’에게 호소합니다. 혐오의 광풍을 잠재우고자 먼저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존엄하다는 근본 진리를 받아들이며, 모든 인간에게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품기 바랍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보편적 공감’의 길로 나아갑시다. 예수님께서는 긴 여행 끝에 사마리아에 이르시어 낯선 여인에게 ‘먼저’ 물을 청하시며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그 여인은 원수였던 낯선 유다인이 청한 부탁에도 마음의 문을 열었고,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합니다.
사회를 병들게 하는 혐오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은 그 시작인 ‘끼리끼리’의 ‘선택적 공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공감의 영역’을 넓히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대상과 인격적으로 만나 ‘보편적 공감’으로 나아가는 행동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통한 식별’로 혐오를 조장하는 거짓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일에도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496항 참조).
저는 정치인과 정부에게 요구합니다. 이념적 차이를 넘어 오직 공동선과 공존을 위한 참된 정치, 곧 ‘좋은 정치’를 해 주기를 바랍니다. 특히 정부는 모든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보호하고 불평등을 해소하며 공동선을 실현하는 데에 앞장섬으로써(『간추린 사회 교리』, 388-389항 참조), 혐오를 넘어서 사회 통합에 힘써 주기 바랍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혐오해야 할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악입니다(로마 12,9 참조). 혐오를 반드시 넘어서도록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서로 소통하며 보편적 형제애를 추구합시다. 그리하여 주님의 정의와 사랑이 실현되고 차별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2025년 12월 7일 대림 제2주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김선태 주교 0 1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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