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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복음으로 세상 보기: 경제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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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02 ㅣ No.1773

[복음으로 세상 보기] 경제생활

 

 

사회교리의 기본 원리들을 토대로 사회 안의 여러 주제들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관점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번 달은 ‘인간노동’에 이어서 ‘경제생활’에 대한 문제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1) 경제생활에 대한 교회의 관점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땅을 맡기고 그곳을 일구며 돌보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창조된 피조물을 보살피는 일을 맡아 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한 분야가 ‘경제’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인 ‘사목헌장’은 인간은 모든 사회의 주체이고 중심이며 목적이라고 선언합니다. “경제 사회 생활에서도 인간의 존엄성과 그 온전한 소명, 사회 전체의 선익은 존중되고 증진되어야 한다. 인간이 모든 경제 사회 생활의 주체이며 중심이고 목적이기 때문이다.”(‘기쁨과 희망’, 63항)

 

교회는 기본적으로 경제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봅니다. 그러나 경제가 절대적인 위치가 될 때, 즉 인간의 노동력이 착취당하거나 횡령당하는 경우, 혹은 지상의 생산 자원이 지속적으로 낭비될 경우에 대해 비판적으로 대응합니다. 인간이 부를 검소하게, 또 기쁘게 누릴 수 있고, 가난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경제의 편을 들어 줍니다. 사회교리에서는 모든 사람이 경제적 발전의 방향을 잡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경제적 생산의 개선과 분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를 기대합니다.(‘기쁨과 희망’ 63, 65항 참조)

 

그러나 가톨릭 사회 교리는 과도한 경제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 또는 한 정치 단체나 몇몇 강대국이 경제를 독과점하는 체제일 때 교회는 이를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경제 양식은 인격, 공동선, 연대, 보조라는 사회 교리의 원리에 어긋나는 경제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2) 가난과 풍요

 

‘가난’이 타의에 의해 빚어진 곤경이며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품이 모자람을 의미한다면, 이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재산과 자기 보전과 물질적인 성장의 기회를 빼앗으려는 ‘악한’ 구조와 부당한 세력을 반대합니다. 그러나 풍족하게 살지 못하는 상대적인 가난을 항상 부정적으로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가난은 인간에게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필요한 것을 깨닫게 하고, 하느님을 신뢰하고 간청하는 개방적인 태도를 지니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때, 물질적인 부를 자발적이고 의식적으로 포기하기도 합니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봉사할 수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태 5, 3 참조)

 

물질적으로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 매일 감사드려야 하는 큰 특전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물질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유하므로 인해 영적인 만족과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과는 달리 부자는 종종 자신의 물질적 풍요로움을 자신의 업적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물질에 집착하는 부자는 소유가 탐욕이 되면 무정한 마음이 뒤따라옴을 늘 경계하며, 예수님의 경고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루카 12, 20)

 

물질적으로 부유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는 표지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마태 6,11)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러한 기도로 우리는 하느님께 지상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간청합니다. 우리는 호화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당한 소유로 행복한 삶을 위해 가족의 부양, 선행, 문화 참여와 교육 그리고 영속적인 발전을 위해 필요한 재화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 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10)

 

 

3) 부의 편중과 양극화

 

부의 증대는 높은 차원의 도덕적 목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모든 인간의 전체적이고 연대적인 발전을 목표로 삼고 있어서 소수의 사람들만 부의 혜택을 얻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경우에 비로소 도덕적이고 합당합니다. 발전이란 인간의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개발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인류의 한쪽은 굶주리고, 다른 한쪽은 양식이 남아돌아서 버린다는 사실은 분노할 일이며 용서받지 못할 죄악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잘못된 결과로 독점 자본주의 체제에서 제한 없는 자유 경쟁을 경제 활동의 최고 법칙으로 여겨, 국가의 간섭도 배제되고, 정부가 공동선을 위해 공권력을 지원하는 일이 부족하여 부의 편중과 양극화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로써 가난한 이들이 소외되었고 가난한 노동자들은 생활을 위협받았습니다. 이러한 혼란이 계속됨으로써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생겨났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교리는 공평한 조세 정책과 사회 보장 제도를 확립하라고 역설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온 인류에게 땅을 주시어 아무도 제외되거나 특권을 누리지 않고 그 모든 성원들의 생계를 유지하게 하셨다. 여기에서 지상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근거가 발견된다.”(‘백주년’ 31항)

 

“가난한 나라들은 자국민들의 빈곤 퇴치와 사회 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또한 그 국민들 가운데 소수 특권층 집단의 터무니없는 소비 수준을 분석하고 더욱 효과적으로 부패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찬미받으소서’ 172항)

 

 

4) 세계화와 해외 원조

 

세계는 경제적으로 점점 더 긴밀해지고 있습니다. 냉전이 끝난 후 경계가 무너지고, 운송의 여건이 크게 개선되며, 특히 디지털 혁명이 일어남으로써 오늘날 세계가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상품을 전 세계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세계 차원의 경제 금융 제도가 기능이 다양해질수록 이를 통제하고 인류 가족의 공동선을 확보하기 위해 국제 공동체는 적절하고 효과 있는 구속 장치를 마련하여 집행하여야 하며, 국제기구들은 인류 가족의 이해를 평등하게 대변해야 합니다.

즉, 국제기구는 자신의 결정으로 초래될 결과를 사전에 평가하여 더 많은 도움과 필요를 기대하는 가난한 지역의 구성원들을 항상 먼저 배려해야 합니다. 이때에 비로소 공동선의 원리 위에서 인간 존엄과 각 개개인의 인간 전체가 발전하는 것이 보장될 수 있고 경제 발전의 혜택도 골고루 나뉠 수 있습니다.

 

“세계화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화가 아니어야 합니다. 이것은 문화들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 다양성은 민족들의 보편적인 조화 내에서 삶을 해석하는 열쇠를 묘사하고 있습니다.”(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 2001년 4월 27일 대담)

 

“연대를 통한 세계화, 소외 없는 세계화를 보장하는 것이 과업입니다.”(1998년 제31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10월호, 이광휘 베드로 신부(서울대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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