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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20: 야코포 팔마 일 조바네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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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13 ㅣ No.1300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0) 야코포 팔마 일 조바네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탐욕에 눈이 멀어 형제 도시를 짓밟은 비극의 역사

 

 

야코포 팔마 일 조바네, ‘1204년 4월 13일,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점령’, 1587년경, 캔버스 유화, 두칼레 궁 소장, 베네치아.

 

 

십자군, 본래의 뜻과 다르게

 

13세기에 들어서도 십자군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여전히 비잔틴 제국과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전쟁이 길어지자 유럽도 내부적으로 여론이 나빠지고, 각국의 정치적인 상황도 혼란스러워졌다. 신성로마제국은 노르만족이 차지하고 있던 시칠리아를 되찾아 왔고,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었고, 독일은 내전 중이었다. 비잔틴은 비잔틴대로 계속해서 이래 달라 저래 달라 징징거렸다.

 

전쟁이 길어지다 보니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하는 것이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다. 수송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누가 그 비용을 댈 것인가가 원정의 실질적인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제4차 십자군 전쟁이다.

 

1202~1204년 베네치아가 중심이 되어 단돌로 도제가 베네치아 시민들을 설득하고, 프랑스 샹파뉴의 조프루아가 십자군을 결성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재위 1198~1216년)의 독려하에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 플랑드르, 발루아 왕국, 신성로마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참가하기로 했다. 이들은 1201년 이집트 공략을 목적으로, 이듬해인 1202년 약속한 날까지, 3만 병력을 베네치아에 집결시켜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준비한 500여 척의 배로 이동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 베네치아는 동방 무역을 통해 유럽 최고의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던 도시 공화국이었다. 인도, 중국과 교역을 통해 얻은 후추와 각종 향신료와 비단, 면 등의 옷감은 물론 금, 은, 호박 등의 보석류까지 유럽 전역에 팔아서 막대한 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가령, 고기에 후추를 뿌려서 맛을 본 사람은 후추 없이 고기를 먹지 못했다. 더욱이 베네치아의 금융과 조선은 국가 경제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또 다른 두 축이었다. 지중해를 건너야 하는 제4차 십자군 원정대를 수송하기에는 누가 봐도 베네치아만 한 곳이 없었다. 1202년 6월 24일, 출발을 앞두고 베네치아는 군 병력에 맞추어 500척이 넘는 배를 건조했다.

 

그런데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예상 인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만 2000명 정도만 모였고, 이들은 베네치아에 약속한 수송비를 낼 능력도 없었다. 베네치아 입장에서는 배를 건조하고 병력을 수송할 인부에게 지급될 비용 등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단돌로 도제는 비용을 내지 않으면 병사들을 억류하겠다고 위협했다. 십자군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베네치아가 솔깃한 제안을 내놓았다. 헝가리의 항구도시 차라(Zadar)를 공격해 주면 수송비를 면제해 주겠다는 것이다. 차라는 동방 무역을 하던 베네치아에게 중요한 상업의 거점이었고, 그래서 한때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향력 아래 두었으나 얼마 전부터 베네치아의 통치를 거부하고 헝가리 왕의 통제 속에 들어간 달마티아의 해안 도시였다.

 

십자군으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런 상황을 감지한 차라는 십자군에게 항복 사절을 보내는 한편, 교황의 사절까지 동원해 십자군에게 철군을 명령했다. 하지만 십자군을 거의 진두지휘 하다시피 한 단돌로 도제는 교황 명령을 무시하고 공격을 선동했고, 평소 지속적으로 반항해오던 차라를 철저히 짓밟았다. 차라는 함락되고 주민들은 모두 쫓겨났다. 이 소식에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격분했다. 십자군이 이슬람 도시가 아닌 그리스도교 도시를 공격하다니! 십자군의 행위를 맹비난하며 십자군 전체를 파문시켜 버렸다.

 

교황의 눈 밖에 난 십자군은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때마침 비잔틴에서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알렉시우스 3세 황제의 폭정이 이어지는 가운데 망명 중이던 황제의 조카이며 황세자인 알렉시우스 앙겔루스가 십자군에 자신과 자기 아버지 이사키우스 2세의 지위를 회복시켜주고 왕권을 되찾아주면 십자군에게 이집트 정복을 위한 병사 지원을 해 주는 것은 물론,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가톨릭의 관할로 주겠다는 것이다.

 

곤경에 빠져있던 십자군은 일이 잘되면 이집트 원정도 큰 문제 없이 하고, 교황의 마음도 돌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단돌로의 야심은 차라에 이어 동방 무역의 최고 요충지인 콘스탄티노플까지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인노첸시노 3세 교황은 앙겔루스의 제안에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를 공격할 수 없다며 거절한 바 있었다. 십자군 측에도 혹여 그런 제안이 들어오면 거부할 것을 명령한 바 있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십자군과 단돌로의 선동, 원정의 실패를 두려워한 각국의 제후들과 장수들, 예전부터 비잔틴 제국에 깊은 원한이 있던 몬페라토의 보니파시오 공작은 결국 기수를 콘스탄티노플로 돌렸다.

 

 

베네치아 학파 대표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바로 그것을 그린 것이다. 베네치아 출신으로, 베네치아 학파의 대표 주자로 알려진 야코포 팔마 일 조바네(Jacopo Palma il Giovane, 1544~1628)의 ‘1204년 4월 13일,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점령’이다. 베네치아의 두칼레 궁 대회의실에 있다.

 

야코포의 부친 안토니오도 화가였고, 삼촌 팔마 일 베키오와 외삼촌 보니파시오 베로네세도 유명한 화가였다. 한 마디로 팔마 집안이 모두 화가였다. 야코포는 1564년 베네치아를 방문한 우르비노의 공작 구이도 발도 2세 델라 로베레의 극찬을 받으며, 그의 궁정으로 초대되어 1567년 5월, 트라이아노 마리오가 우르비노 공국의 대사로 로마에 파견될 때 함께 가서 4년간 있었다. 로마에 있는 동안 1568년, 「미술가 열전」에 나오는 ‘레체의 마태오 초상화’를 그렸다.

 

라파엘로와 틴토레토를 연구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고, 스승 티치아노의 그림을 모사하기도 했다. 스승을 도와 유명한 ‘피에타(La Piet)’를 완성하기도 했다. 그는 베네치아 학파에 머무르는 한편, 로마에 있는 동안 습득한 매너리즘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628년 극심한 가래로 사망할 때까지 400점 이상의 작품을 남겼다. 이 그림은 그의 매너리즘 연구가 빛을 발휘하는 작품의 하나로 간주된다.

 

 

로마 교회가 동방 교회에 가한 지울 수 없는 상처

 

십자군은 도시를 3일간 짓밟았다. 강간과 살인은 물론 저택에 침입하여 닥치는 대로 물건을 훔쳤고, 건물에 박힌 금과 보석도 뽑아갔다. 성인들의 유해와 귀중한 성물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교회로 보내졌다. 베네치아 군인들은 수 세기 동안 콘스탄티노플의 경마장에 있던 네 개의 청동 기마상을 가져가 성 마르코 대성당의 정면을 장식했다.

 

원정이랄 것도 없는 이 침범의 최고 수혜자는 베네치아였다. 그 후 마르코 폴로와 같은 상인들에 의해 베네치아가 누린 번영의 이면에는 이렇게 여러 번에 걸쳐 교황의 뜻을 어기고, 십자군의 난감한 상황을 이용하여, 경제적 이득과 자기네 입지를 굳히겠다는 야심과 집요한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전투를 목격한 증인과 역사가들은 십자군이 같은 형제들에게 보인 탐욕과 수치를 이야기했고, 그들에게 가한 엄청난 속임과 잔인함을 교회사의 최악의 사례로 언급했다. 교회 입장에서는 로마 교회가 동방 교회에 가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기록됐다. 이에 2001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 로마 가톨릭이 그리스 정교회에 저지른 제4차 십자군의 만행에 대해 사죄했고, 이로써 사건 800년이 되는 2004년, 양측 교회는 화해했다.

 

 

그림 속으로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야코포는 자기 조국이 저지른 이런 엄청난 역사적 ‘범죄’를 너무도 극적으로 잘 묘사했다. 당시 십자군의 함대인 갤리선이 좁은 해변에 꽉 들어차 있고, 배에서 혼잡스럽게 내리고 있는 수많은 병사, 난공불락의 성으로 알려진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기어오르는 십자군, 연기인 듯 구름인 듯 도시의 파괴를 묘사한 분위기는 총체적인 혼돈의 상황을 포착했다. 이렇게 성안으로 들어온 십자군은 성문중 하나를 열었고, 군 병력은 송두리째 도시로 진입했다. 수비군의 전투 의지가 꺾인 것은 한순간이었다. 성벽은 우측으로 뻗은 원근법적인 구도로 넣었다. 색의 대비와 크고 작은 인물의 극적인 몸짓을 통해 매너리즘의 특징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를 가장 매혹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고 하겠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0월 11일,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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