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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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교부들의 신앙: 요셉 성인의 삶 - 곱하기 1과 더하기 1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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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5-22 ㅣ No.583

[교부들의 신앙 – 요셉 성인의 삶] 곱하기 1과 더하기 1의 차이

 

 

성모 성월 5월은 성모님의 배필 요셉 성인을 기념하면서 시작합니다. 5월 1일,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

 

바보 같은 질문을 던져 봅니다. 마리아와 요셉 중에서 누가 더 훌륭할까요? 물론 우위를 따진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지만, 예수님의 친어머니인 마리아에 비해서 예수님의 양부 요셉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요셉은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 성인은 요셉에 관하여 이렇게 묵상했습니다.

 

“요셉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아무런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가장 정당한 길로 오시도록 하느님께서 간택하신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교회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받았기에 동정녀께 큰 은혜를 입고 있다면, 동정녀 다음으로 요셉에게도 특별한 은혜를 입고 있으며 그에게 감사와 공경을 바쳐야 합니다”(「설교」, 2).

 

 

요셉의 봉헌 마리아의 봉헌

 

사실 요셉은 마리아 못지않게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고백은 마리아의 입에서 나온 것만이 아니라, 요셉의 삶을 통해서도 울려 퍼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했고,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자신만큼은 알았습니다. 세상 사람이 다 의심하더라도 마리아는 확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배 속의 아기, 곧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결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셉에게는 아무런 확신도, 손에 잡히는 그 무엇도 없었습니다. 그저 천사의 말을 믿어야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일, 이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적어도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배 속의 아기를 어루만지면서 주님의 손길을 느꼈을 테고 그렇게 세상의 편견과 부정적인 시선을 이겨 냈을 것입니다.

 

반면에 요셉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속으로 되뇔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를 자기 집에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게 되지만, 마리아의 일을 드러내고 그녀를 재판에 거는 것은 마리아를 죽음에 내주는 일이 될 터였습니다. 요셉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보다 더 높은 법을 따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해」 4,4).

 

 

태상과 요셉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요한 19,26-27 참조). 그런데 그보다 앞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딸 마리아를 요셉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잉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어도, 성령과 함께 하느님의 새로운 구원 경륜이 펼쳐지는 데에 요셉의 역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노자의 「도덕경」 17장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가장 훌륭한 임금은 백성이 다만 그가 있음을 알 뿐이고(태상 하지유지, 太上 下知有之), 다음가는 임금은 백성이 그를 친근히 여기고 칭송하는 임금이며(기차 친이예지, 其次 親而譽之), 다음가는 임금은 백성이 그를 두려워하는 임금이고(기차 외지, 其次 畏之)이며, 마지막은 백성이 그를 업신여기는 임금이다(기차 모지, 其次 侮之).”

 

가장 훌륭한 임금 ‘태상(太上)’은 백성이 태평성대를 누려 굳이 궁궐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임금이 누구인지 아니 임금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게 만드는 그런 임금이라는 뜻입니다.

 

태상의 모습은 ‘곱하기 1’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3+1=4’이고, ‘3x1=3’입니다. 더하기에서 1은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3을 변화시킵니다. 반면에 곱하기에서 1은 아무런 흔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3을 ‘충만한 3’이 되게 합니다.

 

요셉의 삶을 ‘곱하기 1의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3을 성령과 예수님과 마리아라고 본다면, 요셉은 ‘1’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더하기 1’이 아니라 ‘곱하기 1’로 함께했습니다. 복음서 안에서 요셉의 역할은 미미하지만, 그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곱하기 1’이 되어 3(성령, 예수님, 마리아)을 더욱 충만케 했으며, 그리하여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이 땅에 펼쳐지는 기초를 놓았던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요한 12,24), 요셉은 ‘땅에 떨어져 죽는 씨앗’이 되기를 선택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많은 열매를 맺으실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한 인물이었습니다. 요셉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길 바라지 않았으며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함으로써 그들이 요셉이라는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30)는 고백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태상과 같은 존재로 거듭난 것입니다.

 

 

곱하는 수 1이 되는 삶

 

‘곱하기 1의 삶’과 ‘더하기 1의 삶’. 우리는 ‘더하기 1’이 되고 싶어 합니다. 나의 존재와 가치가 드러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묵묵히 ‘곱하기 1’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면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을 두고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시던 동안 당신의 아버지로서 요셉에게 보여 주셨던 그 친밀성과 지극한 존경심을 하늘에서도 거부하시지 않으실 뿐 아니라 더 완전히 보여 주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설교」, 2).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는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참조).

 

예수님의 이 고백이 가정 교육의 결과라는 생각은 억측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어린 시절을 아버지 요셉 밑에서 보내셨고, 아버지에게서 (물론 어머니에게서도) 보고 배우신 것이 ‘제 뜻대로 마시고, 주님 뜻대로 하십시오.’ 아니었을까요?

 

‘증거 있어? 증거를 대!’라는 말이 일상이 된 사회, 권력과 명예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는 말씀을 실천한 사람, 요셉. 빛이 되어 주목을 받기보다는 빛을 비춰 주는 거울이 되는 데 만족할 줄 알았던 사람, 요셉.

 

성모 성월에 성모님과 더불어 요셉 성인이 보여 준 ‘곱하기 1’의 삶을 묵상합니다.

 

* 김현웅 바오로 – 성아우구스티노수도회 신부로 강화에 있는 돌렌띠노의 성 니콜라오 수도원에서 양성 담당을 맡고 있다.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교 아우구스티노 교부학 대학원에서 교부학을 전공하였다.

 

[경향잡지, 2020년 5월호, 김현웅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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