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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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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1-06 ㅣ No.1944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천주교인 김대건


세상 불의와 유혹에 맞서 당당히 신앙 고백할 수 있나

 

 

서울 새남터 순교성지에 마련된 국내 최대 규모의 야외 아트글라스 유리화 ‘김대건 신부의 축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신앙인은 누구든 이 물음에 답해야 한다. ‘천주교인’ 김대건은 이 물음에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답했다. 그리고 망나니의 칼날에 스러지기까지,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었다.

 

한국천주교회가 성 김대건 신부에게 던져진 이 물음을 주제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을 지내는 이유는 우리도 “천주교인”이라는 대답을 하기 위한 것이다.

 

 

천주교인 김대건

 

성 김대건 신부는 불과 13개월의 짧은 시간 동안 사제로 살았다. 하지만 그의 평생은 삼위일체 신앙을 온전히 살아간 신앙인의 모범이었다. 그가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성부께 대한 온전한 의탁,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그리고 언제나 자신 안에 머물렀던 성령의 도우심에 의한 것이다.

 

그는 성부께 대한 깊은 신뢰로써 환난 속에서도 천주께서 자신과 양떼들을 보호해 주실 것을 믿었다. 그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삶의 절대적인 주인으로 여기고 그분에게 충실하고 그분과 일치하는 삶을 살았다. 또한 그가 쓴 서한들에서 하느님의 성령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나타나지 않지만, 그는 언제나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이 자신의 삶에 충만하다고 믿었다.

 

김대건 신부는 자신이 결국은 체포돼 순교의 길을 걸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순교로써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를 원하고 준비했다. 옥중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내가 천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형벌을 당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적었다. 그는 순교를 하느님과 항구한 사랑의 일치 안에 머무는 계기로 여겼다.

 

 

서로 사랑으로 돌봄

 

하지만 김대건 신부는 이 세상을 벗어난 영복만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모든 교우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로 일치해 친교를 나누고 서로 돌봐 주기를 끊임없이 권면했다. 1846년 8월말경, 그는 옥중에서 마지막 회유문을 통해 환난 중에서도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矜憐)하실 때를 기다리라”고 당부했다.

 

초대교회는 종종 ‘대조사회’로 불린다. 세상 논리와는 전혀 다른,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법으로 통치되는 공동체의 모습이 주위 다른 이들과는 대조를 이룬다는 의미다. 그들에게 신앙 고백은 곧 사랑 실천이었다. 주님 안에 하나로 일치해 어느 누구도 소외되거나 굶주리는 일이 없도록 했다. 김 신부는 교우들에게 죽어서 하느님 앞에서 만날 때까지 한결같이 ‘큰 사랑을 이루어’ 살아가기를 권면했다.

 

이 세상에서 나타나는 하느님 나라 실천은 곧 평등과 박애정신으로 드러났다. 유네스코에서 성 김대건 신부를 ‘2021년 유네스코 세계 기념 인물’로 선정한 이유는, 김대건 신부로 대표되는 신앙 공동체가 복음과 신앙을 실천에 옮기면서 평등사상과 박애정신을 드러내고 구현했기 때문이다. 철저한 계급 사회, 차별이 엄격한 신분 사회 속에서, 모든 인간 존재의 동등한 존엄성을 지키며 평등사상을 실천함으로써, 초대교회 신앙 공동체는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증거했다.

 

 

“우리는 천주교인인가?”

 

희년을 맞은 한국천주교회는 “우리는 천주교인인가?”라고 스스로 물어야 한다.

 

여전히 기세가 줄지 않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는 인류에게 많은 물음을 거칠게 요구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는 생태계 파괴와 기후위기, 경제 양극화 등 위기를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서로 미워하고 분쟁과 갈등을 일상으로 여긴다. 교회 내적으로는 나태한 신앙, 새로운 무신론과 기술 만능주의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민족적으로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분단의 아픔 속에 놓여 있다.

 

한국천주교회는 격동의 근현대사 안에서 때로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통해 양심의 최후 보루로서 자리매김 되기도 했다. 반면, 일제에 협력하는 태도를 보이거나 맹목적인 멸공 이데올로기에 매몰돼 사랑과 자비의 정신, 민족적 자부심을 소홀히 여기기도 했다. 1990년대 말 이후 중산층화된 교회 안에는 가난한 이들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세속적 자본주의에 유혹되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김대건 신부와 그의 신앙 공동체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사랑과 자비의 정신을 삶으로 실천했다. 그와 신앙 선조들은 순교의 십자가를 지고서 세상이 주는 환난을 이기고 순교로써 신앙을 고백하고 실천했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관리에게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답했다.

 

이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몫이기에, 입을 모아 “우리는 모두 천주교인들이오”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삶으로써 이 응답을 증거해야 한다. [가톨릭신문, 2021년 1월 1일, 박영호 기자]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김대건의 시간을 걷다


숱한 역경 이기고 목숨 바쳐 이 땅에 복음의 씨앗 심어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

“어찌하여 임금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천주교를 믿는 거요? 그 교를 버리시오.”

“나는 천주교가 참된 종교이므로 믿는 거요. 우리 종교는 하느님을 공경하라고 가르치고 또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해 주오. 나는 배교하기를 거부하오.”

“배교하지 않으면 곤장으로 때려죽이겠소.”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나 나는 결코 우리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오.”

 

우리는 용맹했던 순교자 김대건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 김대건이 어떻게 성인 김대건이 될 수 있었는지는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듯하다. 죽음 앞에서조차 “나는 천주교인”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한 성인 김대건이 되기까지 김대건이 걸어온 시간을 함께 걸으며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면 어떨까.

 

 

성가정이 일군 신앙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 김대건의 시간은 여기서 시작된다. “시작이 반이다.” 신앙의 길을 걷기 시작한 김대건에게 이처럼 어울리는 말도 없을 것이다.

 

김대건에게 신앙의 스승은 가족이었다. 김대건의 증조부 복자 김진후(비오)의 세례를 계기로 솔뫼에 거주하던 김대건의 일가친척은 모두 신자가 됐다. 특히 복자 김진후를 시작으로, 숙조부인 복자 김종한(안드레아), 부친인 성 김제준(이냐시오) 등 여러 순교자가 나올 정도로 신심이 깊은 집안이었다. 또한 이들 가족은 박해를 피해 신앙을 지키고자 고향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서울 청파동, 한덕골, 골배마실 등으로 거처를 옮기며 생활했다.

 

이런 가족들의 굳은 믿음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김대건은 평생에 걸쳐 선대에게 물려받은 신앙을 자신의 신앙으로 삼아 소중히 간직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대건에게 신앙은 자기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김대건이 15세 되던 1836년 경기도 용인 은이공소에서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발탁된 것도 그가 성가정에서 자란 덕분이었다. 당시 모방 신부는 첫 조선인 신학생을 찾을 때 천주교 집안의 소년으로 신앙심이 깊고 사제 성소를 희망하며 건강·근면한 이를 선발했다. 신심 깊은 천주교 집안에서 충실하게 신앙교육을 받아온 김대건이었기에 모방 신부의 눈에 들 수 있었던 것이다.

 

 

역경, 역경, 그리고 역경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를 향했지만, 사제가 되기까지의 길에 김대건을 기다린 것은 수많은 역경과 좌절이었다.

 

우리는 김대건을 ‘최초의 조선인 사제’로 기억하지만, 김대건이 사제가 될 수 있을지를 그의 스승들조차 염려하는 신학생이었다. 일단 함께 선발된 신학생들은 이미 라틴어 수업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4개월 늦게 선발된 김대건은 동기들에 비해 신학 공부의 기본이 되는 라틴어 실력이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스승 신부들은 김대건의 판단이 늘 좋은 것은 아니고, 그의 문체의 완성도도 기복이 심하다며 학업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성격 면에서도 경솔하고 행동이 주의 깊지 못하다고 평가했다. 게다가 신학 공부를 시작한 1837년부터 7년가량 지속적으로 두통, 복통, 요통 등을 앓아 건강상 문제로 사제가 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이어졌다.

 

어려움은 개인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았다. 조선인 신학생 중에서도 가장 촉망받던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1837년 위열병으로 사망하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1839년에는 마카오에서 아편으로 소요 사태가 일어나자 필리핀 롤롬보이로 피신해 공부를 이어갔다. 또 부친 김제준이 순교한 것도 1839년 김대건이 신학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1842년부터는 마카오를 떠나 조선 입국을 위한 길 탐색과 신학 공부를 병행해야 했다. 조선 입국을 위한 김대건의 시도도 번번히 실패했다. 프랑스 함대를 통한 입국 시도를 시작으로 의주와 책문 등 중국에서 육로를 통해 입국하고자 5차례에 걸쳐 시도했지만, 1844년 부제품을 받기까지 결국 안전한 입국로를 찾지 못했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중국과 필리핀 등에서 신학 공부를 마친 김대건 성인은 1845년 사제품을 받고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곳을 찾아다니며 하느님 백성을 위해 헌신하다 1846년 순교한다. 그래픽 정희선.

 

 

“천주님의 안배로써”

 

순조롭기는커녕 우여곡절 속에서 신학생 생활을 한 김대건이지만, 그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그 숱한 역경을 오히려 성장의 발판으로 삼았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김대건은 프랑스 함대에서 얻은 약으로 고질적인 병에서 벗어나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매스트르 신부는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대건의 체질이 튼튼해져 신학 공부를 다시 계속할 수 있게 됐다”며 “그는 참된 빛에 눈을 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입국로를 찾기 위한 갖은 실패 속에서도 중국과 세계 정세를 파악해 나갔고, 중국인을 비롯해 다양한 사람을 대하는 법을 빠르게 체득해 나갔다. 프랑스 함대에 체류하는 동안은 프랑스어를 익히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고 페레올 주교 등을 영입하는 등의 활동에 큰 보탬이 됐다.

 

김대건의 편지를 살피면 난관을 극복할 때마다 “천주님의 안배”, 즉 하느님의 섭리가 도와주셨음을 믿고 감사하는 내용이 드러난다. 조규식 신부(대전교구 원로사목자)는 「김대건 신부의 영성」을 통해 “김대건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심한 박해의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자신에게 맡겨진 교회적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적극적으로 살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조선입국로 개척을 위한 김대건의 끈질긴 노력은 페레올 주교를 비롯한 그의 스승들에게 큰 감명을 줬다. 특히 부제가 된 김대건이 1845년 조선 입국에 성공해 넉 달간 서울에 머물면서 선교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치고 배를 타고 중국으로 돌아온 일은 페레올 주교가 김대건에게 먼저 사제품을 줘야겠다고 결심하게 해 준 사건이었다.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의탁으로 김대건의 단점이었던 경솔함은 용기가 된 것이었다.

 

 

사제 김대건, 그리고 순교

 

마침내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하이 진쟈샹(金家巷)성당에서 사제품을 받는다.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주교 등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조선을 향했다. 일행은 폭풍우를 만나 표류했지만, 다행히 제주도에 표착 후 재정비해 1845년 10월 12일 충청도 강경 황산포 인근에 정박해 조선에 입국했다. 김대건은 입국 후 한양, 경기 지역 신자들을 위해 활동했지만, 1846년 6월 5일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찾으러 백령도 등을 살피다 붙잡혀 같은 해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김대건이 사제로 살아간 기간은 고작 13개월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2개월은 조선에 입국하기 위한 시간으로 보냈고, 4개월은 감옥에 투옥된 시간으로 실제로 활동한 기간은 약 7개월여에 그친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보여 준 빛이 한국교회 신자는 물론, 비신자, 나아가 세계인들이 기억하는 김대건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빛을 밝힌 것은 그가 걸어온 전 생애를 통해 꾸준히 쌓고 닦은 삶과 신앙이었다. [가톨릭신문, 2021년 1월 1일, 이승훈 기자]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아! 최양업


매년 7000리<약 2750km> 걸어 사목 활동… 한국 첫 증거자 복자 탄생하길

 

 

올해는 가경자 최양업 신부(토마스·1821~1861)의 탄생 200주년이다.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생이자 두 번째 사제인 최 신부는 아직 시복되지 않았지만, 생애와 신앙인으로서의 궤적 등 그 삶은 신자들에게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하다. 2021년에는 최 신부가 복자품에 오르길 기도하며 그의 삶과 신앙, 시복 추진 과정을 살펴본다.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한 삶

 

“우리는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여전히 하느님 자비를 바라고 하느님의 전능하시고 지극히 선하신 섭리에 온전히 의지하고 있습니다.” 1847년 9월 20일, 부제였던 최양업 신부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스승 메스트르 신부와 프랑스 군함을 타고 조선에 입국하려다 강풍을 만나 난파해 귀국에 실패했지만, 이 또한 하느님 뜻으로 여기며 계속해서 희망을 지니고 살아가겠다는 의미다.

 

성 최경환(프란치스코)과 복자 이성례(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난 최 신부는 실제로 평생을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한 삶’을 살았다. 어릴 때부터 박해를 피해 다니면서도 하느님을 놓지 않는 부모를 따라 깊은 신앙심을 가졌다. 1836년, 15세 때 프랑스 출신 선교사 성 모방 베드로 신부에 의해 첫 한국인 신학생으로 선발됐으며, 생소한 외국어인 라틴어 수업을 받으며 목자로서의 삶을 준비했다.

 

그해 동료 신학생(최방제, 성 김대건)들과 순명·복종 서약을 한 최 신부는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고 이후 필리핀 마닐라, 다시 마카오로, 만주 소팔가자 등을 거치며 계속 수학했다. 그렇게 목자로 살기 위해 노력한 최 신부는 1844년 12월 10일경 동료 김대건 신학생과 함께 부제품을 받았다.

 

 

조선 복음화 위해 땀으로 증거

 

수차례 시도했지만 난파와 조선에서의 박해 등으로 번번이 조선 입국에 실패한 최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상하이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그해 5월 중국 요동 지방에서 사목을 시작했지만, 최 신부에게는 조선의 복음화라는 바람이 있었다. 다시 귀국을 시도한 끝에 그해 12월 3일 13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최 신부는 각 처에 있는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땀으로 신앙을 증거했다.

 

1850년 초부터 6개월간 5개 도, 5000여 리를 걸어 다니며 3815명을 순방했다. 이후에도 매년 7000리가 넘는 거리를 다니며 사목 활동을 펼쳤다. 전국 신자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서양인으로 오해받아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포졸과 외교인들에게 두들겨 맞기도 했다. 주막에서 쫓겨나 반쯤 나체가 된 몸으로 눈 쌓인 밤을 헤맸고, 박해를 피해 경상남도 외딴 지역에 갇혀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것도 최 신부의 신앙과 조국애, 신자들을 향한 애정을 빼앗을 순 없었다.

 

최 신부는 매일 80리에서 100리가 되는 거리를 걸으며 밤에는 신자들이 고해할 수 있게 했고, 날이 새기 전에는 또다시 떠나곤 했다. 그렇게 나흘 동안 계속해서 하느님 일을 하고 나서야 휴식을 취할 정도였던 최 신부는 결국 1861년 6월 15일 과로에 장티푸스로 선종했다. 12년 가까이 길 위에서 열정적으로 사목했던 최 신부는 떠나는 순간에도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되뇌었다. 당시 그의 나이 40세였다. 현재 최 신부는 충북 제천 배론성지에 안장돼 있다.

 

2018년 9월 대전교구 청양 다락골성지에서 최양업 신부 성상 및 무명순교자 십자가상 축복식이 열린 뒤 성지 전담 김영직 신부(성상 왼쪽 세 번째)와 관계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탄생 200주년을 맞은 올해 최양업 신부의 시복이 이뤄지려면 신자들의 기도와 관심이 절실하다. 다락골성지 제공.

 

 

시복되면 공적 경배 공경 가능

 

최 신부 시복시성 운동은 40여 년 전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가 시작했다. 1976년 당시 진천본당 주임이었던 장 주교는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본당 관할 배티공소를 방문했고 그곳에서 처음 최 신부에 대해 들었다. 이후 자료 조사를 한 장 주교는 최 신부가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생이자 두 번째 사제라는 점을 확인했고, 이를 당시 청주교구장이었던 정진석 추기경에게 알렸다.

 

1996~1997년 청주교구 배티성지는 최 신부 전기 자료집을 간행했고, 장 주교는 1997년 7월 시복 요청 청원서를 정 추기경에게 제출했다. 정 추기경은 그해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이를 안건으로 제출했고 이때부터 최 신부 시복을 위한 한국교회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최 신부 시복 법정은 2005년 12월 3일 개정돼 2009년 5월 20일까지 총 13회 열렸다. 그해 6월 3일 주교회의는 최 신부 시복 법정문서를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했고, 시성성은 시성성 통상 회의에서 안건의 최종 결정을 위해 보고관이 작성하는 최종 심사 자료 ‘심문요항’을 2016년 3월 14일 통과시켰다. 같은 해 4월 26일 최 신부는 교황에 의해 가경자로 선포됐다. 가경자는 순교나 영웅적 덕행이 인정돼 ‘공경할 만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순교 사실 자체로 기적 심사가 면제되는 순교자와 달리, 최 신부와 같은 증거자는 ‘영웅적 성덕’과 ‘기적’ 두 가지 모두 인정받아야 복자가 된다. 때문에 주교회의는 시복을 위한 다음 단계인 기적 심사 통과를 위해 2015년 9월 8일부터 총 14회에 걸쳐 기적 심사 법정을 마련하고, 2016년 6월 17일 시성성에 기적 심사 법정 문서를 제출했다. 시성성은 이를 전문가 등의 철저한 조사를 거쳐 기적으로 확인하면 통과시키고, 교황이 최종 재가하면 최 신부는 복자가 된다. 그렇게 되면 한국교회는 최 신부를 공적 경배로 공경할 수 있고, 한국교회 최초 증거자 복자 탄생이라는 경사도 맞는다.

 

 

시복 위해 신자들의 기도 절실

 

한국교회에서는 최 신부 시복을 위한 기도를 신자들에게 청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29일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는 2021년 사목교서를 발표하면서 “40여 년 동안 시복을 추진해 온 최 신부님 삶과 신앙을 묵상하며 그분을 본받는 한 해를 살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탄생 2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에 최 신부님이 시복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신자 여러분의 열렬한 기도를 청한다”고 밝혔다. 교구 신자들에게는 ‘최 신부 발자취 찾아가기’, ‘최 신부 시복시성 기도 전개’ 등을 주요 실천 지침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주교도 지난해 11월 29일 성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 공식 개막 미사에서 성 김대건 신부와 함께 최양업 신부를 언급하며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그분들의 사제적 열정과 사목적 헌신을 깊이 묵상하며 신앙 쇄신을 이루는 의미 있는 희년이 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2007년 4월 15일 당시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박정일 주교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기적 심사에 즈음하여’를 제목으로 담화를 발표하며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를 부탁드린다”며 “열심한 마음으로 최 신부님 유적지를 순례하거나 기도를 많이 바쳐 주시기 바란다”고 요청했다. [가톨릭신문, 2021년 1월 1일, 이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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