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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불수호통상조약 120주년 한불수교와 종교자유: 지하교회서 지상교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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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1-27 ㅣ No.412

한불수호통상조약 120주년 한불수교와 종교자유


지하교회서 지상교회로 신앙자유 첫발

 

 

한불수호통상조약 후 자유롭게 군인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선교사들. 조약 체결로 조선교회는 전교의 자유를 얻게 된다.(사진제공 한국교회사연구소)

 

 

‘아자, 프랑스!’, ‘La Coree au coeur’(마음속에 한국을). 한불수교 120주년(1886년 6월 4일)을 맞아 한국과 프랑스 양국이 각각 채택한 슬로건이다.

 

올 한해를 관계 증진과 역동적인 교류의 출발점으로 잡은 양국은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서 여러 가지 기념행사를 펼쳐오고 있다. 교회사적 측면에서도 한불수교는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선교사 파견과 죽음, 군함파견, 병인박해와 양요. 한불수호통상조약 체결. 종교의 자유…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한국교회와 프랑스교회 교류의 토대와 양국 친선의 근간이 되고 있다.

 

 

시대적 배경

 

선교사 도움없이 창설된 조선천주교회. ‘가성직제도’의 문제점을 깨달은 후, 1794년 북경 구베아 주교 권고로 주문모 신부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주신부의 순교로 조선교회는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선교사를 맞아들이느냐, 아니면 종교 자유를 얻은 후 선교사를 맞아 들이느냐’는 갈등에 봉착한다.

 

교황청은 이 갈등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1831년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한다. 교황청은 교구장인 주교가 국내에서 직접 성직자를 양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박해로 인해 선교사가 희생되더라도 파리외방전교회가 선교사를 계속 파견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이어 1866년 병인박해…. 프랑스 정부는 박해로 선교사가 학살될 때마다 무력개교(武力開敎)를 위한 군사적 도발을 강행했으나, 이는 오히려 조선 정부의 쇄국정책을 더욱 강경하게 몰아갈 뿐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프랑스 정부는 평화적 외교 절충에 의해 통교와 개교를 결심하게 된다.

 

 

조약체결

 

1886년 6월 4일 프랑스 전권대사 코고르당과 조선 대표 김만식은 전교의 자유를 조문에 명시하는 한편 이미 체결된 다른 나라와의 조문을 수정, 전교의 자유를 삽입하는 것으로 합의한 후 협상이 시작된지 근 1개월만에 조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프랑스 선교사들은 ‘호조’(護照)를 가지면 조선 각지를 다니며 선교할 수 있게 됐으며, 미국 등 다른나라도 프랑스와 동등하게 선교와 교육사업을 실행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됐다.

 

조약에는 ‘호조없이 경계 이외로 여행하든지, 혹은 경계내에서 중죄나 경죄를 범한 프랑스인을 체포하면 가장 가까운 프랑스영사에게 인도하여 처벌케 한다’는 조항도 들어있다.

 

사실상 이는 여행증명인 ‘호조’가 없더라도 여행을 할 수 있게 하는 등 불법에 대한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규정이라 할 수 있다.

 

조약체결의 주역이었던 코고르당은 조약이 조인된 다음날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에게 “조선은 이 조약에 조인함으로써 사실상 박해를 재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종교자유의 완전한 승인은 아닐지라도 그 길을 향한 제일보를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자랑스럽게 통고했다 한다.

 

 

체결의 안팎

 

조약체결로 조선교회는 지하교회 시대를 벗어나 지상교회 시대에 돌입하게 된다. 완전하진 않지만 선교사들에게 주어진 치외법권과 전교의 자유는 조선교회를 신앙에 있어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하게 한다. 최초 성당인 종현 성당(현 명동성당)을 비롯 원산, 제물포, 부산, 마산포, 목포 등의 개항지와 수원의 갓등이, 평양 등 주요한 교우촌과 주요도시에는 성당이 건립된다. 또한 기존의 공소회장제도와 새로운 순회회장 제도를 정착시키면서 ‘교세확장’이라는 숙원을 달성해 갔다.

 

그러나 이런 외형상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합법적인 전교시대의 교회는 ‘반외세 반봉건’이라는 민족과 민중의 절박한 과제와는 동떨어진 교회였다. 지나온 박해시기에 신자들은 일반 민중과는 고립된 생활을 해왔고, 선교사들의 내세지향적이고 현실초월주의적인 신앙관의 영향을 받고 있어 숱한 고난과 탄압속에서 이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천상에서의 영광과 기복주의적 신앙관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또한 군사적인 방법으로 조선이나 이웃 나라에 충격을 가했던 ‘외세와 천주교는 한통속’이라는 생각이 양요속에서 더 굳어져 왔기에 교회에 대한 의혹과 거부감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신교의 자유

 

“자율적인 학문연구에 의해 도달한 한국인의 천주신앙은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창설된 초기부터 국금(國禁)과 박해의 대상이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이원순 박사는 “한말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믿음의 자유를 국민에게 선포하는 역사적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며 “그러나 교회와 정부의 거듭되는 교안(敎案) 대책의 절충 가운데 점진적으로 신교(信敎)의 자유가 현실화되고 내면화되었다”고 말했다.

 

조약체결로 신앙자유의 한 측면인 선교의 자유는 보장되었지만, 선교의 대상인 신자들의 신교의 자유는 결여되어 있어 분쟁을 초래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의 전교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신자와 비신자, 성직자와 관료, 교회와 사회세력간에 분쟁이 빈발, ‘교안’으로 비화하게 되었고, 이를 수습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신교의 자유도 진전하게 된다.

 

 

한 신앙안에 한 형제 교류 더욱 강화해야 - 한국에서의 삶 반세기 두봉 주교

 

 

1929년 프랑스 오클레앙시 신심깊은 가정에서 태어난 두봉 주교. 한국에서 6.25가 발발했던 1950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 사제품(1953)을 받은 다음해인 1954년 한국으로 들어와 대전 대흥동 보좌생활 10년, 이후 1967년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으로 피선,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안동교구 설립과 동시에 주교로 임명, 1990년 12월 안동교구장 퇴임. 두봉 주교의 약력이다.

 

한국 생활 53년째에 접어든 두봉 주교. 그러나 한국을 “조금밖에 모른다”고 겸손해 한다.

 

“참, 한국 신앙선조들 고생 많이했죠. 100여년 동안 그렇게 많은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끈을 놓지 않고, 오로지 주님께로 향하는 믿음을 드러내고 결국 순교했습니다.”

 

두봉 주교는 “한국교회 토대는 신앙선조들의 무수한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자들과 몰래 들어온 선교사들 모두가 강대국 앞잡이로 치부되던 당시, 산간벽지에 숨어지내던 신자들에게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첫걸음을 내딛게 된 것은 교회역사상 굉장한 전환점.

 

“미국이나 일본과 수교시에 획득하지 못한 신앙의 자유를 이때 보장받게 된 것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두봉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가 한불수교 전까지 선교사를 31명이나 조선에 파견했고, 그중에 12명이 순교했으며, 12명중 10명이 한국 성인 반열에 올랐다”고 말했다.

 

두봉 주교는 이와관련 103위 성인전 중에 나오는 대목을 소개했다. “김헨리꼬라는 파리외방전교회 젊은 신부가 한낮에 밖을 돌아다녔다. 이를 들은 장시메온 주교가 이 젊은 신부를 불러 굉장히 야단쳤다. 왜냐하면, 당신 혼자 체포되는 것도 문제지만, 당신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받고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가볍게 행동하느냐…”

 

신자들 생활이나 신부들 생활이 정말 비참했을 것이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교회사 안에서 엮어진 한국교회와 프랑스교회, 양국 교회간 교류확산 방안에 대해 두봉 주교는 “지금도 상당한 교류가 있죠. 정기적으로 양 교회 사람들이 왕래를 하고 있고, 한국교회 유학생들이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 생활하고 있다”며 이외에도 수도회들간의 교류와 파리외방전교회 준회원 자격으로 프랑스 현지인들을 사목하는 한국신부도 꽤 된다고 소개했다.

 

“나라간 교류를 통해 ‘가톨릭’이란 말이 갖고 있는 ‘공번된’ ‘보편된’이란 의미를 실천하는데 주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물론 ‘외규장각 문서 반환’이라는 장애물이 있지만 이것과 상관없이 양국 교회 교류는 보다 강화돼야 할 것입니다.”

 

두봉 주교는 자신에 대해 “비록 프랑스 국적을 가졌지만, 프랑스 사람으로 이 땅에 전교하러 온 것은 아니다”라며 “한국선교사가 외국에 나가는 것도 한국 대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쁜 소식을 나누려는, 주님의 도구로 해외로 나가는 것과 동일한 이치”라고 강조했다.

 

[가톨릭신문, 2006년 6월 4일, 장병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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