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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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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3-23 ㅣ No.640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9)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상)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창설

 

 

- 안드레아 바니 작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라 불리며 ‘중세기에 나타난 가장 사랑받는 성인 중 한 사람’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82~1226). 그의 가치는 최초의 탁발수도회 설립과 함께 800여 년의 역사 속에 교회 안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1206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태생적으로 많은 재산 덕분에 누렸던 안락한 삶, 가족들과 이별했다. 그리고 가난과 복음 전파의 삶을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하던 중 ‘프란치스코야,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말씀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이를 그와 그의 동료들이 교회 안에서 수행하게 될 역할로 받아들였다. 또 하느님 나라와 회개를 선포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가난과 복음 전파에 대한 계시로 알아듣는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확실히 깨달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 영적 차원의 교회 쇄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한 것이다.

 

이 무렵 프란치스코의 회개 생활에 감명을 받아 그와 같은 삶을 살고자 희망하는 ‘첫 동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프란치스코와 첫 동료 12명은 리보토르토(Rivotorto)에서 움막 생활을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 삶을 따르고자 하는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 자신이 더 그들의 유일한 생활 규범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1209년 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동료들이 인노첸시오 3세 교황에게 복음적 생활양식을 구두로 인준받음으로써 교회 안에 공식적인 수도회 모습을 드러낸다. 이후 이들은 회개의 삶을 몸소 실천하고 형제애를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작은 형제들’ 수도회로 뚜렷이 확장되고 발전하게 된다. 1223년 11월 29일 호노리오 3세 교황은 성 프란치스코가 작성한 회칙을 최종 승인하는데, 이 회칙이 「인준받은 회칙(Regula Bullata)」이다.

 

회원 수도 증가하고 평신도 단체인 재속 프란치스코회(O.F.S)도 생겨나는 등 성장을 거듭하던 수도회는 1274년 7대 총장 성 보나벤투라가 선종한 후 내적 갈등의 시기를 맞게 된다.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도시 안에 공동체를 세우고 살아가는 ‘꼰벤뚜알(Conventuali)’ 형제들, 엄격한 가난과 프란치스칸 영성 가운데 은수자적 측면을 강조하는 ‘열성파(Zelanti)’ 또는 ‘영성파(Spirituali)’로 나뉘게 된 것이다.

 

1517년 레오 10세 교황은 모든 개혁 그룹을 ‘옵세르반티 작은 형제회’ 이름으로 살아가게 했고, 1528년 여기서 ‘카푸친(Cappuccini)’이 개혁돼 다시 분리됐다.

 

1897년 레오 13세 교황은 이들을 ‘작은 형제회(O.F.M)’이름으로 통합해 살게 했다. 이로써 현재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창설자로 모시는 수도회는 꼰벤뚜알 작은 형제회(OFMconv.), 작은 형제회(OFM), 카푸친 작은 형제회(OFM cap.)가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3월 22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10)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중)


함께 더불어 사는 ‘꼰벤뚜알’

 

 

- 포르치운쿨라, 천사들의 성모마리아대성당 외부 장미정원으로 가는 복도에 세워진 프란치스코 성인의 동상.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꼰벤뚜알’(conventualis)이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온 것으로 ‘공동의, 수도원의’ 라는 뜻이다. 수도회 설립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으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세운 수도회를 가리키는 용어로도 쓰였다. 교회 밖 문헌상 최초 표현은 1241년 1월 9일 자 공증 문서에 ‘domus conventuales’(꼰벤뚜알의 집)라는 말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거주지를 지칭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교회 안에서는 공식적으로 1250년 4월 5일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이 칙서를 통해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사목하는 교회를 꼰벤뚜알 성당과 꼰벤뚜알이 아닌 성당으로 구분하고, 꼰벤뚜알 성당에서 미사 봉헌, 성체를 모심, 종을 칠 권리 등 특전을 허락할 때 처음 사용됐다.

 

이 명칭은 점차 보편화되어 1517년 레오 10세 교황의 회칙 「Ite vos」에 의해 엄수주의파(Osservanti)와 구별되면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고유 명칭이 됐다.

 

‘공동의’라는 꼰벤뚜알은 개인주의를 넘어 함께 더불어 사는 자세로 세계를 한 인류 가족으로 묶는 영성으로 풀이된다. 또 교회의 요청과 시대의 징표 요구에 응답하는 삶을 선택한 공동체란 의미를 내포하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고유한 카리스마라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수도회에 남겨준 영성은 ‘복음과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 ‘작음과 형제애’, ‘사도적 영성’으로 요약된다.

 

이 영성들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과 복음의 진리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수도회가 살아온 역사와 영성을 통해 실현하고 발전시킨 정신이다.

 

프란치스칸 영성이 변함없이 추구하는 원천과 지향점은 복음 속 예수 그리스도와 철저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겸손하고 가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었다. ‘복음과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은 이런 맥락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작음과 형제애’에서 작음은 한없이 자기를 비우는 여정 안의 예수 그리스도를 성찰한 데서 나오는 자기 이탈과 겸손, 섬김의 자세로 살아가도록 이끄는 가치다. 이 작음은 영성적인 겸손함뿐만이 아니라 사회의 작은 자를 가리킨다. 권력이나 재력, 명예, 특권을 바라지 않는 정신으로 사회의 작은 자와 함께하는 영성이다.

 

형제애는 우리 모두가 성령 안에서 형제자매가 되도록 이끄신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존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만들어 내는 가치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수도회 형제만을 형제로 부르지 않았다. 그에게 형제란 동료 수도자를 포함해 그리스도 신자, 이단자, 이교도, 심지어 모든 대자연의 피조물들까지 포함됐다. 이는 이념, 종교, 언어, 민족을 뛰어넘으며 보편적이고 우주적이며 인간애에 바탕을 둔 모든 피조물의 조화와 공존을 실현한다.

 

‘사도적 영성’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자신과 형제들 소명을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이를 회칙에 명시할 만큼 선교를 강조한 데서 나온다. 프란치스칸은 이처럼 사도적 소명을 통해 세상과 교회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봉사에 자신을 바친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3월 29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11)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하)


1958년 한국 진출해 전국에서 활동

 

 

- 1958년 10월 8일 부산에 도착한 회원들이 고(故) 최재선 주교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제공.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한국 진출은 1958년에 이뤄졌다. 중국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중국이 공산화 되는 과정에서 로마로 강제 귀환했던 이탈리아 파도바 관구 프란치스코 팔다니(Francisco Faldani) 수사가 일본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공부를 마치고 로마에 온 한국인 허철 신부를 만난 것이 계기였다.

 

이 두 사제는 한국 선교를 논의했고 같은 해 10월 6일 관구 차원에서 두 사람 파견을 결정, 팔다니 수사가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 범일동본당 사목으로 한국에서의 활동을 시작한 수도회는 1959년 당시 대구대목구장 서정길 주교의 요청으로 대구 범어동본당 사목을 맡았고 계속해서 1960년에는 부산 대연동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유치원과 수도원, 성당을 완공했다. 또 미감아들을 위한 성 프란치스코 보육원도 시작했다. 부산 오륙도 나환우 마을의 공소 사목도 벌였으며 1964년 9월에는 대구 화선 소신학교를 설립해서 성소 육성의 새로운 발걸음을 마련했다.

 

현재의 서울 한남동 수도원은 1966년 세워졌다. 처음 외국에서 오는 수도회 회원들이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거주하는 숙소 및 수도원 연락소로 신축됐으나 신학생 숙소 등으로 활용되다가 피정의 집으로 바뀌었다. 한남동 수도원 내 외국인 유치원 및 국제본당은 외국인 신자들의 만남 장소가 되고 있다.

 

서울 한남동 국제본당, 인천 갈산동본당, 대구 월배본당, 부산 대연본당과 기장본당에서 본당 사목을 펼치고 있는 수도회는 서울 외국인 유치원, 한남동 피정의 집, 부산 은하 유치원 등을 통해 교육 활동도 벌이고 있다.

 

사회복지 활동으로는 통진 프란치스코집, 인천 요셉의 집, 부산 성 프란치스꼬의 집, 평화장터 운영을 들 수 있다.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가 창설한 국제적인 마리아 신심 단체 원죄없으신 성모기사회 한국 본부를 두고 월간 「성모기사」를 발행하는 것도 수도회의 큰 몫이다. 아울러 재속프란치스코회의 영적 보조도 맡고 있다.

 

한국교회와 인연을 맺은 이후 가난하고 단순하며 겸손한 방법을 통해 사랑의 형제 공동체를 이뤄왔던 수도회는 이를 바탕으로 교회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파견돼 복음을 전파해 왔다. 이런 노력 속에 1975년 준관구, 2001년 관구로 승격됐다.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를 주보로 모신 한국 관구는 2020년 2월 현재 총 71명의 수도 가족을 두고 있다. 종신서원 수사는 65명이고 이중 사제는 48명이다. 국내 8개 수도원, 미국 1개 수도원 등 총 9개 수도원을 운영하고 있다.

 

교구 내에 있는 경기도 양평 정하상 바오로 수도원(원장 최영선 수사)은 개인 및 단체 피정을 통해 수도회 정신과 영성을 전하고 있다. 현재 9명의 회원이 거주하고 있으며 ‘숲 치유 피정’ 등 생태 피정 프로그램을 계획 중이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4월 5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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