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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20: 5세기 (1) 오리게네스 논쟁

92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7-04-16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20) 5세기 ① 오리게네스 논쟁


논쟁이 끊이지 않았던 오리게네스 사상

 

 

- 오리게네스.

 

 

플라톤 사상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는 오리게네스(Origenes, 185경~254)의 사상은 고대 그리스도교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오늘날 ‘오리게네스 논쟁’이라고 불리는 이 논쟁은 교의 신학뿐 아니라 영성 신학과도 연결되면서 그리스도인 영성 생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논쟁의 정치적, 정서적 배경

 

오리게네스 논쟁의 1차전은 4세기 말경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시작했습니다. 이집트 내 오리게네스 가르침을 반대하던 사람들에게 영향받은 콘스탄티아의 주교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Constantiensis, 310/20~403)는 이단을 다룬 저서 「약상자(Panarion)」에서 오리게네스의 이름도 포함시켰습니다. 393년 예루살렘을 방문한 에피파니우스는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오리게네스를 존경하는 현상을 보고 축일 강론을 통해 예루살렘의 주교 요한(Ioannes Hierosolymitanus, 356경~417)을 오리게네스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그에게 오리게네스를 단죄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예루살렘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347/48~419/20)는 평소 친분이 있던 에피파니우스에 동조해 오리게네스 사상을 비판했습니다. 이에 히에로니무스와 오랜 친구이자 오리게네스주의자였던 루피누스(Rufinus Aquileiensis, 345~410/11)는 요한과 함께 히에로니무스를 비난하며 오리게네스 사상을 옹호했습니다. 

 

논쟁이 격렬해지자 397년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테오필루스(Theophilus Alexandrinus, 345경~412)는 히에로니무스와 루피누스 사이에서 중재자로 나서며 잠정적으로 논쟁을 끝냈습니다. 그러나 중재는 미봉책에 불과했습니다.

 

논쟁 이후에도 히에로니무스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오리게네스의 작품을 라틴어로 번역했으며, 루피누스도 로마로 돌아가서 오리게네스 작품의 라틴어 번역본 보급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여전히 갈등과 대립의 관계가 유지되었습니다.

 

 

동방 수도자들 사이에 충돌

 

오리게네스 논쟁의 2차전은 이집트 수도자들의 수도 생활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오리게네스주의자들과 친분으로 오리게네스에게 반감이 없던 테오필루스는 오리게네스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비판만 일삼는 학식이 짧은 수도자들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이러한 수도자들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유물론적 신관에 빠진 ‘신인동형론자(Anthropomorphites)’라는 비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반면, 이집트 사막에는 학식 있는 수도자들도 있었습니다. 카파도키아의 교부들 및 루피누스와 친분이 있었던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Evagrius Ponticus, 345/46경~399)는 오리게네스 사상을 배워 익혔습니다. 특히 에바그리우스는 오리게네스의 신비사상을 기반으로 수도자들에게 수도 생활을 격려했습니다. 그의 명성이 자자하자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요한 카시아누스(Ioannes Cassianus, 360/65~430/35경)와 동료 게르마누스(Germanus, 360경~?)는 이집트로 옮겨와 에바그리우스에게 수도 생활을 배웠습니다. 다만 지성 중심의 사변적인 오리게네스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 일부 수도자들은 오리게네스 사상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 비판했습니다.

 

399년 에바그리우스 사망 후에 테오필루스는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을 단죄하는 칙서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신인동형론자로 여겨지며 오리게네스 사상을 거부했던 학식이 짧은 수도자들은 테오필루스에게 물리적인 압박을 가하면서 총대주교의 칙서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테오필루스는 그들을 달래주고자 환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테오필루스는 400년 교구 공의회를 통해 오리게네스를 단죄하고 오리게네스주의자 수도자들도 이집트 사막에서 추방했습니다. 또한 테오필루스는 교황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 PP. I, 재임 399~402)를 압박하여 400년 로마 종교회의에서 오리게네스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에 충실한 신앙인이 아니라는 선언을 이끌어냈습니다. 결국 유물론적 신관을 지녔던 수도자들이 면죄부를 받은 꼴이 되었으며, 순명 정신보다 물리적인 폭력이 앞서는 좋지 않은 사례를 남겼습니다.

 

 

서방 수도 생활에 영향을 끼침

 

이 사건으로 카시아누스와 제르마누스는 십여 년 동안 살았던 이집트를 떠나 콘스탄티노플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카시아누스 일행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요한 크리소스토무스(Ioannes Chrysostomus, 349/50~407)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안티오키아 학파에 더 가까운 학자였기에 평소 오리게네스 사상에 공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집트에서 쫓겨 온 수도자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고 생각한 크리소스토무스는 테오필루스에게 그들의 선처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의 지위가 상승한 것에 불만을 지닌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는 403년 퀘르치아 주교회의에서 크리소스토무스의 반대자들과 모의해 크리소스토무스가 방탕하다고 비방함으로써 면직을 성사시켰습니다. 또한 크리소스토무스에게 나쁜 감정을 가졌던 동로마 황후 에우독시아(Eudoxia, ?~404)는 황제 아르카디우스(Arcadius, 377/78~408)를 부추겼으며, 결국 황제는 시민들의 반대에도 크리소스토무스를 유배 보냈습니다. 따라서 크리소스토무스가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고 생각한 카시아누스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1세(Innocentius PP. I, 재임 402~417)를 만나 크리소스토무스를 변호하겠다며 404년 로마로 향했습니다.

 

사실 오리게네스 논쟁에 있어 카시아누스는 중심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카시아누스의 스승이었던 에바그리우스가 논쟁에 관련되었으며 카시아누스 자신도 이집트 수도자들과 관련되어 이집트 사막에서 원하지 않는 추방을 당했습니다. 게다가 후견인이었던 크리소스토무스까지도 간접적으로나마 오리게네스 논쟁의 연장선에서 불행한 결과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전화위복으로 동방 수도 생활을 잘 익힌 카시아누스는 그 전통을 서방 교회에 전달함으로써 서방 수도 생활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오리게네스 논쟁의 대미는 6세기에 발생했습니다. 시나이 지역 수도자들이 오리게네스 논쟁을 다시 벌였습니다. 결국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Iustinianus I, 482~565)가 543년 반(反)오리게네스 칙령을 반포했고,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오리게네스를 이단자로 언급함으로써 오리게네스 논쟁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리게네스 사상은 영성 생활에 이로움과 해로움을 동시에 안겨 주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4월 16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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