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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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정산 성지: 복자 이도기 바오로의 순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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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1-15 ㅣ No.1937

[땅에 쓰여진 신앙 이야기] 정산 성지


복자 이도기(李道起) 바오로의 순교지

 

 

충남 청양군 정산 성지는 복자 이도기(李道起) 바오로가 1798년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장소이다. 복자 이도기 바오로는 1743년 충청남도 청양에서 태어났다. 청양 지역에 복음이 전해진 시기가 1786년 이전이었으므로 이 무렵에 입교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비록 배운 것은 없었을지라도 생활은 비교적 넉넉하였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가 된 뒤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데 재산을 사용하여 점점 가난하게 되었고, 1791년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 떠돌다 정산의 비신자 옹기촌에 정착하여 그 마을 사람들을 모두 입교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가 1795년 을묘박해 이전이었다. 1797년 이도기 바오로의 나이 54세가 되었을 때 정사박해가 발생하였다. 그때 인근의 한 비신자가 “천주교인들의 두목으로 고발하겠다.”라며 그를 위협하였고, 이에 겁이 난 그의 아내는 도망할 것을 권하였다. 하지만 이도기 바오로는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일을 하려 하지 않았고, 신입 교우들이 자신의 행동에 걸려 넘어질 것을 염려하여 이를 거절하고 그해 6월 8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정산 관아로 끌려간 이도기 바오로는 자주 현감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또한, 때때로 포졸들은 그를 장터로 끌고 나가 모욕을 주거나 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이에 굴복하지 않았고, 배교를 강요하는 현감 앞에서 용감히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였다. 1798년 새해가 된 후 이도기 바오로는 다시 한번 정산 현감 앞으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현감이 벼슬을 주겠다고 회유하자, “나리께서 정산 고을을 다 주신다 해도 저는 하느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로 굳은 신심을 드러냈다.

 

1798년 7월 15일 이도기 바오로는 옥으로 찾아온 아내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듯이 7월 22일 이후에는 “먹을 일도 없고, 기도할 수도 없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7월 22일 장터로 끌려가 모진 형벌을 받고 투옥되었다. 옥중에서도 천주를 대월(對越 : 현실을 뛰어넘어 하느님을 마주 뵘) 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고, 마지막 심문 때에 극도의 고통에 달하였을 때 하늘을 우러러 “아배(아버지)”를 부르며 늘 그분 곁에 머물러 있으려 하였다. 또한, 자신의 옥중 생활과 고난을 예수님과 성모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기도와 고신극기를 통해 이겨내었다. 이도기 바오로는 현감의 명에 따라 7월 24일 저녁 옥 밖으로 끌려 나와 연속되는 포졸들의 모진 매질 가운데 순교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현감의 명에 따라 낙지리 점촌 사람들이 옮겨가 안장했는데, 7~8일 후 그의 순교 소식을 듣고 온 100리 밖의 신자가 시신을 옮겨가 자신의 집 (혹은 어느 신자 집) 뒤에 안장했다고 한다. 그의 믿음살이는 박해시대 신자들 안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으나 죽음에 임박하여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 충남 청양군 정산면 서정2길 12-2

 

[2020년 11월 15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대전주보 4면, 사진=대전가톨릭사진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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