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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21: 안정복의 투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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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13 ㅣ No.1299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21) 안정복의 투혼


역사학자 안정복, 「칠극」 「기인십편 」 등 읽고 천주학 공박에 나서

 

 

안정복이 1784년에서 1786년까지의 책력 뒷면에 친필로 쓴 「안정복일기」 중에 자신이 집에 갖춰두고 작업하던 서책을 나열한 「자비서책질(自備書冊帙)」 목록이 있다. 그 중에 「천주실의」 2책, 「기인십편」 2책, 「영언여작」 1책, 「변학서독」 1책, 「직방외기」 2책이 포함돼 있다. 붉게 표시한 부분이 서학서 목록이다.

 

 

설득될 수도, 납득시키기도 힘든 문제

 

권철신의 절연과 이기양의 강력한 반발 앞에 노학자 안정복이 낙담한 모습은 참담하고 안쓰러웠다. 이때 안정복은 거의 멘붕 상태였다. 두 사람의 대응은 제 3자의 눈에도 확실히 지나쳤다. 특히 이기양의 도발은 남인 내부에서도 변괴란 소리가 나왔을 정도였다. 그들 내부에서 안정복의 논의가 자칫 큰 재앙을 부를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그만큼 높았음을 반증한다. 양측 사이에는 서학을 이해하는 입각점이 이미 도저히 합치될 수 없는 지점으로 멀어져 있었다. 그것은 결코 토론으로 좁혀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학계의 중진으로 후학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던 두 사람에 대해, 안정복이 십여 년간 계속해서 재기만 넘치고 경솔하고 천박하다고까지 비난함으로써 문제를 키운 측면도 있었다. 양측은 타협점 없이 전부냐 전무냐를 두고 다퉜다. 각자 자기 확신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중간 지점은 아예 없었다.

 

당시 권철신과 이기양 두 사람이 남인 소장 그룹 내에서 지닌 위상은 대단했다. 다산은 「녹암묘지명」에서 권철신에 대해 “공의 학문은 한결같이 효제충신을 종지로 삼아, 집에서는 부모에게 순명하여 뜻을 봉양하였고, 벗과 형제를 한 몸처럼 여겨 애쓰고 노력하였다. 그 문에 들어선 사람은 한 덩이 화기로운 기운이 가득 차 울려 퍼져, 마치 향기가 사람에게 끼쳐오고 지란(芝蘭)의 방에 들어선 것만 같았다”고 하고, 그가 서학으로 인해 고문을 받고 죽자, “아! 인후(仁厚)함은 기린 같고, 자애롭고 효성스럽기는 범과 원숭이 같으며, 지혜는 샛별 같고, 모습은 봄 구름 사이로 비치는 상서로운 햇빛 같았다. 형틀에서 죽어 저자에 버려졌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하고 가슴을 치며 슬퍼했다.

 

다산의 계부 정재진이 서학에 물든 조카들로 인해 분개하며 “권철신은 갈갈이 찢어 죽여도 애석할 것이 없다”고 말한 뒤, “그렇지만 집안에서의 행실만큼은 훌륭했었다”고 하자, 정약전이 “집안에서의 행실이 훌륭한 사람을 어떻게 찢어 죽인단 말입니까?”라고 반발했을 만큼 권철신은 주변 모든 이의 존경과 기림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복암묘지명」에서 다산은 이기양에 대해 “공은 타고난 자질이 우뚝하고 괴걸스러웠다. 이마가 둥글게 튀어나왔고, 미목은 시원스레 넓었다. 코와 입, 광대뼈와 뺨이 모두 오똑하고 풍만하였다. 키는 8척이나 되고, 피부가 뽀얗고 훤칠했다. 수염은 몇 가닥뿐이었지만 변설은 장강대하와 같았다. 젊어서는 물러터진 것을 싫어했고 예법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적었다. 마지막 문장이 안정복과의 회동 시 앙칼진 그의 성정을 환기시킨다. 정조가 뒤늦게 그를 만난 뒤 “이기양을 얻었으니 내가 아무 걱정이 없다”고 했을 만큼 임금의 특별한 신임을 받기도 했다. 그는 빈틈없는 문장과 명징한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들이 스승뻘의 안정복에 대해 대화 거부와 절연을 선언한 것이 남인 내부에 일으킨 파장은 컸다. 1776년에 홍유한을 따라 남행 계획을 세울 때부터, 그들은 이미 서학을 받아들여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품은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그들은 점차 성리학 내부의 해묵은 논쟁에 대해서도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이것은 이미 설득될 수도 없고, 상대를 납득시키기도 힘든 문제였다.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을사추조적발 사건은 안정복과 권철신 이기양과의 갈등이 점차 노골화되던 딱 그 시점에 터졌다. 안정복의 입장에서는 ‘그것 봐라!’ 할 일이었고, 신서파의 젊은 그룹들은 이 일의 배후에 안정복이 작용했다고 믿어,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기까지 했다. 정약전이 이 노인이 참 가련하다고 막말을 하고, 또 한편에서 지옥은 그런 늙은이를 위해 준비된 곳이라는 악담까지 나왔다. 신앙인의 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칠어서, 안정복은 천주는 사랑과 용서를 말하는데 너희가 그럴 수 있느냐고 말했을 정도였다. 안정복은 순식간에 남인 소장층의 공적이 되어 있었다.

 

「벽위편」에는 「안순암을사일기(安順庵乙巳日記)」의 한 자락이 인용되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내가 권철신과 이기양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1784년 12월이었고, 1785년 3월에 천주학의 옥사가 있었다. 그 무리들이 대놓고 말하기를, ‘광주로 가는 길에서 정씨(鄭氏) 성을 가진 문관이 내게 이 편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진신(縉紳)들 사이에 전해 퍼뜨렸다. 형조판서가 이 말을 듣고서 옥사를 만들었다’고들 했다. 나의 권력이 능히 평생 알지도 못하는 재상을 시켜서 내가 길에서 들은 얘기를 믿게 해서 이 일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이들이 망령되이 모함하는 말을 더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현재 전하는 친필본 「안순암일기」에서는 어쩐 일인지 이 대목을 찾지 못하겠다.

 

일기에는 당시 안정복이 느꼈던 위기의식이 그대로 느껴진다. 분명한 것은 명례방 추조적발 당시 권일신이 쟁쟁한 집안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형조의 뜨락까지 쳐들어가서 당당하게 성상을 돌려달라고 항의한 데서도 보듯, 초기 서학을 신봉하던 그룹들은 좌고우면하여 눈치 보거나 주눅들지 않았고, 언제나 정면 돌파와 반대당에 대한 선제적 공격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냈다는 점이다. 적어도 1791년 진산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공서파의 목소리는 신서파의 일사불란한 대응 앞에 늘 무력감을 맛보아야만 했다. 이에 대해서는 차차 자세히 검토하겠다.

 

- 「안정복일기 51」 표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진격

 

1784년 겨울 이후 안정복은 젊은 남인 학자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보다 공세적으로 대응할 필요를 깊이 느꼈다. 그는 성호의 증손인 이재남(李載南, 1755~1835)과 이재적(李載績)에게 편지를 써서 판토하의 「칠극」을 빌려 왔다. 그 편지에서 안정복은 “지금 들으니 우리 무리 가운데 연소하고 재기가 있는 자들이 모두 양학(洋學)을 한다 하니, 그 이야기가 파다하여 덮을 수가 없다”고 써서, 「칠극」을 빌리려는 이유가 천주학에 대해 적극 대응키 위해 공부를 하려는 것임을 밝혔다. 막바로 유옥경(柳玉卿)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근래 들으니 양학이 크게 번성해서 아는 이들 중 재지(才識)로 자부하는 자들이 모두 그 가운데로 들어갔다고 하니, 그대도 틀림없이 들었을 것일세”라 하고는 「기인십편」과 「영언여작」 두 책을 빌려달라고 했다. 두 편지 모두 1784년 겨울에 쓴 글이었다. 이들 책자가 서학을 믿는 것과 관계없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안정복이 1784년에서 1786년까지의 책력 뒷면에 친필로 쓴 「안정복일기」 중에 「자비서책질(自備書冊帙)」 목록이 있다. 자신이 집에 갖춰두고 작업하던 서책을 나열한 것으로, 그 중에 「천주실의」 2책, 「기인십편」 2책, 「영언여작」 1책, 「변학서독(辨學書牘)」 1책, 「직방외기」 2책이 포함되었다.

 

1784년 초 겨울에 안정복은 심유(沈浟)의 요청에 따라 「천학설문(天學設問)」이란 글을 지었다. 남인 젊은 학자 그룹에서 천주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나자, 심유가 안정복에게 입장을 물었고, 이에 대해 대답한 글이었다. 글에는 역사학자 안정복의 해박한 면모가 잘 드러난다. 그는 천주학에 대한 평소 공부가 있었다. 중국 역대 사서에 나오는 천주교 관련 언급을 간추렸고, 지옥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으며, 「칠극」의 주장에 회의를 표시하고, 액륵와략(額肋臥略), 즉 성 그레고리오(Gegorius)와 산자(産子)라는 서양 사람의 이야기를 인용해가며 서학의 주장을 공박했다.

 

1784년 12월 14일에 권일신에게 보낸 편지에도 천주학에 대한 공격적 논설이 상당 부분 전재되었고, 편지 끝에 자신이 이미 지은 「천학설문」이란 글이 있는데, 베껴 써서 보내줄 여력이 없다면서, “하지만 모두 망령된 주장이라 어찌 그대들이 이미 정하여 배움을 이룬 것을 움직일 수 있겠느냐?(然皆妄說, 何能動公輩已定之成學耶?)”라고 썼다. 「천학설문」을 보내줘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 편지를 받아 본 권철신은 더 이상의 토론이 무의미함을 깨달았고, 이에 무대응으로 일관하다가 거듭 안정복의 편지를 받았던 사정은 앞서 살핀 그대로다. 그 와중에 1785년 3월에 명례방 추조적발 사건이 터졌다. 서학 문제의 심각성이 처음으로 수면 위로 드러났다.

 

안정복은 이 문제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보아, 천주학에 대한 학술적인 공박을 통해 유학의 입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를 절감했다. 그리하여 즉각 「천학설문」에서의 소박한 논의를 확대 발전시켜, 중국에 천주교가 들어온 역대의 자취를 역사 기록 속에서 추려내 정리한 「천학고」를 쓰고, 천학에 대한 30여 조목의 질문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정리한 「천학문답」의 집필에 돌입하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0월 11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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