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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 코로나19 이후 한국 가톨릭 교회: 사목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때에도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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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7-21 ㅣ No.1214

[경향 돋보기 – 코로나19 이후 한국 가톨릭 교회] 사목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때에도 우리는

 

 

신부님, 요즘 한가하시죠

 

공동체 미사가 중단되었던 지난 두 달여 기간 봉안 교우분들에게 가끔 듣던 말입니다. 사제로서 나름 바쁘게 사는 제게 건네는 위로의 덕담 정도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할 일이 없으시죠?” “심심하시죠?”라고, 곱지만은 않게 들리는 것은 왜일까요?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한가한가?” “심심한가?” “할 일이 없나?” “그저, 교우분들과 함께하는 미사가 없어서? 모임과 회합이 없어서? 사목이 불가능하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래도 되는 것인가?”

 

 

미사를 못 드리니 뭘 어떻게 하나요

 

미사를 드릴 수 없었던 많은 교우분이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미사는 가톨릭 신자에게는 신앙생활의 정수이기에 미사 없는 신앙생활은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주님의 날에 드리는 미사가 참으로 중요하기에, 교회는 주일 미사 참례를 신자의 의무로 규정하고, 신자 또한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기에 두 달 넘게 공동체 미사가 중단되자 많은 교우분이 하소연합니다. “미사를 못 드리니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미사가 없는데 무엇을 해야 하나요?”

 

믿음의 벗님들에게 조심스럽게 묻고 싶습니다. “미사만 드리면 신앙생활을 다한 것인가요?” “그리스도인의 사명, 그것은 바로 사랑 아닐까요?” “미사를 드릴 수 없어도, 사랑할 수는 있죠?”

 

 

미사는 중단되지 않았어요, 다만

 

공동체 미사가 중단되고 나서 언론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가톨릭 교회의 협조에 대해 우호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집단 이기주의에 빠진 일부 신흥종교나 교단과 달리 국민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이 과연 참종교임에 틀림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심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미사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성전에서 교우분들과 함께 봉헌할 수는 없었지만, 많은 신부는 간절하게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미사를 드릴 수 없는 교우분들을 위해서, 코로나19로 고통받는 분들을 위해서, 코로나19에 맞서 헌신적으로 싸우는 분들을 위해서, 코로나19 확산의 빠른 종식을 위해서.

 

 

미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요

 

미사는 가톨릭 신앙생활의 근본이고 핵심입니다. 아니 가톨릭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주일 미사 한 시간만으로 신앙생활을 다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미사 안에 신앙생활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미사는 ‘만남’이며 ‘함께함’입니다. 하느님과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만나 오롯이 함께합니다. 미사는 ‘살림’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과 성체로 먹히심으로써 믿는 이들을 살리시고, 믿는 이들은 말씀과 성체를 먹음으로써 삽니다. 미사는 ‘닮음’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하느님을 만나 하느님을 닮습니다. 말씀을 받아 먹고 말씀이 됩니다. 말씀이 되었으니 선포되어야 합니다. 성체를 받아 먹고 성체가 됩니다. 성체가 되었으니 먹혀야 됩니다.

 

 

너희는 받아 먹어라, 그리고 너희는

 

미사 경문에서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거나 뺄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모으는 핵심적인 말씀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많은 사람이,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삭막한 세상의 인간관계를 ‘먹고 먹히는 관계’라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먹고 누군가는 먹히는 세상에서, 먹히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모두가 먹는 사람이 되려고 바동거리는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에게 먹혀라.”가 아니라 “나를 먹어라.”라고 하시며 기꺼이 당신을 내어 주시는 주님을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섬김의 삶’을 유산으로 남겨 주신 예수님께서 성체와 성혈로 먹히심으로써 우리를 ‘먹힘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미사는 ‘먹고 먹히는 살벌한 경쟁 세상’ 속에 ‘서로에게 밥이 되는 함께 사는 세상’을 심고, ‘살기 위한 죽임’에서 ‘살리기 위한 죽음’으로 거룩한 전환을 이룹니다. 가톨릭 신앙인은 바로 이 미사에 참여합니다.

 

지난 두 달 동안 공동체 미사가 중단되었으니, 성체를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각자의 자리에서 성체처럼 먹히는 삶을 살 수는 있었습니다. 성체를 먹을 수 없는 아쉬움에 넋을 놓기보다 성체가 되어 벗들에게 먹힐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그러했는지요. 교회는 성체가 되어 세상 안에 존재하고, 그리스도인은 성체가 되어 이웃 안에 존재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그러했는지요.

 

 

공동체 미사가 중단되었다고 사목이 불가능할까요

 

공동체 미사가 재개되기 전까지 두 달여 기간 동안 본당을 비롯한 신앙 공동체 안에서 일상적인 모임 또한 중단되거나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본당은 비었고, 그리하여 사목은 당분간 불가능해졌다고 말하는 이가 많았습니다. 정말 사목이 불가능했을까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 곧 주님의 모는 것이 응축된 장(場)이 미사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세상 안에서 펼치는 일이 사목입니다. 미사는 사목의 시작이며, 사목은 미사의 마침입니다. 미사는 사목의 종합이고, 사목은 미사의 구체적 실현입니다. 미사 없는 사목은 존재할 수 없고, 사목 없는 미사는 공허합니다.

 

 

사목은 ‘함께함’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곧 사목이기에, 참되고 유일하신 사목자는 예수님이시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닮은 사목자로서 살아갈 소명을 받습니다. 사제가 직무를 받은 사목자라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보편적인 의미에서 세상의 사목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하겠지만, 굳이 표현하라면 ‘함께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임마누엘,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입니다. 함께하시려고 사람이 되어 오셨고, 함께하시려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셨으며, 함께하시려고 가르치시고 치유하셨고, 함께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목은 ‘함께함’입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말미암아 ‘함께함’은 쉽지 않았고, 여전히 그러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음으로 가까이 하기’ 사이에서, ‘얼굴 바라보기’에서 ‘마음 바라보기’로, ‘봄’에서 ‘느낌’으로 넘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함께함’이라는 사목의 영역에서도 ‘어떻게’ 함께할 것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함께하기 위해서 가야지요

 

‘길’이신 예수님께서는 ‘길 위’의 예수님이셨습니다. 함께하시고자 쉼 없이 이 고을 저 고을로 다니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자 당신께서 먼저 다가가셨기 때문입니다. 불러 모으시는 것도, 다가가시는 것도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크게 두 가지 사목의 밑그림이 그려집니다. 바로 ‘불러 모으는 사목’과 ‘다가가는 사목’입니다.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지만, 오래전부터 다가가는 사목이 점점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교회는 여전히 ‘불러 모으는 사목’에 안주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본당이라는 공간’과 ‘미사와 모임이라는 시간’에 불러 모으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워지면서, ‘다가가는 사목’에 새롭게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다가가는 사목자입니다

 

지구장으로서 공동체 미사가 중단되고 나서 홀로 미사 드리는 본당 신부님들을 찾아가서 제의실이나 사제관에서 순회 미사를 드리고 사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 미사가 재개되고 나서, 방역 지침에 따라 드문드문 앉아 계신 교우분들과 함께 두 번째 순회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나름 다가가는 사목을 실천하면서, 같은 실천을 하는 아름다운 신부님들과 교우분들을 만났습니다.

 

교우분들에게 SNS를 통해 날마다 강론을 보내거나 홀로 드리는 미사이지만 생중계로 또는 녹화해서 보내는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손 편지와 작은 선물 꾸러미를 문 앞에 걸어 놓고 가정 축복 기도를 바치고 돌아오는 신부님들도, 일일이 교우분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신부님들도 있습니다. 지역에서 힘들게 지내는 이웃들을 찾아 나서는 신부님들도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의 손발이 된 교우분들, 홀로 사는 어르신들에게 정성껏 만든 반찬을 나눈 교우분들이 있습니다. 홀로 성전에서 성체조배로 하고 가정에서 함께 기도하며 삶을 나누는 교우분들, 아픈 이들과 돌보는 이들을 위해서 정성껏 기도하는 교우분들이 있습니다. 영상으로나마 오롯이 미사를 봉헌하는 교우분들이 있습니다.

 

이제 첫걸음을 내딛은 느낌입니다. 불러 모을 수 없기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다가감으로써 불러 모을 수 있기를. ‘나’ 중심의 불러 모음에서 ‘너’ 중심의 다가감으로 사목의 얼굴이 바뀌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하셨듯이, 부족한 사제인 저와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과 우리의 어머니 교회도 그러할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 상지종 베르나르도 – 의정부교구 신부. 8지국장 겸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20년 7월호, 상지종 베르나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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