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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클 죠의 바티칸 산책34: 첨단시대를 사는 80년 된 손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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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8-17 ㅣ No.595

[엉클 죠의 바티칸 산책] (34) 첨단시대를 사는 80년 된 손수레


동대문시장 구르마, 십자가 돼 성모님께 봉헌되다

 

 

한국 현대사의 애환이 녹아있는 동대문시장의 구르마. 구르마를 해체해 특별 제작한 십자가가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아 봉헌됐다. 오른쪽 아래 사진은 교황님이 축성한 구르마 십자가.

 

 

긴 세월 동대문 시장통을 누비던 낡은 ‘구르마’(손수레) 한 대가 바티칸에 왔습니다.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온갖 애환을 싣고 왔습니다. 하느님의 십자가로 재탄생하여 왔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통해 성모님께 헌정되었습니다.

 

올 8월 15일은 저에게 세 가지 기쁨을 주었습니다. 첫째는 성모님 승천이고, 둘째는 조국 해방입니다. 셋째는 구르마 십자가를 성모님께 헌정한 것입니다. 몰타기사단(Order of Malta)의 한국 대표를 맡은 박용만(실바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지난 6월 특별한 부탁이 있다면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구르마 십자가를 성모 승천 대축일에 맞춰서 교황님께 전달해 줄 수 있겠느냐고! 네? 무슨 구르마인데요? 필시 깊은 사연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최첨단을 걷고 있는 요즘, 구르마 얘기를 하면 젊은 세대는 아예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고 나이 지긋한 세대도 구닥다리 운송수단 또는 역사의 골동품 정도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80년 전 지게로 짐을 지워 나르던 시절에는 바퀴 달린 구르마가 첨단 운송수단이었습니다. 동대문시장은 한국 현대사의 애환을 고스란히 안고 있습니다. 1905년에 개설되었다고 하니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시장입니다.

 

 

구르마의 숭고한 땀방울

 

“유행도 사조도 기술도, 첨단이 미덕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시의 골목길엔 70~80년 전의 구르마가 여전히 현역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직 짐을 벗지 못한 구르마의 숭고한 땀방울을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박용만 회장은 2년 전 동대문시장을 뒤져 30여 대의 ‘현역 구르마’를 찾았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족히 80년은 되어 보이는 구르마 한 대를 골랐습니다. 구르마를 해체하여 십자가를 제작했습니다. 이 작업은 공예가 최기 교수(강원대)가 담당했습니다.

 

구르마가 한국 현대사라면, 구르마 십자가는 한국 현대사가 압축적으로 저장된 USB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나라 잃은 설움, 해방의 기쁨과 분단의 비극, 한국전쟁의 상처, 산업화 시대 노동자와 농민의 땀, 민주화 시대 역사의 제단에 뿌려진 숭고한 피, 한국 노동 운동에 불을 댕긴 전태일 열사의 영혼! 이 모든 것이 구르마 십자가에 녹아 있습니다.

 

교황청 의전장 머피 몬시뇰에게 전화했습니다. 머피 몬시뇰은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제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신 분입니다. “대사님, 목포 아세요?” 제가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습니다. 교황청의 고위 사제가 어떻게 한국의 작은 도시를 아는지, 그리고 ‘목포’ 발음이 한국 사람과 어찌 그렇게 똑같은지,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그 배경을 물어봤습니다. 할머니의 남동생이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신부였는데, 목포에서 선교 활동을 하신 관계로 어려서부터 목포 이야기를 많이 들어 그렇다고 하더군요. 머피 몬시뇰에게 구르마 십자가 이야기를 했더니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모님의 간청 때문에 첫 기적을 앞당겨 일으켰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요한 2,1-12). 하느님께 순종하는 성모님과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예수님!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장면을 떠올리면 성모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무척 편해집니다. “성모님, 저의 기도를 전해 주소서. 효자 아드님에게!”

 

 

일치의 십자가

 

십자가는 일치를 의미합니다. 구르마가 땅과 구르마 꾼을 일치시켜 주었듯이, 구르마 십자가는 한반도와 성모님을 일치시켜 주지 않을까요? “성모님, 동대문시장의 구르마가 지상에서의 고달픈 삶을 떨치고 십자가가 되어 어머님 곁에 갔습니다. 한반도의 염원, 통일을 담고 갔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전해 주소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월 구르마 십자가의 사연이 담긴 8분가량의 영상물 ‘구르마로 만든 십자가’를 다음과 같은 글과 함께 페이스북에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신앙의 경건함과 노동의 경건함이 더해져 지구 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주교황청 한국대사관은 머피 의전장이 보낸 공문을 한 장 접수했습니다. 교황님께서 구르마 십자가를 받고 무척 기뻐하셨고, 십자가를 보내준 박용만 실바노와 가족에게 축복을 드린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감사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8월 16일, 이백만(요셉, 주교황청 한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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