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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29: 앙게랑 콰르통의 자비의 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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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2-27 ㅣ No.1329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9) 앙게랑 콰르통의 ‘자비의 성모’


하늘 아래 교황이 둘… 분열된 교회를 감싸는 성모님의 망토

 

 

앙게랑 콰르통, ‘자비의 성모’, 캐다드 제단화, 1452년경, 콩데 미술관, 프랑스 샹티이.

 

 

70여년 만에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재위 1370~1378)이 드디어 로마로 돌아왔다. 교황령을 수호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프랑스 국왕과 추기경단에 성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로마에 있기 때문이라거나 로마의 신자들이 목자 없이 70년을 살았다는 말은 실리적인 명분이 되지 못했다.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이 그들의 이런 생각을 간파할 수 있었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로마 귀환 15개월 만에 선종한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은 앞서 클레멘스 6세(재임 1342~1352) 교황의 조카로 삼촌이 19살에 추기경으로 임명한 인물이었다. 이후 그는 줄곧 이탈리아에서 생활하며 공부하고 여행했다. 페루자대학교에서 신학과 법학을 공부했고,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를 여행했다. 1367년 복자 우르바노 5세 교황이 로마를 찾았을 때, 그를 안내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이탈리아인 추기경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1370년 우르바노 5세 교황이 사망하자 아비뇽에서 콘클라베가 열렸고, 이탈리아 추기경단과 프랑스 추기경단의 의견이 갈리는 가운데, 제3의 인물로 떠올라 그레고리오 11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시에나 카타리나의 간절한 요청과 충고를 들었고, 로마 백성에 대한 연민과 중요성을 인식했다. 우르바노 5세 교황이 한 번 귀환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경험도 잘 알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전쟁 중에 있었고, 피렌체 공국이 주변의 영지를 넓혀가면서 교황의 환도를 방해했다. 그런데도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로마교구장으로서 더는 교구를 비워둘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목숨을 건 환도를 감행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1377년 1월 7일 로마에 무사히 당도했다. 아비뇽에서 출발한 지 4개월여 만이다. 환도를 결정한 때부터 긴 여행까지, 교황은 기력이 쇠약해질 때로 쇠약해졌고, 귀환 15개월 만에 선종했다. 48세였다.

 

 

로마계와 아비뇽계 교황들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의 사망으로 이번에는 로마에서 콘클라베가 열렸다. 다시 긴장감이 돌았다. 로마 백성들은 프랑스인이 아닌 이탈리아인 교황으로 뽑아달라고 압력을 넣었고, 로마 출신 바르톨로메오 추기경이 우르바노 6세 교황(재위 1378~1389)으로 선출되었다. 로마교구 신자들은 또다시 목자 없는 신세가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프랑스 추기경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에서 뽑힌 교황을 인정할 수 없다며 무효라고 선언하고 아비뇽에 모여 프랑스인 클레멘스 7세를 대립 교황으로 선출해 버렸다.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이 로마로 복귀했으나 아비뇽 시절을 겪으면서 발생한 교회 혼란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이것을 시작으로 교회는 40년 동안 극심한 분열기를 맞게 되었다. 서방 교회 안에서 일어난 분열이었다. 이것은 신학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정치적인 문제로 일어난 분열이었다.

 

양쪽 진영에서 계속해서 후계자를 내면서 골은 갈수록 깊어졌다. 정통 교황으로 인정되는 로마계는 우르바노 6세에 이어 보니파시오 9세(재위 1389~1404), 인노첸시오 7세(재위 1404~1406), 그레고리오 12세(재위 1406~1417)였고, 아비뇽계는 클레멘스 7세에 이어 베네딕토 13세(재위 1394~1417)가 후임 교황이 되었다.

 

로마계와 아비뇽계의 교황이 재임하는 동안 유럽도 두 동강이 났다. 로마계에 순명을 선언한 국가는 영국, 포르투갈,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폴란드, 헝가리, 아일랜드,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국가들과 플란데런의 세 개 왕국들이었다. 아비뇽계에 순명 서약을 한 국가는 프랑스, 아라공, 카스티야, 키프로스, 부르고뉴, 나폴리, 스코틀랜드, 시칠리아와 사보이 공국이었다. 더 당혹스러웠던 것은 양쪽 진영에서 각자 성인들까지 나섰다는 것이다. 로마계에서는 시에나의 카타리나가 로마에서 뽑힌 교황이 정통이라며 백성을 설득했고, 각국의 정치인들을 만나 설득했다. 아비뇽계에서는 빈센트 페레르가 나와서 클레멘스 7세를 응원했다. 두 사람 다 후에 성인품에 올랐다.

 

 

분열이 종식되기까지

 

이런 분열의 양상이 지속되자,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도 이어졌다. 하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409년 3월 25일, 양측 추기경들은 피사에서 교회 회의, 곧 공의회를 열어 문제를 해결하자고 했다. 공회의 결과는 베네딕토 13세와 그레고리오 12세를 둘 다 해임하고, 밀라노의 대주교 필라르기를 알렉산드로 5세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러자 두 교황이 사임을 거부하고 공의회 교황을 인정하지 않자, 결국 교회 안에 세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공의회는 교황이 3명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누가 정통이냐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세 명을 모두 퇴진시키고 새 교황을 선출하기로 했다. 그 사이, 피사계의 후임으로 요한 23세가 뽑혔다. 이런 막장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이번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가 나섰다. 1414년 황제는 독일의 코스탄자에서 세 명의 교황을 모두 소집했다. 비록 황제가 소집했어도 참석한 주교들은 교회 공의회로 간주했고, 공의회 교부들은 ‘공의회 지상주의’와 교황 선출은 콘클라베가 담당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피사계 요한 23세를 해임하고, 끝까지 사임을 거부한 아비뇽계의 베네딕토 13세를 폐위시켰다. 로마계 그레고리오 12세는 ‘교회의 이익을 위해’, ‘공의회 권위’를 인정한다며 자진 사임했다. 이어서 새로 콘클라베를 열어, 로마의 명문가 콜론나 가문 출신의 오도네 추기경을 마르티노 5세 교황(재위 1417~1431)으로 선출해 분열을 종식했다.

 

 

프랑스 미술계 독창적 명작 남긴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르네상스 시기, 프랑스 북부 지방 출신으로 화가 겸 세밀화가로 활동한 앙게랑 콰르통(Enguerrand Quarton, 1418?~1466)의 ‘꺄다흐 제단화(Retablo Cadard)’다. 흔히 ‘자비의 성모(La vierge de misricorde de la famille Cadard)’(1452년)로 알려졌다.

 

콰르통은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역 랑(Laon)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 로베르 캉팽, 얀 반 에이크 등 플랑드르 작가들의 작품을 접하며 그들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르네상스 시기, 프랑스 미술에 독창적인 명작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444~1445년경, 아비뇽의 프티 팔레 미술관에 있는 ‘레퀴엠 제단화’를 그렸고, 같은 해에 샹티이의 콩테 미술관(Muse Cond)에 있는 ‘캐다드 제단화’를 그렸다.

 

‘꺄다흐 제단화’ 또는 ‘자비의 성모’라는 이 작품은 원래 (프랑스) 아를에 있는 한 성당의 제단화로 사용하기 위해, 잔 쨔다흐와 그의 아내 잔느 드 몰링이 자기네 집안 수호성인인 요한 세례자와 요한 사도가 있는 ‘자비의 성모’를 콰르통에게 의뢰하여 봉헌했다. 제단화 관련 문서에는 하단의 프레델라와 꼭대기 치마사도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 찾을 수 없으니 분실된 것으로 본다. 이후 콰르통은 잠시 아를에서 활동하다가, 1447년 봄부터 사망할 때까지 아비뇽에 있었다.

 

아비뇽은 과거 70년간 7명의 교황이 머물면서 많은 왕족, 귀족, 학자, 시인,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문화 예술의 중심지가 됐다. 아비뇽 학파로 불린 예술가들은 15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는데, 콰르통은 그 대표적인 예술가로 손꼽힌다.

 

 

그림 속으로

 

‘성모의 대관식’과 함께 콰르통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자비의 성모’는 콩데 미술관 조토 갤러리(Le Cabinet du Giotto)에 있다. 그림은 이콘 형태로 비교적 단순하다. 양쪽 끝에, 좌측에 요한 세례자 요한, 우측에 요한 사도가 제단화를 후원한 꺄다흐 부부를 성모에게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성모의 망토 밖에 있어 아직 현실의 인물임을 말해준다.

 

성모의 망토 속에는 교회의 ‘대분열’시기에 유독 명이 짧았던 여러 인물이 있다. 로마와 아비뇽계 교황들과 양쪽 교회를 지지하던 사람들이 모두 성모의 망토 속에 들어 있다. 교회가 안팎에서 그토록 싸우고 쪼개져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마리아의 망토를 빌려 여전히 교회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작품에 붙은 부제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자신과 화해한 교회의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2월 25일,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8/84/Vierge_de_mis%C3%A9ricorde_-_Enguerrand_Quarton_-_Mus%C3%A9e_Cond%C3%A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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