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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한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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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30 ㅣ No.594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한 정의

 

 

「신학대전」 제II부 제2편은 덕과 악덕에 대한 매우 상세한 논의로 가득 차 있다.

 

먼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대신덕(향주덕)을 다룬 다음에, 예지, 정의, 용기, 절제라는 사추덕을 각각 다룬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정의의 덕은 ‘으뜸가는 덕’(II-II,58,12)이라고 불리며 질문 57부터 122까지. 가장 많은 분량으로 다루어진다.

 

 

정의에 대한 일반적인 규정과 공동선

 

아퀴나스는 여기서 구체적으로 “정의란 각자의 몫을 각자에게 돌려주는 데 있어서 완전하고 항구한 의지이다.”(II-II,58,1)라는 정의(定義)를 내린다. 그에게서 정의가 윤리 덕 중에서 으뜸인 까닭은 그것이 개인의 개별적 선(bonum singularis)이 아닌 공동선(bonum commune)을 대상으로 하는 덕이기 때문이다(II-II,58,11).

 

정의는 개인들 사이의 관계 또는 공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시민을 상대로 한 관계, 곧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발생한다(II-II,58,5).

 

현명, 용기, 절제 같은 개인적인 덕목도 어떤 모양으로든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면이 있지만, 정의는 처음부터 곧바로 공동체의 질서와 공동선에 직결된 덕목이다.

 

 

정의와 법의 연관성

 

아퀴나스에 따르면, 공동선은 법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정의는 곧 법적인 정의(justitia legalis)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가 생각하는 정의에는 권위를 지닌 국가가 전체의 공동선을 위해 개인을 규제하는 것이 포함된다.

 

아퀴나스는 정의와 관련해서 구체적으로 자연법(jus naturale)과 만민법(jus gentium)을 구분한다.

 

절대적으로 옳은 자연법은 인간이 선을 행하고 자신의 목적에 다다르고자 사물의 본성상 따라야 할 길을 제시해준다. 이를테면, 부자(父子) 관계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양육해야 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경우가 자연법에 속한다.

 

그러나 땅 주인이 경작과 사용 때문에 자신의 땅을 소유하는 것은 절대적 필요는 아니다. 오히려 어떤 특정한 사람이 한 사물을 소유하는 것이 옳을 수 있는 이유는 결과의 유용성 때문이며, 이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 이성에 따라 자연스럽다”(II-II,57,3).

 

이렇게 아퀴나스는 만민의 이름으로 사유재산을 정당화한다. 만민법은 자연 이성에 따라 본성적으로 정당화되기 때문에 그 법을 만들 다른 기관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사유재산 제도가 자연법이 아니라 만민법이라고 함으로써, 신의 피조물인 재화를 공유하는 것이 사물의 본성에 적합하다고 볼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따라서 사유화를 위해서는 꼭 공공의 동의(condictum publicum)가 필요하다.

 

자연법과 공공질서에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실정법은 정의롭다고 할 수 없는데, 예컨대 아퀴나스는 도둑질이나 간음과 같은 범죄를 실정법에서 합법으로 만들 수는 있다고 말한다(II-II,57,2,ad2).

 

아퀴나스는, 정의에 대한 긴 논변을 끝내면서, 우리 각자가 수행해야 할 일들을 명백히 밝히는 십계명과도 직접 연결한다(II-II,122,1).

 

 

교환 정의와 분배 정의

 

아퀴나스는 성경의 예를 통해서 정의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완전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답게,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제시된 정의에 관한 가르침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이를테면 교환 정의와 분배 정의를 뚜렷하게 구분하고 적극적으로 이를 활용한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이 두 정의는 특수한 사람들 사이에서 또는 각 개인이 포함되는 공동체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질서를 다루는 특수 정의에 속한다(II-II,61,1).

 

교환 정의는 개인들 사이의 상호 거래를 규제하는 정의이다. 이것은 준 만큼 받고 받은 만큼 되돌려 주는 산술적 평등에 따라 이루어진다. 분배 정의는 공동체가 개인에게 공공의 재화를 분배하는 데 필요하며, 비례적 평등으로 이루어진다. 곧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크게 기여했기 때문에, 그 비율에 따라 더 많은 재화를 배분받게 된다(II-II,61,2).

 

구체적 차원에서 보면 개인이나 집단 사이의 거래를 규제하는 계약은 사람들의 권리를 엄격하게 존중하는 교환 정의에 따라야 한다. 교환 정의는 소유권보호와 채무의 변제, 자유로이 계약한 의무의 이행 등을 요구한다.

 

분배 정의는 공동체가 시민들에게 이행해야 할 바를 규제한다(II-II,61,2&4). 공동체의 지도자는 구성원 하나하나의 필요와 공헌도를 고려하면서 화합과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분배 정의를 현명하게 실행해야 한다.

 

 

불의와 이를 극복하는 정의의 회복

 

아퀴나스는 ‘선을 행하고 악은 피하라’라는 일반적인 원리를 정의의 영역에 적용하는데, 이웃을 위해 정당한 것을 행하고, 이웃에게 해가 되는 것을 피하고자(II-II,79,1) 구체적인 예들을 제시한다.

 

불의(injustitia)에 대한 일반적인 규정(II-II,59)에 이어 살인, 절도와 강도 등을 다룬 뒤 재판과 관련된 불의로서 재판관, 죄를 범한 사람, 증인, 변호사들이 저지를 수 있는 불의를 상세히 다룬다(qq.67-71).

 

계속해서 모욕, 중상, 불평, 조롱, 저주(qq.72-76) 등 이웃의 명성과 명예를 해지는 언어와 관련된 불의를 다룬다. 각 사람은 자신의 명예와 명성에 대한 타고난 권리를 누리며 존경을 받을 권리를 누리기 때문에, 이런 불의는 모두 정의의 덕을 훼손시킨다.

 

이처럼 많은 불의가 이웃에게 해를 끼친다. 정의와 진실을 거슬러 지은 모든 죄는, 그 당사자가 용서를 받았더라도 배상할 의무가 있다.

 

아퀴나스는 구체적으로 불의를 검토하기 전에 응보와 배상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것이 교환 정의에 속한다고 규정했다. 그런데 응보는 행한 만큼 당하도록 똑같이 되돌려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범죄자가 사회의 안정과 질서라는 공동선을 해친 값도 따로 치르도록 한다. 그런 다음에야 행함(actio)과 당함(passio)이 동일하게 교환되기 때문이다(II-II,61,4).

 

 

신에 관한 경신덕과 기타 덕들

 

그런데 “각자에게 그의 몫을 되돌려 준다.”라는 정의에는 신에게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리는 일도 포함한다. 따라서 아퀴나스는 ‘경신덕’(敬神德)이라고 불리는 신을 향한 정의, 곧 신심, 기도, 흠숭, 제사, 십일조, 서원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룬다(qq.80-100). 또한, 법적, 윤리적 의무를 어기고 신에게 드리기를 거부하는 우상 숭배, 점술, 신에 대한 시험, 신성모독, 성직매매 등도 비판한다.

 

경신덕에 이어서 아퀴나스는 사람들에 대한 공평과 공동선을 촉진하는 조화를 인간관계 안에 확립하도록 하는 정의와 관련된 기타의 덕과 악덕들(qq.101-119)도 다룬다. 여기에는 효성, 순종, 존경, 순명, 감사, 진실성, 친절, 자선과 동시에, 이와 대비되는 불순명, 망은, 거짓말, 위선, 허풍, 아부, 인색, 낭비 등이 속한다.

 

제목들만 나열하기에도 벅찬 이 엄청난 내용은 전문가들도 충분히 연구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참조해야 할 값진 충고들이 담긴 보물 창고이다.

 

 

맺음말

 

논의를 마시면서 우리는 “정의에 따라 이미 주었어야 할 것을 마치 사랑의 선물처럼 베풀어서는 안 된다.”(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사도직 활동」, 8항)라는 충고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경신덕에 대한 논의에서도 암시되었듯이 신이 모든 사람을 위해 창조하신 재화가 정의에 근거해서, 그리고 사랑의 도움으로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도 즐겨 인용했던 “평화는 정의의 결과이며 사랑의 결실이다.”(사목 헌장, 78항)라는 가르침은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 안에도 잘 드러나 있다. 아퀴나스는 신학적 덕의 대표가 사랑이요. 윤리적 덕의 대표가 정의라면, 결국 인간의 덕은 사랑과 정의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II-II,58,6).

 

따라서 정의에 대한 「신학대전」의 엄청난 분량의 진술들은 “사랑은 정의의 실천을 요구하고, 또 사랑만이 우리가 정의를 실천할 수 있게 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889항)는 가르침에 비추어 봐야 할 것이다.

 

* 박승찬 엘리야 - 가톨릭대학교 철학 전공 교수.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맡으며 한국가톨릭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라틴어 중세 철학 원전에 담긴 보화를 번역과 연구를 통해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다양한 강연과 방송을 통해 그리스도교 문화의 소중함을 널리 알린다. 한국중세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20년 10월호, 박승찬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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