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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법

117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10-30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법

 

 

나이 들면서 갑자기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가까웠나 하는 말들을 툭 던집니다. 무의식이 자신의 죽음을 눈치채기 때문에 갑자기 죽음을 준비할 수도 있고, 또 실제로 뇌에 변화가 일어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하는 수도 있습니다. 죽기 전 변화는 서로를 용서하고, 정말 사랑했던 사람에게 다가가 못했던 말을 하는 등 낭만적인 영화에서처럼 아름답고 긍정적일 수만은 없습니다. 전두엽쪽에 병이 생기면 오히려 더 난폭해지고, 더 수치심을 모르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장수 시대라, ‘철들자 노망난다.’는 옛말과는 조금 다르게, 꽤 많은 사람들이 죽기 전 자신의 삶에 대해 충분히 숙고하고 정리 할 시간이 주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에는 단순한 산수가 적용되는 것이 아닌지, 늙을수록 더 추하고 더 초라해질까 봐 많은 이들이 걱정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과 관련있는 대목 중 하나가 마태오복음 17장 예수님의 변모 사화입니다. 우선 이 대목은 “여기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태 16,28; 마르 9,1; 루카 9,27)라고 말씀하신 후 엿새 후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같은 말을 마르코복음 9장 1절에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씁니다. 이를 예수님의 청중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역사의 종말이 닥친다는 ‘종말시한어’라고 정의합니다. 종말이 임박했다고 확신하는 말세 신앙과 연결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해석은 일주일 후에 닥칠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와 그가 아버지의 영광 속에 다시 돌아온다는 예지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사람의 아들이 갖고 있는 권위와 왕국이 부활 후 교회로 다시 내릴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신학적인 해석에 대한 판단능력은 없으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을 맛보지 않을 사람”이란 우리들이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진시황 식의 장수와 신체적 영생은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베드로를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런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얘졌습니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그분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스라엘의 동북쪽에 있는 헤르몬(Hermon, 헐몬)산에서 일어난 일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산들은 대부분 그리 높지 않지만, 헤르몬산은 해발 2000M가 넘기 때문에 초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후 사정으로 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이 산으로 올라갈 때는 수난과 부활 전 시기이니 충분히 눈이 많이 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그런데 선글라스 없이 설산에서 며칠 머물다 보면 설맹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일시적이라 대부분 하산하면 회복이 되는데, 옷이 하얗고, 얼굴이 해처럼 빛난다는 묘사가 어쩌면 그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하는 과학적인 추측을 해 보게 됩니다. 이때 환시나 착시 현상도 일어날 수 있어 모세나 엘리야의 모습이 예수님과 검쳐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조금은 발칙 한 상상도 해 보게 됩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런 장면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읽고 묵상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곧 있을 십자가에서의 수난과 부활을 준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당시 제자들로서는 모세나 엘리야에 버금가는 분을 모시게 되었으니 가슴 뛰는 순간이었을 터입니다. 한데,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모세나 엘리야와 함께했다는 사실은 이미 예수님께서 삶과 죽음의 차원을 넘어선 경계에 이르신 것이라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평범한 우리에게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므로, 사는 날까지는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열심히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기 암 환자도 죽는 그날까지 열심히 암과 투쟁하면서 사는 것을 영웅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이미 아시고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기 위해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간 것은 아닐까요.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을 데리고 간 것은 그런 족적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고 두고두고 새기라는 뜻은 혹시 아니었을까요. 가장 수수께끼 같은 대목 중 하나이긴 하지만,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과거에 죽은 사람들처럼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먼저 죽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배워 준비를 해야 할지는 각자의 선택일 것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 처럼 삶에 집착했던 이들과 매일 성스러운 죽음을 준비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삶은 많은 차이가 있을 듯 싶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준비와 완전히 반대편 쪽에 헤로데 임금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 20-25절은 아주 간단하게 헤로데 임금이 어떻게 죽었는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헤로데는 티로와 시돈 사람들과 분쟁관계에 있었는데 평화조약을 맺기로 한 날 용포를 입고 옥좌에 앉아 멋진 연설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신으로 추앙하게 됩니다. 그러자 주님의 천사가 헤로데를 내리쳤고, 그는 벌레에 먹혀 죽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신약에는 생각 외로 지옥에 대한 묘사가 많지 않은데 마르코복음 9장 48절에 지옥에서는 죄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사야서에는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이 나오고(이사 41,14) 다윗은 자신을 구더기요 백성들의 조통거리(시편 22,6)라고 비하했습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원전일까요. 벌레로 변한 자신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체험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때론 벌레보다 못한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고, 또 상대를 벌레 취급할 때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양쪽 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상실하는 순간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헤로데 임금이 벌레에 먹혀 죽었다는 것을 중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옥 불에 떨어졌다는 뜻일 수도 있고, 구더기 같은 백성들에 의해 며칠 동안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습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신의 반열에 이른 듯 연설을 하며 한껏 고조되었지만 결국 버러지보다 못한 죽음을 맞았던 헤로데 임금의 마지막은 예수님의 부활과 대조되는 장면입니다. 나 자신의 죽음이 언제 올지 모르나, 어떤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할지 냉정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구절입니다.

 

[월간 빛, 2024년 10월호, 이나미 리드비나(서울대학교병원 공공진료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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