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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33: 예수상 전문 화가 이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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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1-06 ㅣ No.1330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33) 예수상 전문 화가 이희영


성물 반입 어려워지자 기도문과 성화 책판에 찍어 보급하다

 

 

- ‘선미도’. 오른쪽이 정철조가 그린 그림이고, 왼쪽은 이희영이 베낀 모사본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각수(刻手) 송재기

 

초기 조선 교회에서 성화와 성상의 제작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1801년 봄, 신유박해가 시작되어 추국청이 설치될 즈음, 김의호(金義浩)가 송재기(宋再紀)의 집에 책판(冊板)을 찾으러 갔다가 그 집에 피신 와 있던 황사영을 만난 이야기가 「사학징의」에 나온다. 송재기의 직업은 도감청(都監廳)에 소속된 각수(刻手)였다. 「추안급국안」에는 그가 능화판(菱花板)을 새기는 전문가로 나온다. 그의 집은 훈련원 앞 황정동(黃井洞)에 있었다.

 

능화판의 섬세한 문양을 새기는 각수의 집에 천주교 신자인 김의호가 책판을 찾으러 갔다는 대목이 탁 걸린다.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송재기가 각수의 재능을 살려, 당시 수요가 빗발치던 기도문이나 성화를 책판에 새겨, 이것을 찍어 보급했을 가능성이 있다. 신자들에게 나눠 줄 상본의 세밀한 윤곽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도상판이 「요화사서소화기」 속 한신애 집 압수 품목 속에서 나온 것도 이 같은 심증을 더하게 한다.

 

「사학징의」 속 이합규(李逵)의 공초에는 “첨례날에는 아래채 벽장 안에 예수상을 걸어놓고 장막을 드리워, 방석을 깐 뒤에 여러 사람이 사서(邪書)를 강습하였다”고 했고, 최필제(崔必悌)의 공초에도 “새벽에 김이우의 집에 갔더니 홍문갑의 집에서 신부를 모셔와서, 첨례를 한다면서, 벽장 안에 예수상을 걸고 장막을 드리운 채 방석 등의 물건을 펼쳐, 신부가 윗자리에 앉았고, 저희들이 벌려 앉았는데, 창밖에는 김이우 집안의 여인들이 또한 앉아서 강송하였습니다”라고 미사 드리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집회소에 내건 예수상은 정광수의 벽동 집처럼 새로운 장소가 생겼을 때는 중국에서 가져온 원본을 내걸 수가 없었다. 국경 검색이 까다로워지면서 성물의 반입이 점점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결국은 화상판으로 찍어서 여기에 채색을 입혀 예수상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고, 그 역할을 각수인 송재기가 맡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예수상 전문 화가 이희영

 

완성도가 높은 예수상의 경우는 역시 직접 그려야 했다. 이희영(李喜英, 루카, 1756∼1801)은 당시 교회 내에서 예수상 그림에 독보적인 화가였다. 「순조실록」 1년 3월 29일 자에 실린 김백순(金伯淳)의 공초 관련 기록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죄인 이희영은 본래 김건순 집안의 식객으로, 김건순과 함께 주문모를 찾아가서 만났다. 하지만 전부터 몸가짐이 바르지 못함을 가지고 김건순의 부형에게 쫓겨난 바가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학에 오염되어 서울을 들락거리며 사학의 무리들과 체결하였다. 한 달에 네 번 재계하고 서양책을 외워 익혔다. 그림 그리는 법을 조금 알아, 예수상 3장을 모사하여 황사영에게 보냈다.” 글에서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다고 한 것은 그가 천주교를 믿었다는 뜻이다.

 

「사학징의」 중 윤종백(尹鍾百)의 공초에도 이희영이 국청에서 예수상 1장을 윤종백에게 그려주었다고 말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윤종백은 이 사실을 부정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그림에 얼마간 취미가 있습니다. 이희영이 그림을 잘 그린다는 이름이 있어서, 연전에 이희영의 거처로 찾아가, ‘어옹쇄망도(漁翁網圖)’와 ‘동변일출서변우도(東邊日出西邊雨圖)’ 등 그림 두 장을 받아 온 적이 있었고, 그밖에 다른 그림을 받아온 일이 실로 없습니다.”

 

당시 이희영이 윤종백에게 어부가 그물을 널어 말리는 장면을 그린 그림과 동쪽에는 해가 나고 서쪽에서는 비가 오는 날씨 풍경을 그린 그림을 주었다는 것인데, 이것만으로도 이희영의 화가로서의 그림 솜씨는 가늠하기가 어렵지 않다. 윤종백은 예수상을 받은 일만은 극력 부정했다. 실제 그림을 받고 안 받고를 떠나, 이희영이 그린 예수상이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 소문이 나서 그의 그림을 얻어 모시려고 윤종백이 이희영을 접촉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황사영도 백서에서 “이희영 루카는 김건순 요사팟의 친밀한 벗입니다. 앞서는 여주에서 살다가, 나중에 서울로 옮겼습니다. 본래 그림을 잘 그려서 성상(聖像)을 잘 모사하였지만, 또한 참수되어 순교하였습니다”라고 했고, 강완숙의 아들 홍필주도 「사학징의」에 실린 공초에서 “예수 화상을 준 사람은 이추찬(李秋餐)입니다”라고 한 바 있다. 추찬은 이희영의 자이다.

 

이들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예수상만 해도 황사영에게 3장, 윤종백에게 1장, 홍필주에게 1장 등 5장이나 된다. 당시 전국의 천주교 집회에 첨례일이면 내걸리곤 하던 예수상은 중국에서 건너온 원화 외에는 상당 부분 이희영의 솜씨로 그려진 것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희영 작 ‘앉아있는 개’.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소장.

 

 

이희영의 개 그림

 

유감스럽게도 이희영이 그린 예수상은 박해의 와중에 모두 사라져서 현재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소장했던 ‘견도(犬圖)’이다.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 옆에 오세창이 친필로 쓴 글이 있다. 그는 이희영을 두고 “서양의 화법을 모방해서 그린 것은 우리나라에서 효시가 된다(西洋法, 寫之者, 爲我邦嚆矢.)”라고 했다.

 

이어지는 인적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추찬(李秋餐)은 양성(陽城) 사람이다. 진사 이소(李)의 아들이다. 서화에 빼어난 재주가 있었고, 그림은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 1730∼1781)에게서 배웠다. 일찍이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을 위하여 석치가 그린 ‘선미도(仙圖)’를 모방하였다. 성씨 집안에서 대대로 간수하다가, 지금은 또한 내 서재로 돌아왔다. 순조 원년 신유년(1801) 봄 사학의 옥사 때 추찬은 붙잡혀 가서 처형되었다. 일찍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찾아갔다가 사학에 깊이 빠졌다. 또 예수상 3본(本)을 황사영에게 그려준 일이 탄로 나서 자복하였다. 그의 조카 이현(李鉉, ?∼1801) 또한 사학으로 형을 받아 죽었다.”

 

그림 좌측 상단에 ‘추찬초(秋餐艸)’란 작가 서명이 보인다. 서양 품종의 경주견 개가 긴 앞 다리를 뻗친 채 뒤쪽을 돌아보는 모습이다. 대상의 특징을 간결하게 포착하는 솜씨가 인상적이다. 갈필의 옅은 먹으로 마치 연필화의 느낌이 나도록 그렸다. 털빛의 명암으로 원근의 느낌을 적절하게 잘 살렸다.

 

이희영에게 추찬이라는 자를 지어준 사람은 이덕무(李德懋, 1741∼1793)였다. 그의 이름 희영(喜英)이 꽃잎[英]을 기뻐한다는 뜻이어서, 「이소경(離騷經)」에 나오는, “저녁에 가을 국화의 진 꽃잎을 먹누나(夕餐秋菊之落英)”라 한데서, 가을 꽃잎을 먹는다[餐]는 뒷구절을 따서 지은 것이다. 당시 벗들이 이름이 절묘하다고 칭찬하여, 이후로 그의 자로 불렸다. 이 이야기는 「추안급국안」 속 이희영의 추국 기록 속에 나온다.

 

 

새로 찾은 ‘선미도(仙圖)’

 

이밖에도 실경산수풍의 ‘누각산수도’가 남아 있고, 다른 ‘쌍견도’는 진위 판단이 어렵다. 그러던 중, 윗글에서 오세창이 자신의 집에 있다고 자랑했던 이희영의 ‘선미도’가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된 사실을 간행 도록인 「서소문별곡」을 통해 알게 되었다.

 

똑같은 구성의 사슴 그림 두 장이 나란히 그려져 있다. 오른쪽은 석치 정철조가 그린 것이고, 왼쪽 것이 그것을 본떠 그린 이희영의 그림이다. 그림 상단에는 같은 성대중의 시가 다른 글씨체로 적혀 있다. 성대중의 문집 「청성집(靑城集)」에 「석치 정철조가 그린 사슴 그림에 제하다(題鄭石癡喆祚畵鹿)」로 실려있는 작품이다. 내용은 이렇다. “푸른 듯 멋진 사슴 무리 지을만한데, 보슬비에 푸른 풀 석양빛만 가득하다. 내가 저 사슴 타고 성 밖으로 나가리니, 뭇 꽃들 차고 푸른 도담의 구름일세.(蒼然逸鹿可爲, 細雨靑莎漲夕. 我欲騎渠城外去, 衆香寒翠島潭雲.)”

 

오른쪽 사슴 그림은 목 부분과 등 부분이 훼손되어 있다. 뒷면에 그 사연을 적은 나열(羅)의 글이 적혀 있다. 술자리에서 성대중을 처음 만난 정철조가 반가워서 선물로 이 그림을 그려주고, 성대중이 시를 써서 작품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엉망으로 술에 취한 이덕무가 완성된 사슴 그림을 마구 구겨 찢어버렸다. 다들 그림이 아까워 발을 굴렀다. 이튿날 술에서 깬 이덕무도 민망해 어쩔 줄을 몰랐다.

 

정철조는 그림을 다시 그려주겠노라고 약속을 했지만, 얼마 후 갑자기 세상을 뜨는 바람에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제자인 이희영에게 정철조의 그림을 그대로 베껴 그리게 하고, 망가진 원래 그림도 잘 배접해서 나란히 얹고, 그날의 추억 거리로 삼았던 것이다. 그림은 이희영의 것이 결이 한결 곱고 군더더기가 없다.

 

이렇게 초기 천주교회는 각수와 화가 등이 각자 자신이 지닌 탈렌트로 교회의 사업에 봉사하며, 점차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었다. 이희영의 천주교 신앙에 얽힌 이야기는 몇 차례 글을 더 써야 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월 1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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