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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실천적 거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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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1-09 ㅣ No.1512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실천적 거룩함

 

 

예수님을 닮는 거룩함

 

신앙인은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덕의 소명은 신앙인의 의무이고 책임이며 당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다양하고 실천적인 방식으로 성덕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라는 권고문을 통해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 문헌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강조하는 것은, 거룩함에 대한 새로운 성찰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거룩함, 성덕, 완덕 등의 개념을 자꾸만 종교적 특별한 경험과 업적으로 좁혀서 이해해 왔습니다. 순교와 영웅적 덕행들을 통해 거룩함에 도달하거나, 내면적 관상과 묵상을 통해 어떤 성덕에 다다를 수 있다고 흔히들 생각합니다. 또 아니면 어떤 종교적 관습과 행위에 깊이 침잠함으로써 완덕에 이를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교황님께서는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이란 좁은 의미의 종교적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옆집의 성인들’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처럼, 거룩함은 일상의 삶 안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교황님께서는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덕의 소명은 전업적 종교인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요청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교황님께서는 권고문을 통해 우리를 거듭 일깨우고 있습니다.

 

거룩함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일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신앙의 진리를 알고 동의하는 것이기도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재현하는 일입니다. 신앙은 무엇보다 닮는 일이라고 거듭 말씀드렸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실천적인 방식으로서 산상 설교의 내용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산상 설교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 곧 거룩함의 길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는 성덕에 이르는 길을 산상 설교의 여덟 가지 가르침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는 것, 온유한 마음과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 것, 함께 슬퍼할 줄 아는 것, 정의를 갈망하고 의로움을 추구하는 것, 자비로운 마음과 행동으로 사는 것,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 평화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것, 숱한 오해와 조롱과 모욕과 박해의 위험 속에서도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 산상 설교의 이 여덟 가지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일상적 실천의 길이라는 것을 교황님은 강조합니다.

 

 

거룩함의 판별 기준

 

거룩함의 길은 다양합니다. 신앙인은 일상적 삶의 자리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성덕을 실천합니다. 신앙인은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고 저마다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가난, 온유, 공감, 정의, 자비, 정화, 평화 등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거룩함을 향한 다양한 실천적 행위들을 판별하는 하나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 모든 행위들의 기준점은 마태오 복음의 최후의 심판 장면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5-36) 교황님께서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서 그분을 알아보라고 한 이 부름은 그리스도의 마음 그 자체, 곧 모든 성인이 닮고자 하는 그분의 생각과 선택을 드러냅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96항)

참다운 신앙적 행위, 거룩함을 향한 실천적 행위의 귀결은 이웃 사랑입니다. 물론 휴머니즘적 행위로서의 이웃 사랑이 자동적으로 신앙적 행위, 즉 거룩함의 행위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 행위는 이웃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말장난 같지만, 이웃 사랑 그 자체가 거룩함은 아니지만 거룩함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표현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거룩함은 이웃 사랑을 넘어섭니다. 하지만 언제나 이웃 사랑을 포함한다는 뜻입니다. 이웃 사랑이 없는 거룩함은 거짓이라는 의미입니다.

 

 

거룩함의 인간적 차원

 

이웃 사랑은 모든 신앙인에게 요청되는 의무입니다. 변명과 핑계를 대며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신앙인은 거룩함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예수님의 단호한 요구이기 때문입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97항)

 

거룩한 신앙인은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깊이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자신과 똑같이 존엄한 인간, 아버지께 무한한 사랑을 받는 피조물, 하느님의 모상, 예수 그리스도께 구원받은 형제자매로 여길 수 있”는 사람임을 뜻합니다.(98항) “모든 인간의 존엄에 대한 생생한 인식 없이”는 성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98항)

 

인간의 존엄성이 경시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존엄성과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우리는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산업 재해로 죽어가고 있어도 우리는 무관심합니다. 한국 땅에 와서 일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의 인권에 대해 알기를 귀찮아합니다. 여성의 존엄성과 인권을 위한 노력에도 점점 시큰둥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자기 자신과 가족의 범위를 잘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가족의 경계를 넘어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성덕은 일종의 무아경에 빠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96항) 성덕은 언제나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고, 그 이웃 사랑은 모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거룩함의 사회적 차원

 

거룩함은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 실천의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거룩함은 단순히 내면의 사유와 성찰, 관상과 묵상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언제나 실천적 행위의 차원에서 표현됩니다. 또한 거룩함의 실천적 행위의 차원, 즉 이웃 사랑의 차원은 단순히 선행을 베푸는 차원에 그치지 않습니다.

 

거룩함의 사회적 실천은 단순한 선행을 넘어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데로 나아갑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99항) 우리는 흔히 거룩함을 개인적 차원과 내면적 차원으로 좁혀서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거룩함은 개인적이고 내면적 차원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섭니다. 거룩함은 언제나 사회적이고 실천적 차원을 포함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을 강조하셨듯이, 성덕의 문제에 있어서도 거룩함의 사회적 차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캐나다 주교단의 성명서를 인용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한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거룩함의 사회적 차원임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99항) 거룩한 신앙인은 자기 세대의 기득권 수호가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한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1월호, 정희완 사도요한 신부(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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