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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커피27: 클레멘스 8세 교황의 커피 세례에 담긴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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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1-22 ㅣ No.626

[사유하는 커피] (27) 클레멘스 8세 교황의 커피 세례에 담긴 의미


이슬람 음료를 그리스도인의 것으로 포용

 

 

커피에 관한 숱한 이야기들 가운데 ‘클레멘스 8세 교황의 커피 세례’는 커피 애호가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준다. 진위를 떠나 가톨릭교회의 최고 권위와 신앙인의 첫걸음인 성스러운 세례성사가 함께 등장하기 때문이다.

 

16세기 말 커피는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낯선 존재였다. 무슬림들이 밤새 잠들지 않고 쿠란을 암송하기 위해 마시는 이슬람만을 위한, 무슬림의 음료였다. 더욱이 색깔도 시커멓서 악마 중 우두머리인 사탄의 음료라는 꼬리표까지 붙였다. 항간에는 커피를 마시면 사탄에게 이끌려 성경을 멀리하게 되고 영혼을 빼앗기게 된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반면 무슬림들 사이에서는 커피에 대한 찬양이 더욱 증폭됐다. 무함마드가 동굴 고행을 하다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가브리엘 천사가 커피를 먹여 살렸다는 말이 돌았고, 커피를 몸에 지니고 있으면 지옥 불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엉뚱한 신념까지 생겼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때론 진실처럼 통하기도 한다. 커피에 드라마틱한 사연이 담기기를 소망하는 것은 커피 애호가들로서는 인지상정이겠다. 하지만 그릇된 애착이 지나친 과장을 불러 결국 커피 전체의 신뢰를 잃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조심해야 한다.

 

클레멘스 8세 교황의 커피 세례도 마찬가지다. 이 이야기의 근거가 될 학술적 기록이나 증언은 없다. 윌리엄 우커스가 1922년 펴낸 책 「올 어바웃 커피(All About Coffee)」에서 ‘전설에 따르면’이라고 전제하고 서술한 사연이 현재까지 역사적 사실인 양 회자되고 있다.

 

1570년대 로마에 커피가 도착한 뒤 삽시간에 퍼져 나가자 일부 사제들이 근심에 빠졌다. 이슬람은 포도주를 가톨릭의 음료라고 해서 엄격하게 금지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커피를 마시는 게 이내 불편했다. 이슬람은 성체성사를 통해 성찬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로 실체 변화하는 것을 부정하며 아예 와인을 마시지 못하도록 규정을 만들었던 차였다.

 

십자군 전쟁 이후 300여 년간 잠잠했던 가톨릭과 이슬람의 갈등이 이젠 민간의 문화 현장에서 격돌할 위기에 빠졌다. 가톨릭 일각에서 커피를 마시면 처벌해야 한다는 소리까지 터져 나오는 험악한 상황에서 클레멘스 8세 교황을 등장시킨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요지는 “일부 사제들의 득달같은 성화에 못 이겨 교황께서 직접 커피를 드셔 보고는 ‘사탄의 음료가 왜 이렇게 맛이 좋은 것이냐. 사람들에게 이를 못 마시게 하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설령 사탄의 음료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의 음료로 만들겠다’며 세례를 주었다”는 내용이다.

 

교황의 커피 세례는 실제 일어난 사건으로 보기에는 힘들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깊은 사유로 이끈다. 우선 클레멘스 8세 교황이 즉위한 1592년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발발한 지 75년이 흐르도록 가톨릭과 개신교가 날을 세워 혼돈이 거듭되던 상황이었다. 교황은 내부의 반성을 촉구한 성 프란치스코회를 지지하며 가톨릭의 개혁을 이끌었다. 이슬람마저 품어낼 도량을 지닌 분으로서 커피 세례의 주인공으로서 손색이 없었기 때문에 클레멘스 8세 교황이 등장한 전설은 커피 논란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큰 인물이 개입할수록 여론을 쉽게 이끈다는 정점이동 효과(peak shift effect)의 사례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세례이다. 사탄의 음료가 그리스도인의 음료로 바뀌는 극단의 현상은 죄인을 천사로 바꾸는 일처럼 힘든 일이다. 일곱 성사 중 가장 먼저 받는 세례가 그야말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거룩한 성사임을 드라마틱하게 비유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한 잔의 커피가 영혼을 정화할 수 있는 이유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1월 22일, 박영순(바오로, 커피비평가협회장, 단국대 외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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