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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사유하는 커피33: 합창교향곡과 인류애, 그리고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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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1-06 ㅣ No.637

[사유하는 커피] (33) 합창교향곡과 인류애, 그리고 커피


인류의 형제애 생각하며 커피 한 잔

 

 

유난히도 험난했던 경자년을 넘어서는 고갯길에서 인류애를 다짐하는 것은 코로나19로 인해 ‘마음의 길’마저 끊겨선 안 된다는 절실함 때문이다. 신축년 새해에도 우리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 두려움과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신념이 교차하는 가운데 떠오르는 한마디가 “모든 인간은 형제다”라는 명제다. 송년음악회를 장식하는 곡으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는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의 4악장에 울려 퍼지는 노랫말이기도 하다.

 

괴테와 함께 독일 고전주의의 2대 문호로 일컬어지는 프리드리히 폰 실러가 1785년에 지은 ‘환희의 송가’에 붙인 곡인데, 인류애를 상징하는 최고의 작품이 됐다. 베토벤이 스물두 살 청년에 이 시를 만나 감동을 받았고, 그의 삶에서 절반이 넘는 32년간 정성을 쏟아 교향곡으로 승화시켰다. 특히 청력을 완전히 잃은 절망적인 상태에도 의지를 꺾지 않고 12년을 매달려 탄생시킨 사연 때문에 아픔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강한 의지를 상징하기도 한다.

 

베토벤 특유의 웅장하면서도 강렬한 관현악 연주에 200여 명 대규모 합창단의 목소리까지 어우러져 듣는 사람들에게 내재한 에너지를 솟구쳐 오르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런 가슴 벅찬 경험은 절대자에 대한 경외감과 환희로 이어져 가톨릭 성가(401번 ‘주를 찬미하여라’)로도 사랑받고 있다. 인류애가 주님의 본질임을 성가로 고백하고 되새기는 것이다.

 

올해는 코로나19로 합창교향곡 연주가 취소되거나 다른 곡들로 바뀌었다. 대규모 합창단이 한 공간에서 노래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렛 어스 드림 -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길」이라는 책을 내고 인류애를 상기시켜 주신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코로나19로 무관심이라는 더 무서운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으며,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외면받고 힘겨워하는 이들을 향한 시선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는 교황의 말씀은 팬데믹 속에 울려 퍼지는 합창교향곡이다.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은 자들을 신비로운 그대의 힘으로 다시 결합시키는도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온화한 그대의 날개가 머무르는 곳에서.” 실러의 노랫말은 마치 작금의 코로나 상황을 예견하고 인류에게 선사한 위로인 듯 보인다. 베토벤의 폭발적인 교향곡은 이 대목을 더욱 고양하며 파편화되는 인류를 하나로 모이게 하는 정신을 샘솟게 한다. 여기에 “위험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해결책도 무럭무럭 자란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위로 말씀까지….

 

전쟁과 폭력이 아니라 무관심이 인류애의 반대말이라는 생각을 했다. 코로나19에서 찾아내야 할 교훈은 “연민을 갖고 삶의 속도를 늦춰 주변을 살피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교황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커피를 마주하고 묵상한다.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 연이어 떠오른다. 지리한 가뭄과 혹독한 폭우를 이겨내며 한 알 한 알 열매를 키워낸 미얀마 오지의 난민들, 총알이 슝슝 날아가는 내전 속에서 목숨을 걸고 커피 포대를 이고 지고 험준한 산을 넘어온 카메룬 보요의 농부들, 뙤약볕에서 일사병으로 커피 밭에 쓰러졌던 콜롬비아 안티오키아 농장의 스무 살 아기 엄마….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마다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행복이 전해지기를 기도한다. 각자의 소소한 삶에서도 인류애를 실천하는 시작점을 찾을 수 있다. 한 잔 커피라도 농장이나 작은 마을 단위까지 정확하게 명시되는 직접무역 또는 공정무역 커피를 가려 마심으로써 형편이 어려운 재배자들과 형제가 될 수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월 1일, 박영순(바오로, 커피비평가협회장, 단국대 커피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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