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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사유하는 커피12: 까트의 타락한 쾌락을 치유한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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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7-26 ㅣ No.590

[사유하는 커피] (12) 까트의 타락한 쾌락을 치유한 커피


집단 환각에 빠진 예멘을 구하다

 

 

주님이 정한 곳에서 자라는 커피나무는 굳이 재배할 필요가 없다.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창세 1,11)라는 말씀에 따라 저절로 자라는 듯하다. 여기서 ‘제 종류대로’란 와인에서는 테루아(Terroir), 커피에서는 스페셜티(Specialty)의 개념에 닿는다. 테루아에는 토양, 햇살, 바람, 배수 등 포도나무 한 그루를 성장시킨 조건들이 와인의 향미를 결정한다는 의미가 담겼다. 이런 가치를 에르나 크누젠이 커피에 적용한 게 ‘스페셜티’이다. 한마디로 한 잔에 담긴 커피를 맛보면 어디에서 어떻게 자랐는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있어야 할 곳에서 벗어난 존재’들에 대해선 이야기가 좀 복잡해진다. 아프리카 태생지에서 아라비아 반도 끝의 예멘으로 끌려간 커피나무는 일정 장소에 갇혀 자란다. 예멘은 인류가 커피를 처음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곳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이처럼 커피가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이슬람 국가로 넘어가면서 커피의 본성도 엉뚱한 면에 초점이 맞춰졌다. 커피는 더 이상 그윽하고도 매혹적인 향미로 인간을 행복에 젖어들게 하는 음료에 머무르지 못했다.

 

많은 무슬림에게 커피는 마약 성분이 들어 있는 까트(Khat)의 대용품이기도 했다. 까트는 멀리서 보기에 크기와 꽃이 피어 있는 모양새가 커피나무와 비슷하다. 커피는 꼭두서니과이고, 까트는 노박덩굴과로 서로 다르지만, 뒤섞여 자랄 수 있을 정도로 재배학적인 성격이 유사하다. 까트는 잎을 날로 씹어 먹는 것으로서, 열매 또는 씨앗만을 가려내 섭취하는 커피보다 앞선 시기부터 인류가 활용해왔다고 추측할 수 있다.

 

까트잎에 들어 있는 카티논(Cathinone)은 카페인과 같은 알칼로이드 계열의 환각 성분이다. 각성과 함께 공복감, 갈증을 느끼지 않게 하는 약효 때문에 더위를 잊거나 끼니를 때우기 위해 염소처럼 까트잎을 종일 씹는 사람들이 숱하다. 카티논은 카페인만큼 지능적이다. 화학구조는 ‘히로뽕’과 유사한 암페타민 계열이지만, 의존도와 독성이 낮고 환각 효과도 심하지 않다. 이런 전략이 사람들에게 경계를 풀게 하면서 계속 잎을 씹게 만들어 정신질환에 빠뜨린다. 일부 이슬람 수피교도들은 아프리카 고산지대의 선선한 그늘에서 자생하던 커피나무를 뙤약볕이 내리쬐는 사막지대로 가져가 억지로 키워내는 바람에 까트로 바뀌었다고 한탄한다.

 

진화생물학에서는 인류가 생잎을 씹어 먹은 것은 초식동물 때의 흔적으로, 잡식 탓에 생긴 기생충이나 병균을 알칼로이드 성분으로 없애기 위한 전략이라고 풀이한다. 일종의 이독치병(以毒治病) 과정에서 인류는 묘한 경험을 한다. 독을 섭취하자 신체에 알 수 없었던 보호기능이 작동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넣어 주신 고귀한 선물이다. ‘독이 침입했으니 얼마나 아프겠니’ 하는 속삭임과 함께 도파민이 분비돼 고통을 덜어준다. 그러나 인간은 까트를 도파민의 쾌감을 비명처럼 쥐어짜 내는 도구로 악용했다. 항우울제로서 요긴하게 활용되기도 하는 까트 자체가 악마의 식물은 아니다. 그 쓰임새를 벗어나게 한 인간의 탓이 아닐 수 없다.

 

까트로 인해 집단 환각에 빠진 예멘 사회를 구해낸 것이 6~7세기 아프리카에서 건너간 커피였다. 구약 성경의 신앙심으로 무장한 이슬람 수피교도들이 까트를 통째로 뽑아 버리고 무해한 커피를 마실 것을 권했다. 커피 음용이 일부 교파의 의식에 포함됐으며, 커피를 마시면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믿음도 퍼졌다. 카페인은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각성효과도 적절한 데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몸에서 빠져나간다. 커피는 애초 까트의 타락한 쾌락을 치유하도록 이슬람에게 주어질 선물로 계획된 것인지도….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7월 26일, 박영순(바오로, 커피비평가협회장, 단국대 커피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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