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성미술ㅣ교회건축

성당 이야기39: 교회의 역할과 건축술의 발달 - 고딕 탄생의 서막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1-13 ㅣ No.761

[성당 이야기] (39) 교회의 역할과 건축술의 발달


고딕 탄생의 서막

 

 

일드프랑스를 중심으로 성장한 카페 왕조는 귀족들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도움을 받아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클뤼니 수도원(910년)과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년 재위)의 개혁으로 교회의 직무를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립시켰으며 동시에 교황권도 강화해 나갔습니다. 그 예로 교회는 1054년 동서의 분열 이후 중단되었던 보편공의회를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아닌 로마 교황의 소집으로 1123년 라테란에서 개최하였습니다. 이후 교황권이 절정에 이른 것은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년 재위) 때였습니다. 그는 교황권이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권한에서 나온 것임을 천명하면서, 세속의 권한보다도 우위에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에서 교황은 이단인 발두스파와 알비파를 단죄하고, 프란치스코회 및 도미니코회를 공인하는 등 교회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 로마네스크성당(上)과 고딕성당(下)의 단면 및 하중 비교.

 

 

교황권의 위상은 십자군 운동에서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고해성사의 엄격한 실천으로 신자들은 보속과 전대사를 위해서 예루살렘을 순례하였습니다. 성지순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은 부활의 영광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교도들의 팔레스타인 점령으로 성지순례는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그때 셀주크 투르크가 동로마제국을 위협하자 동로마 황제는 로마교회에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년 클레르몽에서 시노드를 소집하고, 예루살렘 성지의 탈환을 호소하였습니다. 이렇게 십자군 원정은 200년 동안 여덟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고, 소귀의 성과도 있었으나 부정적인 결과도 많이 초래하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군 운동은 당시에 만연했던 서유럽 국가간의 분쟁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교황권을 확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 대한 교회의 역할은 커졌고, 이러한 교회의 역량은 성당 건축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중심이 된 프랑스의 일드프랑스 지역은 건축적으로도 요지였습니다. 로마네스크를 주도한 남부의 부르고뉴와 북부의 노르망디의 중간에 위치하여 첨단 건축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곳은 지역주의를 넘어 보편주의 건축이 탄생하는 요건을 갖춘 것입니다. 고딕 성당은 교회의 신비를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교회는 빛이신 그리스도의 성사이고, 성당은 그 빛으로 가득 찬 건물입니다. 빛은 하느님으로부터 세상으로의 움직임입니다. 교회는 태양 빛을 받아 빛나는 달처럼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세상에 그 빛을 비춥니다. 성당은 그 빛을 받으려 높게 올려졌고, 이 높임은 세상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당을 높이려면 벽체가 두껍고 창도 작아야 하는데, 빛을 많이 받기 위해서는 창문이 크고 벽체가 얇아야 합니다. 이러한 건축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동안 로마네스크의 건축가들은 끊임없는 노력을 해왔고, 이제 그 해답을 찾기 시작하는 시기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고딕 성당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건축적으로 모든 준비를 갖추고, 그것을 시작할 성직자이자 왕의 조언자이고 동시에 건축가인 어떤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020년 11월 8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의정부주보 7면, 김한수 가롤로 신부(민락동 성당 주임, 건축신학연구소)]



1,509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