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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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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1-17 ㅣ No.664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 (상)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 위해 헌신

 

 

- 오블라띠회 설립자 성 에우제니오 드 마제노.

 

 

19세기는 교회 안에서 많은 선교수도회가 창설되던 시기다. 이즈음 1816년 프랑스에서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이하 수도회)가 새로운 삶을 출현시켰다. 모든 이에게 복음을 선포하지만, 특별히 ‘주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나를 보내셨다’는 말씀을 깊이 받아들여 가장 버림받은 이들에 대한 복음 전파를 카리스마로 삼았다.

 

수도회를 창설한 성 에우제니오 드 마제노는 “너희들 안에서 사랑, 사랑, 사랑하라. 그리고 모든 이들을 위해서 열정을 다해 사랑하라”고 강조했다. 회원들은 그 가르침을 따르며 공동체 안에서 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주어진 선교 사명을 완수한다. 그처럼 오블라띠인의 삶은 인간 공동체를 위한 삶이다.

 

1782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성인은 프랑스 혁명에 반대한 아버지를 따라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계속 유랑하며 친구도 없이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는 불안정하고 불투명한 생활 속에서 성인은 예수회 영성을 소개받았다. 예수회 사제로부터 기도하는 법과 고행을 실천하는 법을 배웠고, 그를 통해 성모 신심을 갖게 됐다. 이를 두고 성인은 훗날 “거기에서 내 사제직 성소가 싹텄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그 신앙의 불씨는 오래가지 못했다. 편안하고 세속적인 삶을 추구했다.

 

20세 때 망명 생활을 끝내고 귀국했으나 당시 프랑스는 혁명으로 인한 사회적·윤리적 혼란 속에 교회는 파괴됐고 짓밟힌 상황이었다. 사람들의 종교적 무지도 만연했다. 성인은 성금요일에 하느님 은총을 체험하며 지난 삶을 회개했다. 그리고 시대 안에서 교회의 시급한 요구에 동참하기로 했다.

 

1808년 파리에 있는 생 쉴피스 신학교에 들어간 성인은 1811년 사제품을 받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제요 종’이 될 꿈을 세웠다. 황폐해진 젊은이들과 전쟁 포로들을 직접 만나면서 소외된 이들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겠다는 뜻은 더욱 커졌다.

 

교구의 좋은 자리를 마다하고 엑상프로방스 지역 가난한 이들, 노동자들, 젊은이들, 병자들에게 다가가면서 자신의 직무를 시작한 성인은 이런 사목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절실하게 체험한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열성적으로 일할 사제들의 공동체를 떠올렸다. 그 목적은 ‘전부이지만 많은 이들 마음에서 사라진 신앙’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선교회 설립을 위한 온갖 노력 속에 마침내 1816년 1월 25일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에서 ‘프로방스의 선교사들’이란 이름으로 선교회가 탄생했다. 성인과 동료들은 상호 순명의 서약을 하고, 혁명으로 피폐해진 프랑스에서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1826년 2월 17일 레오 12세 교황은 선교회를 공식 승인했다. 이때 수도회 명칭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의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오블라띠 선교 수도회)로 변경됐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1년 1월 17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 (중)


가장 가난한 사람을 먼저 선택

 

 

- 오블라띠 선교수도회 회원들은 하느님의 이상과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위해 자신을 봉헌하는 가운데 수도자의 이상을 찾는다. 광주엠마우스 공동체 마우리찌오 신부(가운데)와 필리핀공동체가 무료급식소 안나의 집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오블라띠선교수도회 제공.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의 ‘오블라띠’ 어원은 ‘봉헌하다’ 의미의 라틴어 ‘오블라투스’(Oblatus)다. 그 뜻처럼 회원들은 하느님의 영광과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위해 완전히 자신을 봉헌하는 가운데 수도자의 이상을 찾는다.

 

다음의 회헌과 수도회 규칙에서는 이런 영성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드러난다.

 

“누군가가 오블라띠회의 수도자가 되기 원한다면 그는 자신의 완덕을 위해 무한한 열정을 가져야 한다. 또 그는 예수님과 교회를 위한 사랑과,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열정으로 불타올라야 한다.”(1853년 수도회 규칙)

 

“우리는 어느 상황에서도 우리의 소임은 울부짖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향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소임을 다함으로써 오직 예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구원과 희망을 그들에게 전달해 준다.”(회헌 5항)

 

회헌과 회칙은 설립자 성 에우제니오의 개인적인 체험과 시대 요구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회칙을 작성할 때 성인은 쉴피스회와 예수회 조언자들, 또 자신이 존경했던 샤를르 보로메오나 빈첸시오 드 폴, 알퐁소 데 리구오리와 같은 선교사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특히 회헌은 그의 독특한 인격과 함께 그가 복음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제시한다. 1817년 그는 ‘하느님 영광과 교회의 봉사, 영혼 구원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는 정신이 우리 회에 적합한 정신이다’고 적었다. 1830년에는 회원들이 ‘시련이나 갖가지 박해 중에서도 주님께서 그들 사명을 훌륭하게 수행한 충실한 종들에게 약속하신 것 말고는 다른 어떤 보상도 요구하는 일 없이 최선을 다해 일함으로써 하느님 자녀들을 돕고 구하며 그들을 하느님께 다시 데려오도록 명받은 아버지의 종들로 보아야 한다’고 썼다.

 

성인의 목적은 단순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소명을 ‘주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나를 보내셨다’고 하셨듯이,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첫째였다.

 

그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당대 교회의 비참한 상황에 통탄했다. 그리고 교회의 많은 이들, 가난한 사람들 가슴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믿음의 불꽃을 다시 되살리기에 사활을 걸었다. 그곳이 어디든 간에 가장 가난한 사람을 먼저 선택했다.

 

성인은 또 복음 선포가 수도자 개인이 아니라 소속된 공동체에 의해 수행된다고 여겼다. 그런 부분에서 수도 공동체의 일치와 친교를 강조했으며 수도회 안에서 이뤄지는 서원에도 중요한 의미를 두었다.

 

서원은 하느님께 드리는 약속이므로 그만큼 책임과 의무도 따르지만, 이를 통해 그 서원을 지킬 은총도 함께 받는다. 성인은 일반적으로 수도자들이 하는 청빈, 정결, 순명 세 가지 서원 외에 제4 서원으로 ‘인내’ 서원을 발하도록 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므로, 인내 없이는 사랑할 수 없고 또 변하지 않으면서 오래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1년 1월 24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 (하)


가난한 이 위해 헌신하며 선교

 

 

- 지난해 8월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 한국지부 회원들이 갱신 서원식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오블라띠선교수도회 제공.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이하 수도회) 회원들은 ‘선교사’를 자처한다. 한때 비오 11세 교황은 선교사들을 ‘교회의 특별한 사명을 띤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거나, 주님을 잊고 사는 모든 이에게 삶을 바친다. 많은 ‘오블라띠 선교사’들은 그들이 세상 어디에 있든지 찾아가서 그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 한다.

 

아울러 수도회는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를 오블라띠 선교사로 여긴다. 성모 마리아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또한 하느님을 본다. 그리고 함께 선교 사명을 수행한다. 선교사로서 회원들의 사명은 ‘십자가로부터 태생된 그리스도의 자녀들을 자애로운 어머니에게 데려오는 것’이다. 그래서 설립자 성 에우제니오 드 마제노는 성모 마리아를 ‘선교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설립 이후 수도회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위해 활동을 펼친다. 1841년 캐나다에 처음 해외선교사를 파견한 이후 영국, 스리랑카, 미국, 남아공에 계속 선교사를 파견했다. 에우제니오 드 마제노 성인은 프랑스 내부에서 활동할 인원이 충분치 않았음에도, 끊임없이 선교사를 해외에 보냄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드러냈다. 이러한 정신은 성인의 사후에도 지속돼 현재 65개국에 3500여 명이 활동하는 국제 수도회로 성장했다.

 

한국에서는 1990년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 초청으로 이뤄진 한국교회와의 인연은 1990년 5월 12일 마우로 콩카르디 신부와 빈첸시오 보로도(한국명 김하종) 신부가 한국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인 싹을 틔웠다.

 

이후 이탈리아, 스리랑카, 인도, 필리핀에서 선교사가 계속 파견되면서 한국 선교의 틀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국교회 안에서의 적응 기간을 가진 수도회는 1995년을 기점으로 한국인 회원을 양성했다.

 

수도회의 한국선교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그 관심을 실천으로 옮기는 과정 안에서 한 걸음씩 걸어왔다.

 

수원교구에서 활동하는 수도회는 ‘안나의 집’을 통해 무료급식소와 청소년쉼터, 그룹홈 운영에 기여하는 등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또 경기도 광주와 평택 지역 이주 사목과 병원 사목 분야에서 고유 카리스마를 펼치는 중이다. 지난해 2020년은 한국 진출 3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지만, 코로나19로 많은 활동이 차질을 빚었다.

 

한국지부장 류희구 신부는 수도회의 사목 비전에 대해 “사도적 수도 공동체로서 한국교회와 지역 사제들과 협력하며 수도회 카리스마를 지역 교회에 나누고,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명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북한 선교와 같은 새로운 사목과 지속적인 회원 양성을 위해 계속 투신하고, 회원들 간 소통과 진정한 신뢰에 집중해 더 깊은 유대 관계를 발전시켜 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1년 2월 7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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