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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영성: 사학 매파 간지대 정복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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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영성] 사학 매파 간지대 정복혜
신유박해 당시 이른바 사학매파(邪學媒婆)로 활동이 두드러졌던 사람은 간지대 정복혜와 율리아나 김연이, 그리고 레지나 복점 세 사람입니다. 앞의 둘은 순교했고, 사노비였던 복점은 배교해서 유배 갔지요.
사학매파란 당시 교리 교사의 역할을 맡았던 이들을 가리킵니다. 정복혜는 오라비 정명복 내외와 아들 윤석춘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녀는 이합규를 통해 세례를 받았던 서소문 공동체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녀는 여러 곳에 교리 교육을 다니면서 교리서를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남자 교우의 교리 교육은 정광수가, 여자 교우는 정복혜가 맡아서 역할을 분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신애의 집에서 압수된 수많은 교리 서적은 그녀가 맡겨둔 물건이었습니다. 그 압수 품목 중에는 도상판(圖像板)과 그림 족자 3개가 있었고, 작은 주머니 6개에는 순교 성인의 머리카락과 나뭇조각 및 성해와 관련된 가루 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세례명인 《성녀 간거다》라는 책도 나왔습니다. 이런 물건들은 교회 내 그녀의 위상이 만만치 않았음을 잘 보여줍니다.
1811년 중국 북경 주교와 교황님께 보낸 〈신미년백서〉에는 그녀의 세례명이 ‘감제대(甘弟大)’로 나옵니다. 감제대는 당시 중국에서 성녀 칸디다를 가리키는 표기입니다. 조선에서는 간지대로 불렀지만, 중국에 보고할 때는 그들의 표기법에 따라 감제대로 정확하게 표기했던 것이지요.
김계완 시몬도 우리 쪽 기록에는 ‘심원(深遠)’으로 그럴싸 하게 바꿔 적었지만 〈신미년백서〉에는 정확하게 ‘김서만(金西滿)’으로 시몬이란 세례명에 맞는 표기법을 썼습니다. 그래야만 중국 사람들이 그의 세례명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정복혜는 강단이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녀의 공초 기록은 비중에 비해 뜻밖에 단순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이합규에게서 사학을 배웠다고 당당하게 고백하고, 구차하게 구는 법 없이 배교를 거부한 채 이합규와 함께 1801년 4월 2일에 순교하였습니다.
하지만 같이 사학매파로 활동했던 비녀(婢女) 레지나 복점(福占)의 공초는 여러 진술 중 가장 길고, 거론되는 인물도 구체적이면서 다채로웠습니다. 그녀는 신분이 낮아 성씨도 없습니다. 그녀의 자백으로 인해 남대문의 과부 모임과 강완숙 집안의 내부 사정 및 전동 양제궁의 송마리아, 그리고 황사영 등 교회 주요 인물들의 동선도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포교에 진심이었던 그녀들의 엇갈린 마지막 행보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교회의 간짓대 역할로 허리를 떠받쳤던 정복혜의 담담하지만 당당한 진술과, 열심했지만 교회의 조직을 낱낱이 증언하여 제 목숨을 구걸한 복점의 대답 사이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 걸까요?
[2025년 12월 7일(가해)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서울주보 7면,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0 6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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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녀들과 묵주신공을 바치고 있는 김연이 율리아를 그린 그림.(탁희성 화백, 절두산 순교성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