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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작가를 감동시킨 작품: 혹시 나의 양을 보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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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2-27 ㅣ No.772

[작가를 감동시킨 작품] 혹시 나의 양을 보았나요

 

 

평신도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지면으로 인사드립니다.

저는 박혜원 소피아이고 미술인으로 서울가톨릭미술가회에 몸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혹시 나의 양을 보았나요』라는 저의 책이 출간되어 이번 겨울호에서는 본 책에서 소개하는 ‘어여쁜 양’ 그림을 소개해 드립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양’은 그냥 양이기도 하면서 ‘천주의 어린양’입니다. 이 책에서는 성미술을 주로 다루고 있으니 성미술에 관심 있으신 분들께는 행복한 마음의 휴식을 얻는 시간이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다음은 본 책에서 부분 발췌한 것입니다. 서양미술사 속에 얼마나 많은 숨겨진 보석들이 많은지요. 코로나 19에도 불구하고 즐겁고 뜻깊은 연말 보내시길 기도드립니다.

 

 

2019년 봄, 나는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대도시 툴루즈(Toulouse)를 처음 방문하고 이 지역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다. 프랑스 남부에 여러 번 왔지만, 니스(Nice)를 중심으로 한 남동부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고 이 지역은 처음이다.

 

툴루즈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낸 지 어느덧 일주일째, 이곳에서 마지막 하루인 다음 날은 인근의 아름다운 성채도시 카르카손(Carcassone)을 방문하기로 아껴두고 여유롭게 툴루즈 시내를 둘러보던 중, 한 작은 뮤지엄숍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는 그림엽서를 발견했다. 타피스트리 작품으로 아주 세밀하게 표현된 들판의 모습이었다. 미술관 직원에게 물어보니 이는 작은 마을 소레즈(Sorèze)에 있는 돔 로베르 미술관(Musée Dom Robert)에 가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돔 로베르(Dom Robert, 1907~1997)의 작품은 예전에 본 적이 있지만 그의 미술관이 있는 줄은 몰랐다. 결국 카르카손은 다음에 가기로 하고 내 마음을 따르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하여 작은 마을 소레즈에 도착, 일명 ‘수도원-학교, 돔 로베르 미술관’(Abbaye-école de Sorèze, Musée Dom Robert)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곳에 이르렀다. 1776년 루이 16세가 세운 12개의 왕립군사학교 중 하나로 프랑스 각지의 최고 엘리트를 양성한 학교였고 이곳에 돔 로베르 미술관이 있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지만 프랑스인들이 사랑하는 작가 돔 로베르는 베네딕토회 수사 화가이다. 입회 후 계속 그림을 그리던 그는 1941년 그 유명한 아시 성당의 타피스트리를 제작한 장 뤼르사(Jean Lurçat, 1892~1966)를 만나게 되었고, 이는 그의 예술적 삶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돔 로베르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과 묘사력을 감지한 뤼르사는 이 같은 특성이 십분 발휘될 수 있는 타피스트리의 세계로 이끌어 주었고, 프랑스 중부에 있는 타피스트리의 메카 오뷔쏭(Aubusson)의 타바르 공방(Atelier Tabard)을 소개시켜 준다. 타피스트리는 독립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회화와 달리 화가가 도안을 그리면 이를 타피스트리 직조 장인들이 제작해야 하는 협업을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스테인드글라스 작업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유럽 중세시대부터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예술 장르인 타피스트리는 날실과 씨실이 교차하며 촘촘하게 직조되어 놀라운 밀도감을 빚으며 이미지에 고유의 힘을 부여해준다. 또한 양모와 면으로 짠 것이라 특유의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 역시 빼놓을 없는 중요한 매력이자 특징이다. 그는 말했다.

 

“가장 견고한 것, 영원한 것은 바로 자연이다. 나는 오직 자연만을 믿어 왔고, 자연에서 위안을 얻었다.”

 

내가 돔 로베르 작품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은 자신이 수사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종교 주제의 작품이 드물고 그저 시골 들판에 펼쳐진 ‘자연’ 그 자체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 주제에 제한된 시점이 아니라 활짝 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열려 있음’, ‘자유로움’이 내 마음에 와닿는다. 이는 단연 나만이 아니라 ‘열린 교회’를 외치는 현대인의 감성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느님 안에서 자유로운 그의 작품은 종교의 틀을 넘어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그에게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창조물인 자연의 미세한 아름다움의 털끝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강박적인 집요함이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 작은 들풀, 그 주위를 나는 나비 그리고 풀을 뜯는 말에 이르기까지 모두 똑같은 섬세함으로 묘사되었다.

 

그에게 자연은 ‘지나간 것’, 즉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 있는 것, 즉 단순한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살아있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자연의 모든 창조물이 고유의 고귀한 존재감을 갖고 있어 어느 디테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시선의 바탕에는 바로 ‘사랑’이 있다. 그에게 자연은 인간의 인식을 초월해 있고 황홀한 모습으로 빛나는 ‘넘을 수 없는 수평선’이다. 그가 꿈속 어릴 적 뛰놀던 언덕, 바로 에덴동산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만발한 들판」(Plein champ, 1970)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스케치북을 들고 뚜렷한 목표 없이 들에 나가 산책 중에 마주치는 것들을 그린다. 전원의 양, 염소, 말, 닭, 양귀비, 민들레 등. 그리고 작업실에 돌아와 다음 산책 때 놓친 것을 보충한다.”

 

어느 한순간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자연의 단면을 포착하여 그린 다음 계속 보충하며 소중한 디테일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그의 진지한 자세가 깊은 인상을 준다.

 

‘만발한 들판’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나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작품인데, 제목 역시 특별한 이중적 의미를 품고 있다. 지상의 온갖 생명체가 ‘만발한 들판’이라는 뜻이자 영어로 ‘plain chant’(플레인 챈트), 즉 ‘그레고리안 찬가’(Gregorian chant)를 일컫는다.

 

하느님의 축복으로 생기 넘치는 자연이 하느님께 바치는 색채의 찬가, 한평생 축복을 가득 머금은 태양, 빛, 온기를 좇은 돔 로베르의 진심 어린 기도이다. 작품 어느 부분을 떼어 보아도 하나같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자연의 단면을 보여주어 끝없이 감탄하며 화면 안으로 빠져든다. 수풀 뒤에 숨어있는 수탉, 붉은 양귀비 위를 나는 호랑나비…….

 

앗!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타피스트리 좌측 상단에 바로 내가 로카마두르 들판에서 만난 양이 있었다! 갑작스런 침입자의 등장에 깜짝 놀라 쳐다보던 바로 그 양이다. 내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놓은 그 양이 이 작은 시골마을 소레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순수하고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그의 눈 안에서 나 자신을 보았다.

 

신간 : 『혹시 나의 양을 보았나요』(프랑스 예술기행), 2020년 10월, 박혜원 저, 청색종이

 

[평신도, 2020년 겨울(계간 69호), 박혜원 소피아(서울가톨릭미술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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